詩選集『洪海里는 어디 있는가』(2019)

비백飛白

洪 海 里 2018. 12. 28. 10:20

비백飛白

 

洪 海 里

 

 

그의 글씨를 보면

폭포가 쏟아진다

물소리가 푸르다

언제 터질지 모를

불발탄이 숨겨져 있다

한켠 텅 빈 공간

마음이 비워지고

바람소리 들린다

펑! 터지는 폭발소리에

멈칫 눈길이 멎자

하얀 눈길이 펼쳐진다

날아가던 새들도

행렬을 바꾸어

끼룩대면서

글씨 속에 묻히고 만다

길을 잃은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한 구석에보일 듯 말 듯

뒷짐지고 서 있던

그가 화선지에서 걸어 나온다.


- 시집『비밀』(2010, 우리글)




* 글씨는 많은 기의를 숨기고 있는 기표이다. 화자는 '비백'이라는 창을 통해

그 글씨의 기표 너머에 흐릿하게 존재하는 기의들을 새롭게 발견해 나간다.

폭포와 푸른 물소리를 보고, 불발탄을 발견하고, 바람 소리를 듣는 것이다.

불발탄이 터지자 하얀 눈길이 펼쳐지고, 날아가던 새들도 글씨 속에 묻힌다.

그렇게 하나의 기표를 통해 다양한 기의를 보고 들을 수 있는 것이 시인의

눈이다. 글씨를 쓴 사람의 솜씨가 얼마나 뛰어나면 이런 역동감을 줄 수 있을까.

화자는 글씨에서 보이지 않던 사람이 걸어 나오는 것을 보는데, 그는 곧 필자

이거나 글씨의 아름다움에 취해 감상하던 화자 자신일는지도 모른다.

 

-『2009 오늘의 좋은 시』(푸른사상, 2009. 13,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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