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選集『洪海里는 어디 있는가』(2019)

봄, 벼락치다

洪 海 里 2018. 12. 27. 17:58

봄, 벼락치다


洪 海 里


 

  천길 낭떠러지다, 봄은.

  어디 불이라도 났는지
  흔들리는 산자락마다 연분홍 파르티잔들
  역병이 창궐하듯
  여북했으면 저리들일까.

  나무들은 소신공양을 하고 바위마다 향 피워 예불 드리
는데

겨우내 다독였던 몸뚱어리 문 열고 나오는게 춘향이 여부없다

아련한 봄날 산것들 분통 챙겨 이리저리 연을 엮고 햇빛이 너무

맑아 내가 날 부르는 소리,

  우주란 본시 한 채의 집이거늘 살피가 어디 있다고 새
날개

위에도 꽃가지에도 한자리 하지 못하고 잠행하는 바람처럼

마음의 삭도를 끼고 멍이 드는 윤이월 스무이틀 이마가 서늘한

북한산 기슭으로 도지는 화병,

  벼락치고 있다, 소소명명!

 


* http://cafe.daum.net/yesarts에서 옮김.

 


 - 시집『봄, 벼락치다』(2006, 우리글)





   * 蘭丁의 시집『봄, 벼락치다』(2006)에 수록되어 있는 작품이다. 봄의 경이를 낭떠러지와 벼락이라는 역설적인 두 이미지로 제시하고 있다. 겨울에서 봄으로 바뀌는 계절적인 급격한 변이를 ‘천길 낭떠러지’로, 봄이 화자의 심리에 던지는 충격을 ‘벼락’으로 보았으리라. 그러나 그 벼락은 화자를 혼절케 하는 파괴적인 것이 아니라 내면을 환하게 밝히는 광명[昭昭明明]이다. 두 이미지를 작품의 전후에 배치하여 사진의 액자처럼 감싸고 있는 구조도 흥미롭다.

  속도감 있게 번지고 있는 북한산 자락의 진달래꽃들을 타오르는 불, 유격대(파르티잔)의 격전, 창궐하는 역병 등 역동적인 이미지로 표현하고 있다. 싱그럽게 잎을 피우는 나무는 푸른 불꽃으로 몸을 태우는 소신공양인가? 바위 사이에서 피어오르는 아지랑이도 향불 같다. 한겨울 감추었던 종아리 드러내고 거리로 나온 여성들 다 춘향이처럼 곱다. 벌이며 나비 같은 생명이 있는 것들은 몸치장하고 짝을 찾는구나. 이 밝은 봄날 그냥 보내지 말라고, 내 속에서도 나를 일깨우는 소리 은은하다.

  제4연은 좀 난해한 면이 없지 않지만 내 나름대로 더듬어 읽어 보면 이런 뜻이 아닌가 짐작된다. 우주 안에 존재하는 삼라만상은 일체가 한 집안 식구와 같다. 그러므로 서로 분별할 일이 아닌데 새의 날개나 나뭇가지를 스치고 지나는 바람처럼 내 마음속에도 잔잔한 파동이 일어난다. 속된 욕망을 잘라내고자 하나 뜻대로 잘 되지 않는 이 고뇌, 이 봄에도 북한산의 봄과 더불어 내가 앓는다. ‘화병’의 ‘화’는 火와 花의 중의重義를 지닌 시어로 보아 무방하리라.

  이처럼 난정의 시는 활력이 넘쳐난다.            

        - 임보 (시인)

 

 * 이 작품은 우선, '봄'을 '천길 낭떠러지'로 비유하고 있다. 약간 의외의 결합이다.

연을 달리하여 생각할 여지를 두었기에 독자들이 일단 이를 수용하고 상상력을 전개시켜나가면 그 다음부터는 거침이 없다.

 즉, '낭떠러지'라는 보조관념을 투영해 보면 산자락마다 피어난 연분홍 꽃들은 '파르티잔'이 될 수밖에 없다.

 그것은 산을 타고 오르는 '불'이기도 하다.

 '역병이 창궐하듯/ 여북했으면 저리들'이겠는가.

 그 봄이 밀어올린 극점에 '천길 낭떠러지'가 있었던 것이고, 거기에서 '벼락'소리가 들려온 것이다.

 그것은 꽃들이 피어나는 소리의 합창이겠지만, 그에 감응하여 일어난 "내가 날 부르는 소리"이기도 하다.

 그래서 여기까지 따라온 독자들은 그 봄 풍경 앞에서 또한 자기 자신과 맞딱뜨리는 경험을 하게 된다.

        - 임수만(한국교원대학교 교수)

 

  * 조응은 대자다. 조응은 즉자적 자연-기호의 의식적 읽기이다. 허나 조응은 대자화된 의식을 변증법적 합일을 통해서 모든 의식적 사태를 다시 말-자연으로 회귀시킨다. 이를테면 홍해리의 시들은 그 자체로 자연화를 지향하고 있다. 자연의 시말화를 통한 말-자연의 실현. 이것이 바로 홍해리의 시말 내에 육화된 시적 사태인데, 그것은 이중화된 의식작용이 빚어낸 결과이다. 비록 시가 귀의하는 공간은 이미 이 세계가 정의적으로 그렇게 되어 있는 자연의 구조화된 원리이기는 하지만, 홍해리의 시말들은 자연의 의식적 전유이다. 특히 시「봄, 벼락치다」에 형상화되어 있는 것처럼 “연분홍 파르티잔들”이 펼쳐내는 봄꽃들의 향연을 “불”과 “역병”으로 비유하면서 비의적 섭리의 세계로 빨려 들어가고 있다.

  날벼락치는 봄. 봄의 자의식적 읽기. 조응을 통한 봄의 의식적 전유. 홍해리의 시말들은 조응을 통한 경계 짓기와 그 경계의 소멸로 짜여져 있다. 봄을 “천길 낭떠러지”로 인식하다가 그 봄의 경계적 분할을 지워버리는 시인. 시인은 이중화된 의식의 지점을 경유하다가 왜“우주란 본시 한 채의 집”이라고 인식하는가. 더구나 그것도 수많은 살피(경계)로 짜여진 이 세계를 광대한 우주적 질서로 무화시키는가. 시 쓰기란 그 자체로 분절화 된 의식의 편린들을 시말로 치환시키는 형상화 작용이 아닌가. 그런데 홍해리의「봄, 벼락치다」는 벼락치는 봄꽃에 매달린 “마음의 삭도”를 따라가다가 땅과 땅의 경계, 계절과 계절의 경계를 가볍게 지워버린다. 다시 말해서 홍해리의 시말 속에 육화된 자연과의 조응은 모든 사태를 자연의 이법 속으로 수렴시켜가고 있다.

      - 김석준(평론가)



* 이 얼마나 화려한 언어의 향연인가. 마치 판소리처럼 절제와 풀어짐, 빠름과 느림을 조절해가며 전개해 나가는 리듬감하며, 봄 산에 꽃이 핀 모습을 ‘연분홍 파르티잔’이나 ‘나무들의 소신공양’으로 비유한 것하며, 선적인 할(喝)을 연상케 하는 끝 연의 절묘함까지……. 시인의 언어구사는 자유자재하여 막힘이 없는 것 같다. 사실 이 시의 주제는 ‘우주란 본시 한 채의 집’이어서 ‘살피가 없다’라는 진부한 것이지만 자연과의 합일을 이루지 못하는 시인의 갈등과 자연의 이치에 관한 ‘소소명명’한 깨달음을 활달한 언어와 봄의 이미지를 빌어 적절하게 구현하고 있는 것이다.

 연보를 보니 홍해리 시인은 시집 『투망도(投網圖)』로 1969년에 등단했으니 어언 시의 나이 40년이 되어간다. 이제는 거의 원로급이라고 할 시인의 자연에 대한 관조의 시선과 시에 대한 열정이 이 시집에 녹아 있다. 옛날 유마힐이 왕유의 그림을 보고 그림 속에 시가 있고 시 속에 그림이 있다고 하였는데, 과연 홍해리 시인의 시에는 자연 속에 시가 있고, 시 속에 자연이 있다.

나는 홍해리 시인의 작품이 이 문단에서 크게 주목받지 못하고 있는 사실이 못내 아쉽다.  그렇다고 문단 현실에 대해 비난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나는 언어란 살아 있는 것이라고 믿고 있다. 하물며 언어의 꽃인 시야 일러 무엇 하겠는가. 누가 말해 주지 않아도 좋은 시는, 의미 있는 시는 독자의 가슴에 살아남을 것이다.


   - 신현락(시인)


  * 위 시는 서울 북한산 기슭 우이동에 사는 홍해리 시인이 매일 세이천에서 귀를 씻으며 쓴「봄, 벼락치다」라는 제목의 시이다. 제목부터가 심상찮다. 봄에 누구나 느끼는 것은 약동하는 생명의 신비로움, 눈부시게 피어나는 꽃, 그리하여 가슴에 새로이 샘솟는 희망, 나른함, 따위의 것들인데, 벼락친다니! 얼마나 섬뜩한 제목인가. 
   이 시를 읽자마자 가슴에 와 닿는 것은, 선시인가? 하는 의구심이다. 왜냐하면 선종계의 소의경전인 〈금강경〉을 읽으면 느껴지는 선적 아우라가 있기 때문이다. 특히 “천길 낭떠러지다, 벼락치고 있다, 소소명명!”과 같은 언어는 선종에서 깨달음의 세계로 이끄는 이정표로 흔히 쓰고 있기에 더욱 그러하다. 
   또 그 선적 아우라는 봄을 형용하는 단어와 문장들이 봄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것처럼 활용된 데서도 알 수가 있다. 일명 ‘벼락경’이라고도 하는 〈금강경〉도 공(空)을 인식하기 위하여 수많은 실체를 제시하고 있지만 제시된 실체는 그 실체와는 전혀 상관없는 공을 드러내고 있다. 마치 화가가 화선지에 달을 그리기 위하여 달 이외의 공간에 먹물을 입히는 것과 같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는 몹시 답답했다. 이미 봄이 와 있음을, 온 산야에 꽃이 만발하여 붉게 물들었고, 겨우내 봄을 꿈꾸던 숲속은 아련한 아지랑이 피워 올리며 어여쁜 연초록 세상으로 생명의 춤사위를 펼치고, 온 천지는 봄, 너도 봄 나도 봄이라고, 수많은 사실과 진실을 중생들에게 말했다. 그렇지만, ‘봄에 가장 먼저 피는 꽃은 매화다, 아니 복수초다’, ‘철쭉이 진달래보다 예쁘다,’ ‘봄이 짧아져 금방 여름이 올 거다,’ 라는 둥 엉뚱한 알음알이를 내고 다투니 답답하기 짝이 없었다. 
   삶과 죽음, 이승과 저승의 경계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주인공인 내가 바람으로 걸림 없이 자유롭게 소요하듯이 북한산 자락에 한 성품이 있어 희노애락을 살활검으로 삼아 자유자재 넘나들며 앉아 있으니, 보이느냐? 천지는 여전히 고요했다. 이윽고 석가모니 부처님은 한 수단을 꺼내셨다. 보아라! 이 한 송이 꽃을!
   바야흐로 봄이다. 벼락을 맞고 이 낭떠러지에서 뛰어내려야 한다. 꽃몽우리와 잎눈이 터져야만 비로소 새로운 세계, 봄이 출현한다. 꽃몽우리가 터지듯 심안을 뜨지 못하면, 헛된 관념의 세계인 고해에 움츠리고 있으면, 찬란한 봄, 깨달음의 세계는 없다. 변화의 현상이 활발한 이 봄에 스스로의 관념에 벼락을 때려 이 낭떠러지에서 탈출해야 한다. 
   이 시는 석가모니 부처님이 보리수 아래서 만난 새벽별만이 벼락이 아니라, 육근에 작용하는 무수한 인연들이 다 명명백백한 벼락이라고 외치고 있다. 지금 오대산록은 나뭇가지끝 마디마디에 잎눈이 터지는 중이다. 아! 찬란한 봄이여, 소소명명昭昭明明! 
       - 최경애 (주간불교. 1025호, 2009. 4. 11.) 

 


  * 우리에게 사계절이 있다는 것은 축복이다. 계절마다 그 아름다움과 의미는 새삼 말 하지 않더라도 이미 많은 시인들이 노래했다. 그 중 봄은 어떻게 노래했을까?

  봄은 희망과 꿈, 그리고 시작을 알리는 출발로 노래하고, 만발한 꽃동산의 아름다움을 노래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눈부시게 찬란한 봄빛이 마음 한 구석 어디엔가 숨어있던 통증을 새싹 틔우 듯 비집고 나오게 하는 것은 나만의 경험일까?     

  시인은 봄을 낭떠러지라고 했다. 천길 낭떠러지, 내려다보면 발바닥이 간질간질해지는 낭떠러지 아득히 빨려 들어가 해어나지 못하는 깊은 계곡 같은 봄, 그러면서 산자락마다 진달래가 게릴라 같이 매복해 있다가 순식간에 마을을 전멸시키는 역병과 같이 세상을 온통 연분홍으로 전멸시키는 봄, 또한 가슴에 멍이 드는 화병이라고 하드니 급기야 벼락이라고 한다. 벼락은 응징이 아닌가 벼락은 아무나 맞는 것이 아니다. 벼락 맞는 것은 하늘의 응징을 받는 것이다. 봄이 벼락 치듯이 다가온다면 봄을 맞는 마음은 뭔지는 알 수 없지만 원죄와 같은 죄의식이 내재해 있다는 의미가 아닐까.

       - 남대희 (월간《우리詩》2019. 5월호,「봄, 그리고 오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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