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選集『洪海里는 어디 있는가』(2019)

洪 海 里 2019. 1. 3. 19:29



洪 海 里

 


밥은 금방 지어 윤기 잘잘 흐를 때
푹푹 떠서 후후 불며 먹어야
밥맛 입맛 제대로 나는 법이지
전기밥솥으로 손쉽게 지어
며칠을 두고 먹는 지겨운 밥
색깔까지 변하고 맛도 떨어진
그건 밥이 아니다 밥이 아니야
네 귀 달린 무쇠솥에 햅쌀 씻어 안치고
오긋한 아구리에 소댕을 덮어
아궁이에 불 지펴 나무 때어 짓는
아아, 어머니의 손맛이여,
손때 묻어 반질반질한 검은 솥뚜껑
불길 고르다 닳아빠진 부지깽이
후둑후둑 타는 청솔가리
설설 기는 볏짚이나 탁탁 튀는 보릿짚
참깻단, 콩깍지, 수숫대
풍구 바람으로 때던 왕겨 냄새 그리운 날
냉장고 뒤져 반찬 꺼내기도 귀찮아
밥 한 공기 달랑 퍼 놓고
김치로 때우는 점심 홀로 서글퍼
석달 열흘 가도 배고프지 않을
눈앞에 자르르 어른거리는 이밥 한 그릇
모락모락 오르는 저녁 짓는 연기처럼
아아, 그리운 어머니의 손맛!
그러나 세상은 그게 전부가 아닐세
시장이 반찬이라 하지 않던가
새들은 나무 열매 몇 알이면 그만이고
백수의 제왕도 배가 차면 욕심내지 않네
썩은 것도 가리지 않는 청소부
껄떡대는 하이에나도 당당하다
배고픈 자에겐 찬밥도 꿀맛이요
밥 한 술 김치 한 쪽이면 임금님 밥상
그러니 지상은 늘 우리의 만찬장이 아닌가.

- 시집『황금감옥』(2008, 우리글)



  * 필자를 가장 힘나게 했던 것은 '비타민'보다는 '밥'이었다. 그리고 어머니가 해주시던 기억 속의 '밥'에서 나아가 지상의 '밥' 한 그릇의 의미를 생각케 하는 다음과 같은 작품은 어쩌면 속깊이 숨겨진 홍해리 시인의 根氣의 모습이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하게 했다.

  이 작품의 전반부에서 시인은 "무쇠솥에 햅쌀 씻어 안치고" 청솔가리나 볏짚, 참깻단, 콩깍지 등으로 불 지펴 지어낸 "금방 지어 윤기 잘잘" 흐르는, 어머니가 지어주시던 '밥', "그리운 어머니의 손맛"을 그리워하고 있다. 하지만 "그러나" 이후의 시행은 이와 같은 유년의 몽상으로부터 돌연 현실 세상으로 (거의 폭력적으로) 전환하고 있다. 생각해 보면 시인의 말처럼 "배고픈 자에겐" "밥 한술 김치 한쪽이면 임금님 밥상" 부러울 것 없는 것이 세상일인 것이니, 그렇게 본다면 이 삭막한 세상이 바로 "시장이 반찬"이요 "우리의 만찬장"이 아니겠는가.

  그리하여 홍해리 시인에 의해 이 세상은 비타민 아닌 것이 없고, 시 아닌 것이 없는 것으로 보이기도 하는 것이다.

  어머니의 손맛, 그것이 이제는 찾기 힘든 과거의 일이 되어버린 지금, 시인은 이를 악물고 찬밥 한술에 김치 한 쪽을 얹어 입에 넣고 있다. 그게 "임금님 밥상"이고 "우리의 만찬장"이라고 말하는 시인의 어조에는 현실의 각박함이 투영되어 있다.

  정태적 자연의 풍경을 뒤흔드는 역동적 상상력, 회고적 그리움에 머물지 않고 지상으로 그 생명력을 끌고 들어오는 역전의 상상력, 그로 인해 비로소 시인뿐만 아니라 독자들에게는 고단한 지상의 삶을 좀 더 견뎌낼 수 있는 힘이 생겨나는 것이 아닐까? 죽음과 같은 절망 속에서 희망을 읽어내고, 삭막하게 사물화되어가는 현실의 저 밑바닥에서부터 배수진을 치고 뒤집어 올라오는 소박하지만 강한 힘, 그것이 홍해리 시인이 이번 선사한 가장 큰 영양분이었다.

  - 임수만(한국교원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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