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눈보라 친다
-치매행致梅行 ․ 46
이제는
다,
끊어 버리라고
쏟아 버리라고
털어 버리라고
씻어 버리라고
풀어 버리라고
벗어 버리라고
던져 버리라고
쓸어 버리라고
주어 버리라고
잊어 버리라고
울어 버리라고
웃어 버리라고
눈이 내린다
눈보라 친다.
♧ 침묵에 묻다
-치매행致梅行 ․ 47
일에 연애에 미치지도 못했습니다
시에 돈에게도 미치지 못했습니다
어영부영 한평생 보냈습니다
어름어름 한세상 살았습니다
미치지 못한 것이 많습니다
미칠 일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런데 아내는 어린아이가 되었습니다
물가 어린애 같아 늘 지켜봐야 합니다
어찌 해야 할지 침묵에 묻고
물음을 다시 침묵에 묻습니다.
♧ 지금 여기
-치매행致梅行 ․ 48
천년 전의 내가 천년 후의 나로
어린아이가 되어 돌아가는 자리,
한적한 불평과
후회와 무상과
절망과 풍류와
소멸과 유폐와
폐허와 비애와
모순과 일탈과
분노와 풍자와
이별과 욕망과
희망과 적빈과
죽음과 허탈과
고독과 풍요와
자유와 광기와
공포와 해학으로,
바람 불어오는 대로 천년이 가고
물결 흘러가는 대로 천년이 오는,
지금 여기!
♧ 아내의 말
-치매행致梅行 ․ 49
제 무게에 겨워
스스로 몸을 놓고
한없는 가벼움으로
세월을 날리며
돌아가고 있는
한 생生의 파편
적막 속으로 지고 있다고
가벼이,
다 버리고
다 비우고도
한평생이 얼마나 무거웠던가
이제 우주가 고요하다고
별들이 초롱초롱 내려다본다고
눈썹 위에 바람 잔다고
당신에게 소식 한 잎 띄웁니다.
♧ 입적立寂
-치매행致梅行 ․ 50
새벽마다
물가에서
목을 씻고
나뭇가지에 앉아
아침을 열어주던
새,
샘이 마르자
어디론가 날아가 버리고
노래마저 끊기니
새가 앉았던 가지부터
선 채로 입적한
나무,
새 소리가 그리운 나무
땅거미 내리는 저녁.
♧ 울다 웃다
-치매행致梅行 ․ 51
물 빠진 뻘
물고기 두 마리
주름을 죄며
팍팍한 세월
막막한 세상
물끄러미
우두커니
내다봅니다.
-올해 제가 사는 제주지역은
영하로 내려간 날이 한 번도 없는 이상난동異常暖冬입니다.
눈이라고 내린 날은 사흘밖에 없고요.
그래서 그런지 여기저기서 이른 매화가 피어납니다.
오늘은 여유롭게 집에 앉아 매화를 생각하다가
문득 홍해리 선생님의 시집『치매행致梅行』을 펼쳐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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