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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생채기로 뜨는 별 - 홍해리 시집『봄이 오면 눈은 녹는다』에 부쳐 / 손현숙

洪 海 里 2019. 2. 28. 15:38


, 생채기로 뜨는 별

- 홍해리 시집 『봄이 오면 눈은 녹는다』에 부쳐


  손 현 숙(시인, 문학박사)

  

  한겨울이 지나가고 문득 고개를 드니 양지쪽 명자나무에서는 파랗게 물이 오르고 있었습니다. 선생님, 그간은 또 어찌 지내셨는지요. 문안도 못 여쭙고 가을과 겨울이 공손한 바람처럼 지나가 버렸습니다. 선생님께서 겨울이 캄캄하다고 말씀하시던 때는 그 말씀이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지나쳤었지요. 그런데 막상 막막한 겨울을 지내고 보니 이제는 그 말씀의 진의가 가슴 안 하늘에 별처럼 박혀서 쓸쓸합니다. 밤하늘의 무수한 저 별들이 어쩌면 하늘의 생채기이거나 마음의 딱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쓰나미로 밀물집니다. 그렇게 시란, 어쩌면 삶의 무늬를 종이에 받아 적는 일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입니다. 그리고 그 무늬는 밤하늘의 별일지도 모르겠다는 짐작이 선생님의 이번 시집 『봄이 오면 눈은 녹는다』를 읽으면서 확신이 들기도 했습니다. 상처 아닌 영혼이 어디 있으랴 싶지만 저 각각 빛나는 선생님의 별들은 아름답지만, 각진 눈물의 결정체처럼 슬프고 깊고 높고 처절해서 감히 글로는 표현이 어려웠다는 것을 먼저 고백합니다. 선생님께서 표기해 두신 마지막 장의 간병일지는 담담하면서도 치밀한 관찰이어서 못난 저는 그것을 시로 읽어버리는 오류도 범하였습니다. 그만큼 선생님의 시와 삶은 밀접해서 신체가 경험하는 모든 것들은 저절로 언어로 환원이 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선생님, 오늘도 새벽 별을 바라보면서 일찍 기침하셨는지요. 그렇게 아주 오래 전 새벽의 광기에 미혹이 되어서 오늘까지 그 기운을 좇아 새벽을 맞이하시는 선생님도 분명 평범의 범주에서는 벗어나도 한참을 벗어난 분이심에 틀림이 없습니다. 시편 곳곳에 등장하는 죄의식의 화자가 하는 독백의 말들도 모두 시간을 엇갈려 써버렸던 것에 대한 회한이고 미안함이었다는 것을 저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 보면 마지막 순간까지 선생님을 의지하고 계시는 사모님은 그런 선생님을 또 깊이 사모했던 것은 아닐까 싶습니다. 각자의 푯대를 향해 열심히 걸어가는 모든 인생들처럼 선생님은 시를 향해, 그리고 사모님은 선생님을 향해 걷고 또 걸었던 것은 아닐까요. 가끔 제가 묻고 선생님께서 답을 주시곤 했습니다. 사모님을 곁에서 못 보내시는 이유 말입니다. 별다른 이유야 뭐 있겠냐고, 그저 가끔씩 나를 알아본다는, 묵언처럼 짧은 대답은 각이 예민한 별의 결정체처럼 제 가슴에 오랜 통증으로 남아 있습니다. 저는 이번 시편들을 읽으면서 참으로 많은 오독을 했습니다. 예를 들면 비 오는 날 자장면처럼 웃고 싶다 하시는 선생님의 속마음을 저는 또 혼자 울고 싶다, 로 고쳐 읽고는 그곳에 주저앉아서 오감을 깨우기도 했었답니다. 또한 아내의 나라를 아내의 나락으로 읽기도 했었고요.

  이건 아주 다른 이야기이긴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왜 노벨상이 나오지 않는 걸까 생각해 본 적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나름의 결론은 끝까지 가지 못해서 그럴 것이다라는 것이 저의 잠정적인 결론입니다. 열정의 끝까지. 희망의 끝까지. 절망의 끝까지. 행동의 끝까지. 그렇게 시인이라면 마음의 끝까지 가서 그쯤에서 자신을 들여다보는 용기. 그것을 지금 선생님은 오롯이 홀로 수행하고 계신다는 생각입니다. 그런 생각들을 두서없이 하면서 선생님의 시편들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럼 몇 편의 시를 들여다보면서 ‘응’, 과 ‘아니’, 혹은 ‘싫어’와 ‘왜 그래’의 행간을 짐작해 볼까 합니다.

 

 

나이 든 사내

혼자 먹는 밥.

 

집 나간 입맛 따라

밥맛 달아나고,

 

술맛이 떨어지니

살맛도 없어,

 

쓰디쓴 저녁답

오늘은 눈썹도 천근이다.

 

-오늘은 눈썹도 천근이다- 치매행致梅行 · 231, 전문

 

 

  위의 시에서 화자는 나이 든 사내입니다. 물론 시인, 선생님이시겠지요. 치매행의 모든 화자는 선생님이시기에, 화자를 굳이 동원하지 않아도 좋을 듯싶습니다. 그러나 해설의 형식상 가끔씩 화자를 불러오기도 하면서, 그러나 화자와 시인, 선생님을 겹쳐서 읽기도 하면서 행간을 채워보려 합니다. 나이 든 사내는 이제 혼자 밥을 먹습니다. 누구도 곁에 있지 않은 시간이 돌아온 것이겠지요. 아니, 곁에 누가 있어도 없는 듯이 살고 있다면 그것은 인간에게 더 지독한 고독을 맛보게 하는 일상일 겁니다. 그렇게 화자는 지금 혼자 먹는 밥에 대하여 홀로 상념에 잠깁니다. 혼자 먹는 밥이란, “술맛도 떨어지”는 일이고. 또한 “살맛도 떨어지”는 일이라고 화자는 일갈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혼자 먹는 밥은 ”눈썹도 천근“으로 내려앉는 무겁고 또 지난한 일이라는 것을 시인은 ‘치매행 231편’에서 언표합니다. 그러고 보니 선생님은 치매행의 시편들을 아내가 병석에 눕고서부터 지속적으로 적어나가셨던 겁니다. 어쨌거나 나이든 사내가 치매에 든 아내를 곁에 눕혀 놓고 혼자 먹는 밥, 그것은 도대체 어떤 지옥을 헤매는 일일까요.

 

 

 

 

사랑은 눈사람

겨울 가고 봄이 오면,

 

슬그머니

목련 가지 끝에 앉아 있다.

 

연인들은

목이 말라 사막을 헤매지만,

 

겨울이 가고 나면

나뭇가지마다 꽃을 다는데,

 

아내의 나라에는 봄이 와도

내리 눈만 내려 쌓이고 있다.

 

-눈사람- 치매행致梅行 · 234, 전문

 

 

  겨울 왕국에서는 꽃이 피지 않습니다. 겨울 왕국 그곳은 세상천지가 눈에 덮이고, 사람들은 모두 눈사람으로 살아서, 꽁꽁 얼어붙어서 눈꽃만이 만발하는 세상입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색깔도 단순해져서 흰빛이 찬란하게 빛을 발하는 아주 단순한 세상입니다. 그러나 그곳을 제외한 다른 모든 세상은 겨울이 가면 봄이 오고 꽃이 피고 또 잎이 지는, 이상하지만 매우 아름다운 장소입니다. 그 행간에서 사람들은 새끼를 낳고 울고 웃고 밥을 벌고 사랑을 하면서 시간을 향유합니다. 그러나 겨울 왕국의 시간은 거기 그 지점부터 꽁꽁 얼어서 지나가지도 사라지지도 않는 무뚝뚝한 나라의 풍경이 펼쳐집니다. 아마도 여기가 그곳인가 봅니다. 계절은 봄이 찾아온 것 같지만, 그러나 아내의 나라, 그 땅에서는 아직도 겨울 왕국 모든 사람들이 눈사람으로 살아서 변하는 것도 살아 움직이는 것도 없습니다. 다만 “아내의 나라에는 봄이 와도/ 내리 눈만 내려 쌓이고 있다.”는 슬픈 전갈만이 한 언어로 오시겠다는 것인가 봅니다.    

 

 

 

밥을 떠넣어 줘도 “싫어, 싫어!” 하는

아내는 사람인가 아닌가?

 

-밥과 입 - 치매행致梅行 · 235 , 부분

 

울지 말자, 울지 말자!하면서도

말없이 누워 있는 사람 보며 또 우네!

 

-「눈물 부자- 치매행致梅行 · 239, 부분

 

 

  지금 화자의 아내가 사는 나라에는 명사가 사라졌습니다. 그 나라에는 다만 몇 가지의 서술어만 남아서 하루치의 연명만이 최고의 목표인 듯 서성입니다. 그중에서도 화자의 아내는 “싫어”라는 말을 가장 많이 합니다. 아내는 “싫어”와 “응”과 “왜 그래”라는 말 외에는 모든 언어를 잃어버린 듯합니다. 어쩌면 먹는 것도 씹는 것도 사는 것도 잊어버린 듯 “밥을 떠넣어 줘도” 싫다는 의사만을 분명하게 반복합니다. 그러니까 아내가 구술하는 “싫어” 속에는 어쩌면 삶을 완전히 포기한 자만이 누리는 당당함도 포함되어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싫어, 평생토록 거절을 모르던 화자의 아내는 매화의 길로 접어들면서 싫어와 함께 욕도 서슴지 않게 되었습니다.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자유인의 위치에서 아내는 세상의 무엇도 두렵지 않게 된 모양입니다. 밥을 먹어야 다음을 기약 할 수 있는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에서 완전히 벗어난 화자의 아내는 정말 이제는 사람이기조차 포기한 듯싶습니다. 밥을 떠넣어 줘도 “싫어, 싫어!” 하는/ 아내는 사람인가 아닌가?”라고 질문하는 화자는 자괴감에 자꾸만 밥을 떠먹여 봅니다. 그렇게 아내에게 당신은 누구인가를 묻고 또 묻지만 밥과 입의 관계를 너무나 잘 알고 있는 화자의 입장에서는 어쩌면 아내의 음성을 다시 듣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요. 그것이 “싫어”든 “응”이든 “왜 그래”이든 아내와 남편이 서로 주고받는 말, 언어로 소통하고 싶은 간전함이 아니었을까요. 먹고 자고 또 먹고 자는 아내의 곁에 누워 화자는 “울지 말자, 울지 말자!” 합니다. 그러나 어디 울음이 마음처럼 조절이 가능한 것인가요. 먹는 것조차 잊어버린 도화지처럼 묵묵한 아내의 곁에서 화자는 오늘도 “말없이 누워 있는 사람 보며 또 우네!”를 반복하는 수밖에 도리가 없습니다.

 

 

삶은 감자 한 알

달걀 한 개

애호박고추전 한 장

막걸리 한 병.

 

윤오월 초이레

우이동 골짜기

가물다 비 듣는 저녁답

홀로 채우는 잔.

 

-「만찬- 치매행致梅行 · 237

 

 

  주어를 모두 생략해버린 위의 시는 그래서 그런지 시의 여백이 더 확장되어 보입니다. 아마도 화자, 즉 시인은 저녁 상 앞에 앉아서 상념에 잠긴 듯합니다. 평생 절제로 생을 경작해 오신 시인은 먹는 것 앞에서도 넘치는 법이 없습니다. 한 끼 양 만큼이 다 찼다 싶으면 수저를 가차 없이 놓아버리는 시인이지만, 그러나 곡주 앞에서는 하염없음을 경험하기도 합니다. 오늘도 시인의 정갈한 밥상이 우리들 앞에 차려졌습니다. 그것은 “삶은 감자 한 알/ 달걀 한 개/ 애호박고추전 한 장/ 막걸리 한 병.”으로 소박한 밥상입니다. 이것이면 무엇 하나 부족할 것이 없는 시인은 오늘의 만찬 앞에서도 웬일인지 하염없습니다. 시의 장소는 “우이동 골짜기”로 평생 시인의 거처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때는 “윤오월 초이레” 시인은 일 년 중에 가장 아름다운 시간을 통과하는 중입니다. 그런데 그날은 그동안 줄곧 가물어서 “가물다 비 듣는 저녁답”으로 내심 안심이 되기도 하는 평화의 시간임을 시사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인의 저녁 만찬에는 사람이 등장하지 않습니다. 오직 홀로 밥상과 마주 앉아서 “홀로 채우는 잔.”으로 윤오월 빗소리를 듣는 사내의 쓸쓸한 저녁답입니다.

 

 

 

아내가 알약을 삼키지 못해

막자와 유발乳鉢을 사왔는데

 

약알을 넣고 몇 번 찧고 빻다 보니

밑이 빠져 버렸다

 

쓴 약을 쓴 줄도 모르고 받아먹는 아내

쓰지?해도 그냥 웃고 마는 아내

 

약이 쓴지 단지 아는지 모르는지

미주알고주알 밑두리콧두리 캘 것 없지만

 

바람 부는 날 밑싣개 타고 흔들리다 보니

어느덧 나도 밑 빠진 막자사발이 되었다.

 

-「밑이 빠지다 - 치매행致梅行 · 265, 전문

 

 

  위의 시에서는 아내와 화자가 대화를 나눕니다. 화자는 아내의 대답이 그리 탐탁지는 않지만, 그래도 묻고 또 물어가면서 약을 먹일 준비를 합니다. “아내가 알약을 삼키지 못해”서 궁여지책으로 “막자와 유발乳鉢을 사왔는데”로 화자는 약알을 찧고 빻아서 아내가 약을 삼키기에 편안하게 노력을 기울입니다. 화자는 아내에게 질문을 합니다. 돌아오지 않을 메아리인 줄 잘 알면서도 또 묻고 묻습니다. “쓰지?” ,그 말 속에는 인생도 쓴 것인가라는 자괴감도 섞여 있는 듯합니다. 그러나 아내는 이제 약이 쓴지 단지도 모릅니다. 그냥 지금은 씹는 것도 삼키는 것도 잊어버려서 유동식으로 흘려보낼 뿐입니다. 마치 강이 흘러 목적지를 모르는 어디론가 가버리는 듯 말입니다. 그렇게 한참을 서성이던 화자는 이제야 자신의 위치를 깨닫고는 혼자 놀라기도 하면서 흔들리기도 합니다. “어느덧 나도 밑 빠진 막자사발이 되었다.”로 치매 아내를 돌보는 일이란, 밑이 빠지게 고단한 일이라는 것을 한 장면으로 묘파합니다.

 

 

평생 누굴 한번 씹어 본 적 없는데

아내는 음식물 씹는 걸 잊었습니다

 

남의 물건 꿀꺽해 본 일 없는데도

물 삼키는 것도 잊어 버렸습니다

 

내 마음이 내 마음이 아니라서

마음이 이내 무너지고 맙니다

 

눈시울이 뜨거워

소리없이 흐느끼다 눈물을 삼킵니다

 

마지막이라는 말

끝까지 간다는 것 …….

 

-「씹어 삼키다- 치매행致梅行 · 266, 전문

 

 

  시인의 시를 읽으면서 저는 알았습니다. 치매의 마지막 단계는 본능도 잊어버린다는 것을요. 인간에게 본능은 끝까지 살아 있는 감각이라고 생각했던 나의 믿음이 한 순간에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화자의 아내는 이제 씹는 것도 삼키는 것도 잊은 모양입니다. 그런 요즘의 현상을 화자는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화자의 아내는 “평생 누굴 한 번 씹어 본 적 없는”사람이고 또 “남의 물건 꿀꺽해 본 일 없는” 정직한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잊음을 습관처럼 영위했던 사람인 양 모든 것을 잊었습니다. 먹고 삼키는 본능조차도 잊어버린 아내 앞에서 화자는 그저 망연합니다. 누구 앞에게도 절대로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아내와의 이별이 이제 코앞으로 다가온 듯합니다. 그것은 “마지막이라는 말/ 끝까지 간다는 것 …….” 이 모든 말들을 씹어 삼키면서 화자는 아내 곁을 조용히 지키는 사내입니다.    

 

 

주변에서, 이제 그만,

아내를 요양시설에 보내라고 합니다

 

그러나 내가 나를 용서할 수 없어

그 말을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살아 있는 것만도 고마운 일

곁에 있어 주는 것도 감사한 일

 

이제껏 해 준 게 아무것도 없는데

빈손으로 떠나보낼 수는 없습니다

 

참을 수 있을 때까지 견뎌내고

가는 데까지 함께 가겠습니다

 

“미안합니다!

 

-「이제 그만- 치매행致梅行 · 267, 전문

 

 

  사람들은 이제 그만 아내를 요양시설에 보내라고 말을 합니다. 그러나 화자는 그럴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제껏 해 준 게 아무것도 없는데/ 빈손으로 떠나보낼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주위에서는 할 만큼 했으니 이제 그만 손을 놓으라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자는 견디고, 참고, 버티겠다는 선언적 발언을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연, 한 행의 문장은 누가 누구에게 들으라고, 혹은 들려 주려고 하는 말이 아닙니다. 오롯이 한 시인의 가슴에 주홍글씨처럼 달고 사는 “미안합니다!”. 그 상흔은 세월이 흘러서도 도무지 지워지지 않을 것처럼 시인의 가슴에 선명하게 남아 있을 상처입니다. 그렇게 시인은 아픈 아내를 말없이 쓰다듬고 바라봅니다. 그렇게 끝까지 가보겠노라고. 속죄양의 화자는 눈물젖은 불꽃으로 다짐을 합니다.

 

 이상으로 홍해리 선생님의 '치매행致梅行'을 읽었습니다. 그것은 울음, 모든 시편들이 모두 진실이어서 무엇을 적어도 모두가 눈물입니다. 그리고 이 많은 시편들은 세상의 모든 치매 간병인들에게 바치는 헌시라는 것도 잘 알겠습니다. 막막하다는 말도, 슬픔이라는 말도, 보고 싶다는 말도, 듣고 싶다는 말도 모두가 차단된 상태에서 그저 눈으로 바라만 보고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저처럼 소인배들은 짐작조차도 할 수 없겠지만, 그래도 살아 있어서 감사하다는 말만큼은 무슨 말씀인지 알 것도 같았습니다. 여기 지금, 이 순간은 살아 있는 사람들의 향연이므로 살아 있는 그것으로 영광이라는 것을요. 지금 선생님의 소원은 무엇일까요. 그런 생각들을 하면서 선생님의 시를 읽다가 다음의 붉은 시편을 발견했습니다. 얼마나 간절했으면 꿈속에서 저렇게 생생하게 재연이 되었을까요. 아니, 아마도 선생님의 아내는 꿈속으로 선생님을 간절하게 찾아 나섰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저 한 말씀 환하게 들려드리고 싶었을 겁니다. “괜찮아”, 그렇게 괜찮다는 말을 선생님께 진심을 들려드리고 싶었겠지요. 그러니 선생님, 봄에는 꽃과 가을에는 단풍으로 선생님이 선생님을 위로해 주시길요, 그렇게 다음의 아름다운 시편을 읽으면서 저는 이만 펜을 놓을까 합니다. 선생님의 건강과 건필을 기원하면서, 국립4·19민주묘지에 청악매가 다시 돌아오면 우이동으로 환하게 찾아뵙겠습니다.  

 

 

 

아내가 말을 했다

 

이불을 덮어 주려고 하는데

아내가 말을 했다

손발 하나 까딱하지 못하는 사람

입도 벌리지 않는 아내

참으로 놀랄 일이다

이불자락을 올려 주려고 하는데

“괜찮아, 괜찮아!

아내가 말을 했다

입을 다물어 버린 지 한 해,

한 해가 한해寒害/旱害처럼 지겨웠는데

답답하기 그지없었는데

이게 뭔 일인가

 

새벽 세 시, 꿈이었다

정신 번쩍 들어 벌떡 일어났다

창문이 희붐하니 밝고 있었다.

 

-「아내가 말을 했다- 치매행致梅行 · 324, 전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