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공 만선虛空滿船의 시학
- 洪海里 시집 『정곡론正鵠論』
윤정구(시인)
노을빛 곱게 비낀 저녁 주막집
무너진 담장 아래 타는 샐비아
한잔 술 앞에 하고 시름하노니
그대여 귀밑머리 이슬이 차네.
- 「한로寒露」 전문.
홍해리 시인이 스물두 번째 신작시집 『정곡론』을 보내오셨다.
정곡正鵠이란 말 그대로 과녁의 한가운데를 일컽는 말로 사물의 가장
중요한 핵심을 가리킨다. 시집 제목 자체가 거두절미하고 나를 긴장
시켰다. 내가 한 번이라도 시의 심장을 찌른 적이 있었던가? 독자의 가
슴에 가 닿기라도 한 나의 시가 있었던가? 터럭 끝이라도 건드릴 것을 염
두에 두고 화살을 당기기는 하는 것일까?
시집을 열자 처음 만난 시는 「시작 연습詩作鍊習」이다. 연습도 밧줄을
연상케 하는 練자 대신 불에 달군 쇠사슬을 떠오르게 하는 鍊자를 썼다.
“… 무작정 출항한/ 나의 백지선白紙船 해리호海里號// … 꼭두새벽/
빈배로 귀항했다// …나의 배는 허공 만선이었다.” ‘허공 만선’은 이 시
집을 통하여 시인이 던지는 화두話頭였던 것이다.
“일보 일배/ 한평생/ 부처는 없고/ 연꽃 속/ 그림자 어린거릴 뿐// 풍
경소리/ 천릿길/ 오르고 올라/ 절 마당 닿았는가/ 보이지 않네.”(「시詩를
찾아서」)는 성지순례처럼 시의 길에 오르는 시인의 구도자적 자세와 함
께 도에 이르기가 얼마나 지난至難한 길인지를 동시에 보여준다. 심지어
는 “살기 위하여/ 잘 살기 위하여 쓰지 말고,// 죽기 위해/ 잘 죽기 위
해,// 쓰고 또 써라.”(「명창정궤明窓淨几」)라고 밝은 창가 작은 책상에서
보이지 않는 채찍으로 이른다.
아무도 듣지 못하는 물과 꾀꼬리의 노래와 동백꽃 색깔을 허물어 쌓아
제 몸의 탑을 짓는다는 「죽순시학竹筍詩學」이나, “풀밭에 나가 딱따깨비
메뚜기 방아깨비 베짱이/ 철써기 풀무치 여치 귀뚜라미와 친구”하
며, “그 애들이 불러 주는 노래나 필사하”겠다는 「시인의 편지」는 이미
물아일체物我一體를 실현한 시인의 경지를 엿보게 한다.
“詩가 맛이 다 같다고/ 시가 맛이 다 갔다고/ …// 방가지방가지 피고
지는/ 방가지똥”(「방가지똥」)의 조용한 소리를 듣기도 하며,
“이슥한 밤/ 정성스레 연필을 깎을 때/ 창 밖에 눈 내리는 소리/ 연필을 꾹꾹
눌러 시를 쓰면/ 눈길을 밟고 다가오는/ 정갈한 영혼 하나/ …/ 사각
사각 사각사각/ 걸어오는 발자국 소리/ … 새벽녘/ 드디어,/ 하얀 종이
위에 현신하는/ 눈매 서늘한 한 편의 시”(「연필로 쓰는 詩」)와 만나기도
하며, 마침내 ‘잘 벼려진 칼날’인 「정곡론正鵠論」에 이른다. “눈 감고
있어도 귀로 보고/ 귀 막고 있어도 손이 보는” ‘카게뮤샤[影武士]’의
지경에 이른 것이다.
결국 일보일배一步一拜는 통상적인 순례길의 삼보일배三步一拜보다
힘든 시인의 길을 의미한다. 매 편마다 길이 없어지고, 새로운 길을
내어야 하는 시의 길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결국 “허공 만선 虛空滿
船”도 일 그램도 증가시키지 않는 빈배의 쓸쓸한 귀항, 일만 원의 시집
에 가득 실은 허공의 노을 같은 기쁨이 아닐까?
스물여섯 채의 성채를 지은 시인은 얼마나 행복할까? “나이 들면/
그리움도 사라지는 줄 알았습니다// 나이 들면/ 무서운 것이 없을 줄
았았습니다// 막상 나이 들고 보니/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텅 빈 들녘에 홀로 서서”(「허수아비」)와
“사내도 때로는 나락에 떨어져/ 시커멓게 울고 싶은 때가 있다/
…/ 저 들녘의 저녁녘/ …/ 텅 빈 논배미 한가운데”(「해질녘 허수아비」)로
그려지는 시인의 모습은 고스란히 쓸쓸하다.
결국 시인에게 위안이 되는 것은 정갈한 시 한 편이다. 「한로寒露」는
슬프지만, 아름답기 짝이 없다. 우리 모두가 좋아하는 노을, 저녁, 담장,
샐비어, 이슬, 귀밑머리가 한잔 술 앞에 그림처럼 놓여 있다. 이무원 형
이 좋아할 것 같은 맑은 눈물의 한로寒露이다.
- 계간《문학과 창작》 2020. 여름호.(제16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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