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평론·시감상

洪海里 시선집『마음이 지워지다』/ 정일남(시인)

洪 海 里 2021. 7. 20. 08:55

홍해리 시선집 

『마음이 지워지다』를 읽고

 

정일남(시인)

 

 

치매를 앓은 마거릿 대처 전 영국수상은 치매에 걸린 사실을 공개하지 않았다. 자존심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으리라. 딸 캐럴이 어머니 투병기를 신문에 연재하면서 밝혀졌다. 8년 동안 치매를 앓은 대쳐는 5년 후 87 세로 타계했다. 어느 시인은 치매를 “영혼의 정전”이라 했고 홍해리 시인은 “치매癡呆는 치매致梅에 이르는 길”이라 했다.

 

레이건 미국 대통령은 대처와 달리 담화문을 통해 발병 사실을 알렸다“나는 인생의 황혼을 위한 여행을 시작하지만 미국의 미래는 언제나 찬란할 것”이라고 축복을 곁들였다.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면서 죽음을 맞기 위해서도 치료약은 개발돼야 한다.

 

홍해리 시인이 그동안 발행한 치매시집에서 작품을 선별해 『마음이 지워지다』란 시선집을 냈다. 시집이란 가문을 빛내는 일이며 먼 후손에게 자부심을 안겨주는 일이라고 나는 수시로 말해 왔다. 하나의 주제로 이렇게 방대한 연작시를 쓴 예는 따로 없을 것이다.

 

 

언제 여행 한번 가자

해 놓고

 

멋진 곳에 가 식사 한번 하자

해 놓고

 

봄이 오면 꽃구경 한번 가자

해 놓고

 

지금은

북풍한설

섣달그믐 한밤입니다

 

      -약속」 전문.

 

 

위의 약속은 치매가 오기 전에 한 것으로 보인다. 아내가 퇴임하면 시간의 여유가 생긴다. 노후에 둘만의 시간이 생긴다. 자식들은 짝을 지워 날개 달아 날려 보내고 부모의 임무는 끝났다. 무엇이든 마음먹은 대로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 약속이 불가능하게 된 것이다. 인간의 삶은 어쩌면 여유가 생겨 살 만하면 악재가 돌아온다. ‘언제 여행 한번 가자. 멋진 곳에 가 식시 한번 하자. 봄이 오면 꽃구경 한번 가자.’ 구체적인 이런 약속은 실제로 가능한 것들이다. 그런데 불가능하게 됨으로써 물거품이 된 것이다.

 

 

아기가 엄마 품에 파고들 듯이

아내가 옆으로 들어와 팔베개를 합니다

그냥 가만히 안고 있으면

따뜻한 슬픔의 어깨가 들썩이다 고요해집니다

깊은 한숨소리 길게 뱉어내고

아내는 금방 곯아떨어지고 맙니다

마른 빨래처럼 구겨진 채 잠이 듭니다

꽃구름 곱게 피어날 일도 없고

무지개 뜰 일도 없습니다

나도 금세 잠속으로 잠수하고 맙니다

생의 무게가 얼마나 되는지 헤아려 보다

가벼워도 무거운 아내의 무게에

슬그머니 저린 팔을 빼내 베개를 고쳐 벱니다

 

     팔베개」 전문.

 

 

‘팔베개’에 대한 시는 김소월도 있다. “한평생 고락을다짐튼 팔베개/ 내 품에 안긴 님단꿈이 깰리라” 하지만 소월의 이 님은 곁에 있는 님이 아니라 다른 곳으로 가버리고 없는 님이다. 나도 여자와 평생을 살았지만 팔베개 한번 하지 못하고 보냈다. 홍해리 시인의 팔베개는 따뜻한 슬픔의 어깨고 꽃구름 필 일도 무지개 필 일도 없지만 이 팔베개를 고쳐 베는 일이야 말로 사랑의 진정성을 알 수 있게 해준다. 여기엔 실로 나마저 허물어지면 끝이라는 뜻이 숨어 있다.

 

나는 어디 있는가.

 

풀벌레 잣은 실로 지은 비단옷 입고

수평선 타고 가는

금빛 물고기와 노는

잠 못 드는 초록빛 영혼으로

비 갠 다음 무지개 빛깔로

길가 풀꽃 한 송이의 넓이를 차지한

하늘만 보이는 감옥

천야만야 수직 절벽의 해동청

떠 있는 자리,

 

그곳에 나 있다.

 

      자리」 전문.

 

모두 좋은 자리를 차지한 지상엔 내가 머물 자리란 없다. 힘 있는 자들이 다 차지하고 만 것이다, 풀벌레 비단옷 입고 금빛 물고기와 노는 영혼의 세상. 풀꽃 한 송이의 넓이를 소유한 하늘의 감옥인가. 아스라한 절벽 송골매 높이 떠있는 자리. 거기에 있는 것이다. 어느 누구는 지하 천 척 갱 속에 있기도 한다. 이 불안한 자리에 있다는 것은 마음의 안정을 이루지 못하고 산다는 뜻일 것이다. 이 불안정은 겪어본 자만이 알 것이다.

 

철석같은 약속도

세월이 가면 바래지고 만다

 

네가 아니면 못 산다 해놓고

너 없어도 잘만 살고 있느니

 

세월 앞에 장사 없다지만

세월이 좀먹고 세월없을 때도

되는 일은 되는 세상

 

세월을 만나야 독이 약이 될까

색이 바래듯 물이 바래듯

세월이 약이 될까, 몰라

 

 「세월이 약이니까」 전문.

 

 

이 순애의 지순한 사랑에 이르고 보면 달리 할 말을 잊게 된다. 그대가 없어도 나는 살아가지만 내게 온갖 고통과 괴로움을 주더라도 그대가 있을 때가 좋았던 것이다. 그대를 간병하는 일이 힘들었지만 그래도 그때의 세월이 좋았다고 한다면 역설이 되겠지만 인간의 피붙이란 속일 수 없는 것이다. 세월이 약이라고 하지만 과거가 되어버린 일들은 쉽게 잊어버릴 수 없는 것이다.

 

 

아픈 아내 두고 먼저 거겠다는 말

앓는 아내를 두고 죽고 싶다는 말

 

하지 말아야 하는데

해서는 안 되는데

 

내가 왜 자꾸 이러는지  

어쩌자고 자꾸 약해지는지

 

삶의 안돌이 지돌이를 지나면서

다물다물 쌓이는 가슴속 시름들

 

뉘게 안다미씌워서야 쓰겠는가

내가 지고 갈, 내 안고 갈 사람

 

  죄받을 말」 전문.

 

 

치매 환자를 돌보는 간병인은 환자의 입장에서 돌보아야지 간병인의 입장에서 돌볼 수는 없는 것이다. 그냥 빈말로 해보는 것도 있을 수 있지만 그 심정은 누구도 알 수 없다. 어떤 지신이 생기는 희망을 주는 제약회사는 아직 없다. 마음이 자꾸 약해지는 나날을 보내면서 병의 회복은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이다. 여기 환자는 간병인의 밧줄 하나와 연결되어 있다. 이 밧줄이 끊어지면 서로 헤어지게 되고 마는 것이다.

 

 

가고 나면

모든 게 다 잘못한 일뿐

 

해 준 게 아무것도 없어

미안할 뿐

 

해 줄 것도 하나 없어

한심할 뿐

 

행복하면 그냥 웃지만

웃을 일 없으니 웃어야 하는

 

검은 머리 파뿌리

가로지나 세로지나!

 

「후회하면 뭣 하나」 전문.

 

 

잘못을 뉘우치는 일은 살아온 과거에 대한 반성이기도 하지만 함께 살아오면서 해주지 못한 선물에 대한 아쉬움도 떠오를 것이다. 가난한 시인이 다른 사람들처럼 다이야 목걸이나 금반지 같은 것을 엄두도 내지 못했을 것이다. 빈처란 이름을 다독이며 없는 듯이 살아온 것이고 명예와 재물에 욕심 없이 시의 영혼에 의지해 살아온 결과가 여기에 이른 것을 후회해도 소용없는 것을 깨닫는다.

 

홍해리 시인은 “치매癡呆는 치매致梅라 함이 옳다. 매화에 이르는 길이다. 천진난만한 매화꽃이 되는 것”이라고 규정함으로써 치매환자를 간병하는 이들에게 용기와 위로를 주었던 것이다. 이 시선집의 몇 편을 읽고 감상하면서 육체엔 이상이 없고 정신적인 세포 분열로 고통 받는 환자가 더욱 늘어난다는 사실에 이것이 남의 일이 아니고 내 자신의 일임을 자각하고 이 시집을 탐독하는 게 좋겠다. 이 시집에 영광과 축복과 행운이 함께 하기를 기원하면서 홍해리 시인의 건안과 건필을 바란다.

                                                                    - 정일남(시인)  

 

- 월간 《우리詩》 2021. 11월호.(제401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