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집『마음이 지워지다』(2021)

다저녁때

洪 海 里 2022. 4. 14. 07:47

다저녁때

- 치매행致梅行 · 1

 

 

洪 海 里

 

 

 

 

아내가 문을 나섭니다

어디로 가는지도

왜 가는지도 모른 채

그냥 집을 나섭니다

눈은 내리는데

하얗게 내려 길을 지우는데

지팡이도 없이 밖으로 나갑니다

닫고 걸어 잠그던 문 다 열어 놓고

매듭과 고삐도 다 풀어버리고

바람처럼 강물처럼 구름처럼

텅 빈 들판처럼 혈혈孑孑히……,

굽이굽이 한평생

얼마나 거친 길이었던가

눈멀어 살아온 세상

얼마나 곱고 즐거웠던지

귀먹었던 것들 다 들어도

얼마나 황홀하고 아련했던지,

빛나던 기억 한꺼번에 내려놓고

아무렇지도 않게 웃으며 사는

슬픈 꿈이 아름답고

아름다운 삶이 아득한,

아침에 내린 눈 녹지도 않은

다저녁때

아내가 또 길을 나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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