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평론·시감상

'독작하는 봄' 외 / 홍해리 : 이동훈(시인)

洪 海 里 2022. 4. 25. 16:28

「독작하는 봄」 외 / 홍해리

2010. 9. 13.

홍해리 신작소시집  「독작하는 봄」 외 5편 

 

독작하는 봄

 

앵앵대는 벚나무 꽃그늘 아래

홀로 앉아 술잔을 채우다 보니

무심한 바람결에 꽃잎 절로 날리고

마음은 자글자글 끓어 쌓는데

가슴속 눌어붙은 천년 그리움

절벽을 뛰어내리기 몇 차례였나

눈먼 그물을 마구 던져대는 봄바람

사랑이 무어라고 바르르 떨까

누가 화궁花宮으로 초대라도 했는가

시린 허공 눈썹길에 발길 멈추면

사는 일 벅차다고 자지러드는 날

햇빛은 초례청의 신부만 같아

얼굴 붉히고 눈길 살풋 던지는데

적멸보궁 어디냐고 묻지 말아라

네 앞에 피어나는 화엄花嚴을 보라

마저 피지 못한 꽃도 한세상이라고

꽃은 절정에서 스스로 몸을 벗는다

왜 이리 세상이 사약처럼 캄캄해지나

무심한 바람결에 꽃잎만 절로 날리니

달뜨는 마음 하나 마음대로 잡지 못하네.

 

 

한 끼 식사

 

겨우내 이 나무 저 나무로

동가식서가숙하던

직박구리 한 쌍

매화꽃 피었다고 냉큼 찾아왔다

 

여름도 한겨울이던 50년대

물로 배를 채우던 시절

꿀꿀이죽은 꿀꿀대는 소리가 나긴 했지만

맛이야 꿀맛이 아니었던가

 

가지마다 사푼사푼 옮겨 앉아

꽃치마 속에 뾰족한 부리를 박고

쪽쪽, 쪽쪽! 빨고 있다

참 아름다운, 황홀한 식사다

 

놀란 꽃송이들 속치마까지 홀홀

벗어 던지니

이른 봄날 마른하늘에 눈 내린다

금세 매화나무 배불러오겠다.

 

 

한 쌍의 봄

 

국립4·19묘지

환한 매화꽃 아래

비둘기 한 쌍

포록, 올라타더니

아슬아슬

이층을 쌓는다

잠깐,

(보지도 듣지도 못하는

찰나의 열락)

파르르

꽁지를 맞추고 나서

금방 내려와

한참을,

꼼짝 않고 마주보고 있다

다시 한참을 부리로 깃을 고르고 나서도

또 한참을 그 자리 그대로 서서

누가 보거나 말거나

자연自然이란 이런 것이지

가지 끝 조롱조롱 꽃봉오리들

슬그머니 부풀어 올라

마악 터지고 있다

백매화 푸른 눈썹 아래로

그녀를 살살 꾀어낸 봄날.

 

 

벌금자리

 

벼룩자리 벼룩은 어디로 튀고

어쩌다 벌금자리가 되었을까

청보리 한창 익어갈 때면 이랑마다

그녀가 머리 흐트러진 줄도 모르고

살보시하려 달뜬 가슴을 살포시 풀어헤쳐

천지간에 단내가 폴폴 나는 것이었다

벼락같이 달려드는 바람의 보드란 혀

다디단 세상이 갑자기 캄캄해져서

옆집 달래까지 덩달아 달떠 달싹달싹하는 바람에

땅바닥에 죽은 듯 엎어져 있는 것이

차라리 살아 있는 것이라고 옆찔러 주었다

허리를 굽히고 가만히 내려다봐야

겨우 눈에 뜨이는 벌금자리

해말간 열일곱의 애첩 같은 그녀

흐벅진 허벅지는 아니라 해도

잦은 투정에 식은땀이 흐르는 한밤

얼마나 뒤척이며 흐느꼈는지

가슴속 빈자리가 마냥 젖어서

사는 일이 낭떠러지, 벼랑이라고

벌금벌금 벌금을 내면서도 자리를 잡아야 한다고

그녀는 작은 등롱에 노란 꽃밥을 들고 있었지만

한낮이면 뜨거운 볕으로 콩을 볶는 것도 아닌데

어쩌자고

가슴은 콩닥콩닥 뛰는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꽃무릇 천지

 

우리들이 오가는 나들목이 어디런가

너의 꽃시절을 함께 못할 때

나는 네게로 와 잎으로 서고

나의 푸른 집에 오지 못할 때

너는 내게로 와서 꽃으로 피어라

나는 너의 차꼬가 되고

너는 내 수갑이 되어

속속곳 바람으로

이 푸른 가을날 깊은 하늘을 사무치게 하니

안안팎으로 가로 지나 세로 지나 가량없어라

짝사랑이면 짝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만나지 못하는 사랑이라서

나는 죽어 너를 피우고

네가 죽어야 내가 사는가

나란히 누워보지도 못하고

팔베개 한 번 해 주지 못한 사람

촛불 환히 밝혀 들고 두 손을 모으면

너는 어디 있는가

마음만, 마음만 붉어라.

 

 

봄밤의 꿈

 

백목련이 도란도란

달빛과 놀고 있고,

 

가지 사이 달물이 흥건히 흘러들어

젖꼭지 불어터지라고

단내 나라고

바람은

밤새도록 풀무질을 하고 있었나 봐

삼각산 위에 떠 있는 뽀얀 달

졸린 눈을 끔벅이고 있어,

 

며칠인가 했더니

여월如月보름.

 

 

 <감상>

 

봄을 주제로 한 여섯 편의 시 / 이동훈

 

  ‘봄’에 관한 시인의 여섯 편의 시는 흙으로 반죽한 시다. 흙내가 폴폴 나기도 하거니와 시멘트를 섞지 않아서 말랑말랑하고 매끈매끈하다. 그가 노래하는 매화, 꽃무릇, 벌금자리 등의 나무나 풀꽃은 모두 흙의 기운으로 자란 것들이다. 흙은 뭇 생명이 마음껏 뛰노는 바탕이니 생명을 잉태하고 건사하려는 여성성과 상통한다. 생명을 키우기 위해서는 부드러워야 한다. 여성적인 것은 부드러운 것이고, 부드러운 것은 흙의 고유한 성질이니 생명을 생각하는 시인이라면 흙의 여성성에 이끌리는 건 당연해 보인다.

 

  여성성에 대한 화자의 지향은 ‘햇빛은 초례청의 신부’처럼 남성성을 갖고 있는 대상도 여성화시키고 있는 데서 좀더 확연하게 드러난다. 이는 남성성이 주도하는 현실 세계가 보여준 공격적이고 폭력적인 현실에 대한 거부감에서 기인한다. 하지만 흙, 즉 여성적인 것에 의해서 생명이 움을 돋우었다면, 그걸 꽃 피우고 유전시키기 위해서 남성적인 것 역시 불가결한 존재이다.

 

  ‘벼락같이 달려드는 바람의 보드란 혀’나 ‘바람은/ 밤새도록 풀무질을 하고’에 등장하는 ‘바람’이 남성성을 갖는 상징이며, ‘환한 매화꽃 아래/ 비둘기 한 쌍/ 포록, 올라타더니’ 결국 꽃봉오리를 맺게 하는 비둘기나 직박구리도 남성성을 갖는 구체적 형상이다. 이처럼 홍해리 시인의 시에 등장하는 남성성은 이전의 지배적이고 가부장적인 존재와는 거리가 멀고 여성성을 도와서 생명을 온전하게 키우는 생산적인 역할에 충실하다. 여성성과 남성성이 서로를 거스르지 않고 조화롭게 어울리면서 생을 꽃 피우는 것을 두고 시인은 ‘자연自然이란 이런 것이지’ 하며 깨달음의 일말을 슬쩍 던져 준다.

 

  여성적인 것과 남성적인 것 사이, 흙과 하늘과 빛 사이에 생명들은 사랑을 꿈꾼다. 사랑은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 안의 삶을 아름답게 만드는 일이며 생명의 씨앗을 퍼뜨리는 행위이기도 하다. 낭떠러지에 밀려서도 ‘가슴은 콩닥콩닥’하는 벌금자리나, ‘ 꽃치마 속에 뾰족한 부리를 박고/ 쪽쪽’하는 직박구리는 여하한 일 중에서도 사랑하고 사는 일만큼이나 갈급한 것은 없다는 의미인지도 모른다. 꽃무릇의 꽃과 잎처럼 서로 ‘만나지 못하는 사랑’도 결국은 서로를 완성시키는 밑바탕이 되는 이치를 생각하건대 사랑하지 않고 사는 건 죄 짓는 일임이 분명하겠다. 

 

  흙이 있던 자리에 해가 오고, ‘ 벼룩자리’에 ‘벌금자리’가 오듯이 내가 있던 자리에 네가 온다면 기꺼이 자리를 내어 주고, 또 다른 어디론가 스미고 싶다. 그런 봄이다.(이동훈)  -월간《우리시》2010.4 수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