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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해리의 「명자꽃」과 마원의 「산경춘행도」

洪 海 里 2022. 4. 13. 09:56

홍해리의 「명자꽃」과 마원의 「산경춘행도」

 

스페셜경제

  • 기자명 심상훈 
  •  입력 2022.04.11

[심상훈의 오후 시愛뜰]

 

                                            작가·인문고전경영연구가
 
 

이름만 얼핏 보고는 남잔 줄로 막연히 알았었다. 입때껏 남잔 줄 알았건만 ‘그’가 아니고 ‘그녀’라서 놀랐던 적 많다.

 

 

명자꽃

 

洪 海 里

 

 

 

꿈은 별이 된다고 한다

너에게 가는 길은

별과 별 사이 꿈꾸는 길

오늘 밤엔 별이 뜨지 않는다

별이 뜬들 또 뭘 하겠는가

사랑이란

지상에 별 하나 다는 일이라고

별것 아닌 듯이

늘 해가 뜨고 달이 뜨면

환한 얼굴의

명자 고년 말은 했지만

얼굴은 새빨갛게 물들었었지

밤이 오지 않는데 별이 뜰 것인가

잠이 오지 않는데 꿈이 올 것인가.

 

                             마원, (산경춘행도(山徑春行圖)), 12세기, 비단에 수묵담채, 대북 고궁박물관
 
 

“진정한 분석은 분석되지 않는 것에 이르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중략) 나의 분석은 내가 말을 걸고 싶은 작가들에 대한 내 존경과 사랑의 표현이었던 것 같다.” (황현산, 《말과 시간의 깊이》, 7쪽 참조)

양황후, 낮이면 버드나무 밤이면 명자꽃 이름만 얼핏 보고는 남잔 줄로 막연히 알았었다. 입때껏 남잔 줄 알았건만 ‘그’가 아니고 ‘그녀’라서 놀랐던 적 많다. 앞에 그림 <산경춘행도>와 같이 소개한 시, 「명자꽃」의 시인 홍해리(1942~ )는 실은 남자이고, 책따세 추천도서 《그림공부, 사람공부》의 저자인 미술사학자 조정육(1963~ )은 실은 여자이니 사는 게 뭔지, 여전히 착각하니 만만치가 않다.

<산경춘행도>를 그린 이는 중국 북송 때 화가 마원(馬遠, 12세기 후반~13세기 중반)이다. 그림 속 주인공. 산길을 따라 천천히 산보(散步)를 시작하는 문사(文士)의 머리 위로 버드나무 실버들이 춘풍(春風)에 가볍게 나부낀다. 문사와 저만치 간격을 두고 시동(侍童)은 거문고를 허리춤에 조심스레 얹고 뒤따른다.

갑목(甲木)에 해당하는 버드나무. 그 줄기 밑부분을 을목(乙木)의 야화(野花)가 군데군데 차지한다. 오행의 조화를 기막히게 형성한다. 야화의 정체는 개나리와 비슷하고, 또 명자나무처럼 설핏 비춰진다. 그렇다. 야화가 지금은 그림에서, 차마 꽃을 다 드러내지 않았다. 사월이 채 되지 않았으니. 그러니 어쩌랴. 꼭 정체성 시비를 당장 따진들 뭐하겠는가?

그보다는 그림의 오른 쪽 상단을 차지하는 제화시문(題畵詩文, 문인들이 그림을 보고 감상한 뒤 쓴 시와 글을 말함) 내용부터 먼저 살펴보자. 총 14글자의 한시를 말하자면 이렇다.

觸袖野花多自舞 촉수야화다자무

避人幽鳥不成啼 피인유조불성제

소매 끝에 닿는 들꽃은 절로 반기는데

인적 피해 숨은 새들은 노래하지 않네

대충 뭐, 이런 내용의 한시가 적혔다. 시를 직접 붓끝으로 적은 이는 마원의 후원자였던 중국 남송 4대 황제 영종(寧宗, 재위 1194~1224)의 두 번째 황후인데 ‘양황후(楊皇后)’라고 전한다. 양황후는 사실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왜냐하면 그녀는 강남 지방의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궁녀가 되고 어느 날 영종의 눈에 들어 비빈을 거쳐 황후의 자리까지 꿰찼던 아주 드라마틱하고 역사적인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조선 21대 임금, 영조의 친모 ‘동이’와 스토리에서 흡사하다.

우리 시대의 뛰어난 미술사학자 고연희는 마원이 그린 <산경춘행도>를 두고서, “산수의 원경이 여백으로 표현되고 근경의 인물은 감상의 주체로 그려졌다”(고연희, 《조선시대 산수화-아름다운 필묵의 정신사》, 51쪽 참조)고 극히 짤막하게 촌평했다. 이와 이어지는 차원에서 내 비평은 이러하다.

버드나무는 양(楊) 황후를 가리킨다. 일종의 알레고리다. 그렇다면 의젓한 저 문사는 누구인가. 그는 바로 황제(영종)일 게다. 문사의 발걸음은 아직 버드나무 그늘을 벗어나지 못한 그림을 보여준다. 나뭇가지에 사뿐히 앉은 새는 신하(마원)이고, 날아가는 새는 노래하지 못하는(충성하지 못하는) 간신배의 상징으로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야화(명자꽃)는 도대체 누구를 말함인가? 이조차도 나는 양황후의 분신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낮엔 버드나무와 같은 의지처의 음전한 모습으로, 밤이 오면 꽃으로 곁에서 문사, 즉 황제를 보좌하겠다는 황후로서 욕망, 숨은 장치가 그림 속엔 빼곡하게 찼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거문고를 든 시동은 누구냐고? 그건 어린 내시(內侍)로 봐야지 뭐!

명자꽃. 즉 ‘명자나무’에 대해 나무 박사 박상진 교수의 설명은 이렇다. 다음이 그 내용이다.

명자나무의 ‘명자’를 우리는 한자로는 명사(榠楂)라고 쓰지만, 명자로 읽는다. 《동의보감》한글본에도 그리 되어 있다. 열매를 명사자(榠楂子)라고 부르다가 가운데 글자를 생략해 명자로 부르게 된 것이다. 일본은 명자나무를 한자로 목과(木瓜)라 하며, 반대로 모과나무를 한자로 명사(榠楂), 화리(花梨)라고 쓴다. 또 명자나무보다 키가 작고 흔히 누워 자라므로 풀 같다는 풀명자도 있다. 명자나무 종류의 하나로 산당화(山棠花)를 따로 구분하기도 하였으나 지금은 명자나무로 통합하였다. 북한에선 명자나무를 풀명자나무, 풀명자를 명자나무라고 한다. (박상진, 《우리 나무 이름 사전》, 153쪽 참조)

명자나무는 중국이 원산지이다. 명자꽃을 달리 중국에선 산당화(山棠花)라고 명명한다. 그러니까 마원의 그림에서 잡목으로 간주되는 야화(野花)의 정체성은 어쩌면 기구하고 드라마틱한 반전을 그려내는 한 여인의 팔자로서 역경을 밟게 마련이다. ‘화발다풍우(花發多風雨)’라는, 옛 시구가 지금도 우리에게 전해지고 새겨진다. 여하튼 화양연화의 꽃. 꽃이 피기 위해서는 수많은 비바람(고통)이 필히 따른다는 그런 얘기이다. 즉, 한 사람의 역경이 제 때를 만나면 ‘그/그녀’만의 고유한 경력이 된다. 인생 노하우가 된다. ‘꽃’으로 예쁘게 활짝 필 수 있다. 이런 조언을 ‘화발다풍우(花發多風雨)’라는 구절은 함유한다.

 

                                  이장호 감독, (명자 아끼꼬 소냐)의 한 장면, 1992년 作, 멜로·로맨스.
 

이장호 감독이 연출했던 한국영화 김지미 주연의 <명자 아끼꼬 소냐>(1992년 作)의 여주인공 ‘명자’는 한국에서 흔히 부르던(영자, 순자, 경자, 길자, 옥자, 숙자 등등) 이름이고, 일본에 가면 ‘아끼꼬’라는 발음이 되고, 러시아에 살면 ‘소냐’라고 불러진다. 그런데 자세히 알고 보면 한 여인의 고정불변 이름이긴 매한가지다. 그러니까, 명자·아끼꼬·소냐. 이 세 가지의 이름은 한국·일본·러시아, 라는 국적만 다를 뿐이지 ‘명자’가 아닌 것은 전혀 아닌 것이다.

명자꽃은 집 안에 심지 않았습니다. 집의 아녀자가 명자꽃을 보면 바람이 난다고 하여 집 안에 심지 못하게 한 것이랍니다. 우습지요? 꽃이 뭐라고! 암튼요. 경기도에서는 명자꽃을 아가씨꽃, 애기씨꽃이라고 부르고, 전라도에서는 산당화라고 부른다지요. 아참, ‘붉은 명자, 붉은 명자’ 해서 명자꽃이 붉은 꽃만 있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희디흰 명자도 있으니까요. 희붉은 명자도 있고요. 물론 어떤 색이든 명자는 사람을 홀릴 만큼 예쁜 꽃입니다. (박제영, 《사는 게 참 꽃 같아야-시인들의 꽃 이야기》, 91쪽 참조)

이런 내용이 박제영 시인이 쓴 책 《사는 게 참 꽃 같아야-시인들의 꽃 이야기》에 보인다. 그러고 보니 명자꽃을 마당에 심지 않고 울타리로 경계로 삼은 집들이 속속 즐비한 편이다. 내가 자주 산책하는 코스. 오산 서랑저수지 ‘아내의 정원’. 그 집 앞, 울타리에 서 있는 명자나무가 새빨갛게 사월 들어서 물들이고 있다. 와! 정말 예쁘다. 홍해리 시인의 「명자꽃」에 등장하는 “명자 고년”은 상상하면 피부가 맑은 “환한 얼굴”의 소녀였을 테다. 사춘기 소녀가 뭘 안다고.

시인이 되기도 전 한 이웃 소년에게 다가와서 “사랑이란/지상에 별 하나 다는 일이라고/별것 아닌 듯이/늘 해가 뜨고 달이 뜨면”은 꼭 나타나서 주저리주저리 그렇게 말했을까. 시인이 이성에 막 눈을 처음 뜨던 사춘기 때, 이웃집에 사는 ‘명자’라는 이름을 가진 명자꽃을 무척 닮은 그 소녀를 생각하노라면 “밤이 오지 않”고 “잠이 오지 않”음이 당연하다. 어찌 첫사랑, 명자를 사월의 봄, 명자꽃 보고 차마 잊으리오. 그렇다. 죽을 때까지 잊을 수 없다. 그게 인지상정(人之常情)이니까. 그리고 끝으로 나는 내가 말을 걸고 싶은 시인들, 그리고 화가들을 앞으로도 일이관지 존경하고 계속 사랑할 것이다.

◆ 참고문헌

홍해리, 《洪海里는 어디 있는가》, 움, 2019. 조정육, 《그림공부, 사람공부》, 아트북스, 2009. 42, 47쪽 참조. 고연희, 《조선시대 산수화-아름다운 필묵의 정신사》, 돌베개, 2007. 51쪽 참조. 박상진, 《우리 나무 이름 사전》, 눌와, 2019. 153쪽 참조. 박제영, 《사는 게 참 꽃 같아야-시인들의 꽃 이야기》, 늘봄, 2018. 88~94쪽 참조. 황현산, 《말과 시간의 깊이》, 휴머니스트, 2002. 7쪽 참조.  ylmfa97@naver.com

* 심상훈

인문고전경영연구가. 한국MID문화예술원 인문교양학부 책임교수. 경제주간지 머니위크 객원논설위원 등. 지은 책으로 《공자와 잡스를 잇다》, 《이립 실천편》, 《책, 세상을 경영하다》등이 있다. 현재 고전경영연구공간 동아시아경사연구소를 운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