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詩』와 우이시낭송회

진평주 시인의 <우이시> 이야기

洪 海 里 2005. 11. 9. 17:12
먼저 쓴 생을 마감하고 싶다를 남기기 전에 다녀온 우이시낭송회 | 진평주 2005/03/01 10:15
http://blog.naver.com/jinmun03/40010900885
지난 26일 오후 3시부터 4시간 동안 서울 강북구 도봉도서관에서 홍해리, 박희진, 이생진 시인 등 수십분의 시인과 50여명의 사람들이 참석해 조촐하지만 뜻 깊은 우이시 200회 자축 기념 행사가 펼쳐졌다.

본 행사 전에 박희진 시인의 담론 시간에 시인께서 자신이 심취해온 예술세계와 소나무의 미학을 강론하였다.

소나무에게서 느끼는 격과 운치와 높은 경지, 소나무를 사랑하는 사람은 영성을 지닌 사람이다. 이 영성의 지향은 시(詩 예술작품)를 탄생시키는 내적 영감의 힘을 길러 준다고 강조하였다. 그리고 현대인들은 영성의 진화는 안 믿고, 과학만 믿는 건 자기모순이라고 지적했다.

▲ 박희진 시인이 담론 시간에 강연하는 광경
ⓒ2005 임계순
본 행사는 우이시의 회장인 홍해리 시인이 징을 치자 시작되었다. 이어 1부 행사는 목필균 시인 사회로 진행되었다.

홍해리 시인은 회원들께는 오늘 아침에 이메일로 인사말을 보냈다며 "새로운 시작!, 새로운 도전!"의 날 선포하고 “지역 주민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고 이 나라의 시문학 발전” “시의 메카”가 되도록 온힘을 다해 나가길 다짐하였다.

이상설 강북구 부구청장님의 축사와 부산의 전홍준 시인님께서 보내주신 축전.

나병춘 시인이 강산이 두 번 변한 동안 우이시가 걸어온 발자취를 밝혔다.

1986년 북한산 밑 우이동 인근에 살고 있던 몇 시인들(이생진, 임보, 신갑선, 채희문, 홍해리)이 <우이동 시인들>이라는 동인을 만들고 이듬해 1987년 3월 15일 동인지 <우이동> 제1집을 간행했다.

그리고 창간호 간행 기념으로 시낭송회를 효시로 제2회 시낭송회는 역시 동인지 제2집을 간행(1987.9.15)했고, 87년 10월 30일(금) 7시에 우이동 <명동>다방에서였는데 동인 외에 박희진, 추명희, 문효치, 황도제, 이무원, 김동호, 정성수, 이봉신, 김준회, 백우암 등이 참석. 제3회는 장흥에 있는 <너와집>에서 1988년 2월 28일(일) 오후 3시에 우이동 시인들 외에 구순희, 서경온 시인들과 함께 걸어온 여정.

그 뒤 20여 회를 진행하는 동안에 낭송을 활성화하기 위해 대금의 송성묵, 단소의 윤문기, 고수의 장영철 등 국악인들도 동참하게 되었다.

제21회부터서는 <우이시회>가 우이동을 벗어나 인사동으로 진출. 1989년 10월 7일(토) 오후4시, 장소는 송성묵이 기거하는 '민대감집'에서 국악인들도 많이 참여하여 흥겨운 시낭송의 마당으로 발전해 낭송회의 명칭도 <한넋예술마당>으로 바꾸어 종합예술공연으로까지 확대. 1992년 8월 제50회는 본고장인 우이동으로 다시 돌아와 <우이시회>의 명칭을 회복하고 <난다랑>에서 갖었다.

제51회부터서 장소를 도봉도서관 4층 시청각실로 정하고 매월 마지막 토요일 오후 5시로 시간을 바꾸고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새로운 식구로 작곡에 변규백, 노래에 하덕희, 그리고 단소에 시낭송가인 김성천 등이 추가되었다.

매월 정규적인 시낭송을 하는 외에도 연례행사로 봄과 가을철에 북한산록에서 <북한산 시화제(詩花祭)>와 <북한산 단풍시제(丹楓詩祭)>를 갖는다. 꽃이 만발하는 봄과 천자만홍의 단풍철에 아름다운 자연을 만끽하면서 자연을 주신 천지신명께 감사하며 시와 노래와 춤으로 경배의 제를 올리고 자연 속에서 시의 축제 마당을 펼쳐오고 있다.

한편 겨울과 여름 방학기간에는 도서(島嶼)탐방 여행을 떠나 시문학 세미나와 함께 회원간의 친목을 다져 왔다. 또한 1995년 7월 제85회부터서는 작품집 월간「牛耳詩」를 발간하여 문단에 널리 배포하고 있다.

<우이시회>는 우리나라의 유수한 시낭송회의 하나로 자리를 굳히고 있다. 현재 정회원은 고문에 김종길, 이생진, 박희진 시인, 명예회장에 임보, 회장에 홍해리, 그리고 채희문, 정성수, 이무원, 오수일, 황도제, 김동호, 고창수 등 63명을 넘어선다고 했다.

▲ 우이시 20년 동안 낭송회 사진들
ⓒ2005 임계순
임계순 님이 1995년부터 촬영해온 10년의 영상 자료를 감상하며 감동을 받았다. 큰 자산을 잘 보관해 온 세밀함을 과시하였다.

우이시 여러 시인들의 젊은 얼굴들에서 그때 그 시절과 지금의 변모한 얼굴, 초대 시인으로는 고 구상 시인의 생전 모습도 비추었다.

간간이 지금 이 자리에 함께 하지 못한 그리운 얼굴을 회상하는 아쉬움을 연출했다. 특히 100회 기념에는 어린 학생들도 많이 눈에 띄었다.

우이시와 함께 오랜 세월을 함께 하신 이생진, 박희진, 고창수, 임보, 홍해리 신갑선 시인의 촛불 헌화.

곧이어 이대의 시인이 축시 /삼각산 둥지 우이동에 커다란 나무를 보라/세상 어수선함에 휩쓸리지 않고 / 중략 / 우리 살아 있는 그날까지 영원히 함께 할 나무여 / "뿌리 깊은 나무는 거센 바람에도 쓰러지지 않는다" 낭송을 끝나자 여섯 분들이 촛불을 끄고 케이크를 절단하였다.

모든 것이 빠르게 움직이는 시대에 천천히 걷는 행보를 갖자는 임동윤 시인의 첫인사말로 시작된 2부는 낭송과 성악, 시극으로 진행되었다.

특히 제주도에서 참석한 황근남 시인은 “소나무 아래에서”, 부여에서 온 최석우 시인은 준비해 온 시로, 청주에서 온 이규흥 시인은 “천천히 가는 길”을 낭송했다.

박희진 시인은 고품격의 소나무를 만나면 숨이 막힌다는 말과 함께 / 중략 / 찬미의 춤, 봉헌의 춤. / 그런 춤을 보이는 건 이곳뿐 아니라 / 그러니 우리들의 축복된 소나무들, / 부처님의 무량 공덕을 기뻐하며 / 춤추지 않는다면 소나무가 아니지 중략, 2 / 3. 어느 가을 날 달밤의 일이었다. 뜰엔 싸락눈이 깔린 듯 하고 / 다버탑 석가탑은 / 달빛을 머금어서 창백해지더니 / “불국사와 노송들”을 백발이 성성함에도 우렁찬 목소리로 낭송했다.

변규백 선생의 반주와 하덕희 님이 지상의 소나무(박희진 작사)를 노래하였다. 정성수 시인은 캐나다에서 오신(벌써 한국에 정착하신) 박정순 시인의 낭송을 꼭 들어야 한다고 관객을 한바탕 웃기더니 “내 마음의 우주”를 낭송했고, 박정순은 “차를 끓이며”를 낭송하였다.

이어 송성묵 명창의 대금산조 진양조 연주, 조영제 명창은 새타령과 흥부가 중에서 관아의 병영에 들어가는 장면을 판소리로 들려주었다. 이어 조성심 시인이 “촛불”을 낭송했고, 박정래 시인은 “새해란 것” 낭송한 후, 영원한 자유인 송상욱 시인은 기타 반주로 들려주신 '부용산'과 '황진이'의 애간장을 태우는 노래를 들려주었다.

200회 기념행사의 백미는 시극으로 이생진 시인이 조선시대의 삿갓 쓴 방랑시인 김병연으로 분장하고, 한수재 시인이 주모로 연기를 펼치자 객석에 있는 참가자들은 뜨거운 박수갈채를 보냈다.

이생진 시인은 다음 2탄 사각송반(四脚松盤) 준비하고 있는데 이 주모역을 인터넷상에서 공모한다고 하셨는데 진담인지, 농담인지를 한 마디 하시자 또 한바탕 폭소가 터졌다. 우이시 시낭송가를 모두 함께 부르며 징소리와 함께 행사는 대미를 장식했다.

자축 200회 기념행사에서 어린 학생들이 많이 보이지 않아 안타까웠다. 대한민국이 급속히 노령화 사회로 진행되어 가고 있는 것처럼. 문학회나 창작 활동을 하는 학생들이 감소하고 있는 현실을 그대로 나타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