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난초밭 일궈 놓고』1994

<시> 실명제를 위하여

洪 海 里 2005. 11. 29. 04:40
실명제를 위하여
홍해리(洪海里)
 

그래, 이 가을엔 모두 다 잊어버리자
이파리나 열매들이 나무와 이별을 하듯
털갈이하는 날짐승 길짐승처럼
이 가을엔 다 버리고 가자
마음은 푸른 하늘에 띄워 버리고
추억은 시드는 풀잎에나 주어 버리자
육신의 뼈마디는 은사시나무에게나 주고
살점은 청둥오리 날개에 실어 날려 보내자
소리는 진도 아리랑 가락에 섞어 버리고 
사랑도 그 흔한 멜로드라마에 던져 버리자
까짓것 모두 실명제 하는데
숨겨 놓을 것도 없다
대명천지에 드러낼 것 드러내고
감춰 둔 슬픔이나 절망도 꺼내어 놓자
보아야 뵐 것도 없고
털어야 날릴 것도 없어 편하니
목도 날리고
별도 날리고
불꽃도 재우고 생각도 지우면
철새처럼 오는 가을병이 도져서
이 밤도 잠 못 들겠네, 꿈 못 꾸겠네
그래, 이 가을엔 모두 다 벗어 버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