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평론·시감상

<문학평론> 江의 詩, 詩의 江 / 한강 : 김경수

洪 海 里 2005. 11. 29. 10:23
江의 詩, 詩의 江/김경수
-<진단시> 20집 『오, 한강』
 

    江의 詩, 詩의 江
    -진단시 20집 『오, 한강』

                                金慶洙(문학평론가)

 자연의 대상물은 인간의 삶에서 결코 남아 있지 않다.
인간의 삶이 자연 속에서 영위되는 것인 한, 인간은 어느
모로든 제 주변의 자연을 이해해야 하는 것이며, 그러한
이해의 노력은 급기야 자연의 정물들을 제 삶의 인식 구조
속으로 편입하기에 이른다.
 자연을 제 삶의 영역, 인식의 영역으로 끌어안는 가장
기본적인 태도가 아마도 수사법일 것일 텐데, 자연을 심미적
관조의 대상을 넘어서서 무언의 도덕률을 포함하고 있는 
'존재'로 보는 동양의 전통적인 자연관도 결국은 그러한 
수사적 태도에서 비롯된 결과일 것이다. 그리고 비유의
그물로 자연을 보아내는 인간의 의식 가운데서도 강이 
차지하는 비중은, 구체적인 형상을 지닌 자연 대상물 가운데
가장 높을 것이다. 아마도 그 이유는 동서양의 초기 문명이
강 주변에서 그 싹을 틔웠다는 역사적인 사실에서도 환기
되듯이, 강이라는 것이 인간 삶의 맥락을 애초부터 규정해준 
이른바 메타적 삶의 한 표본이기 때문일 것이다.
 사정이 그런 만큼 동서 고금을 막론하고 강이라는 주제(소재가 
아니다)가 많은 시인 가객들의 의식의 운반체이자 동시에 
의식의 근원으로서 일종의 문학적 힘이 되어 온 것도 전혀 
낯설지 않은 것이다. '세월의 강'이라는 상투적인 비유가 우리
의식의 한 전형으로 자리잡은 것은 두말할 것도 없거니와, 
여러 모로 강은 인간사의 매 국면마다 관여하거나 독특한
장소애의 원천을 제공함으로써 인간의 삶과 함께 흘러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해서 소동파의 적벽을 낳게 한 장강(長江)이 그렇고 블레이크의 
템즈강이 단적인 두 예가 되어주듯이, 문학의 역사는 바로 
강의 역사라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이고, 좀 더 좁혀 말하면
강의 시학이라는 이름으로 문학의 본질을 꿰찰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한 연장선상에서 우리의 한강의 시학사를 논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한반도에 크고 작은 무수한 강이 있되 한강만큼 지속적이고
큰 울림을 갖는 강도 드물다. 단적으로 말하면 그것은 한반도
에서의 역사적 삶의 변천의 한가운데에 항상 한강이 놓여져
있었고, 영욕이 점철된 근대사의 흐름을 묵묵히 보아내면서 그 
한가운데를 흘러온 강이 바로 한강이며, 또 현재도 우리들의 
삶의 양식을 규정하는, 변하지 않는 규정소(規定素)가 역시 
한강이기 때문이다.
 <진단시>의 이번 테마는 바로 이러한 역사적 울림과 숱한 
지시 내용을 담고 있는 한강이다. 마침 서울 정도 600년을 
점검하는 시점에서 한강이라는 테마시를 천착해 들어간 
<진단시>의 작업은 일단 의미를 갖는다고 우리는 말할 수 
있다. 그 이유는 공식적으로 거론되는 역사의 강이라는 보편적
인식 범주와는 달리, 우리 시인들이 한강에 대해 취하는 
문학적 시선 및 그 교감은 그 자체로 우리의 시문학이 강에 
대해 견지하는 태도의 한 측면을 분명히 드러낼 것이고, 또 
그것이 어느 만큼은 강에 대한 인접 분야의 담화에 그 교정의 
몫을 제공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이제 그들이 한강과의 
맞대면 속에서 이루어내는 강의 면모, 혹은 강이 흐르듯 
결구로 지향하는 그들 시의 흐름을 살펴보도록 하자.
 앞에서도 말한 것처럼 강은 역사의 흐름과 동궤의 것으로 
인식되어져 왔다. 그것은 강도 세월도 '흐른다'는 공통의 
관념이 삶은 물론 역사마저도 가시적인 또 다른 강으로 
보도록 해 주었기 때문이다. 그 만큼 강은 역사와 동격으로 
취급되었고, 따라서 일차적으로 <진단시>의 시인들이 한강의 
흐름 속에서 역사적 지층의 흐름을 포착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고여 썩을 자리 씻어 흐르는
이 몸의 탯줄인 한강이여
어머니의 자궁이던 고향도
얼굴을 드려다 보던 우물도
끝없이 가면 닿을 바다도
그대로 우리에겐 그리움이었지
늘 이쪽과 저쪽을 갈라놓은 채
천 개의 달을 안고 흐르는
강은,
오늘도 우리들의 이야기를 반짝이면서
세월을 계산하지 않는다
산길을 돌아들기도 하고
산 그림자를 품어 안고 흘러가면서
표정을 지으려 하나
바다는 아득히 멀다
한과 슬픔을 풀어내고
한없이 흘러가 하나가 될 바다
지금은 죽음만을 쓸쓸히 껴안고
시대의 온갖 위선과 무지에 눌려
반신불수로 길게 누워 있다
맑은 물에 마음 한번 휑궈 못 보고
한 치 앞도 내다보지  못하면서
저 흐르는 소리조차 듣지도 못한 채
흐르는지조차 깨닫지 못하는
썩은 웅덩이, 병든 강이 되어버린
하나의 강, 한의 강, 한강이여
언제 바다에 가 닿는가 
언제 바다에 가 푸르게 살아나는가.

          ---홍해리, 「한강은 흘러가라」의 전문

 위의 시가 보여주듯, 이제 강을 주제로 하는 시인들의 선택은
위의 시편처럼 의문법을 통해서라도 강의 물꼬를 현재적 속박에서 
풀어낼 수 있는 가능성을 꿈꾸는 일인 것이다.
 그 어느 경우나 그 오랜 역사적 지층을 현재화시키지 못하는 
한강을 꿈꾸는 일이 위험한 것이기는 마찬가지다. 하지만 어느 
정도 그같은 것은 사회적 담화의 영역에 맡겨둔다고 해도, 우리가
오히려 우려하는 현실은 필자의 이 글의 제목에서 쓴 것과 같은 
시라는 강의 흐름의 문제일 것이다.
 강이 흐르듯 시도 발원지가 있고, 거쳐가는 제 길이 있고, 그리고
포섭해야 할 지류가 있고 마침내 도달해야 할 의미의 바다가 있다.
그 점에서 본다면 강과 시는 이미 한몸이라고 말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진단시> 동인들이 도달한 한강의 시의 문제는, 이 점에서 한강이
그 역사적 현재성을 확보하지 못하는 한, 말하자면 의사적(擬似的)
죽음의 상태에 처해 있는 한, 시도 나름의 순탄한 결구의 과정을 
결코 밟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일깨워준다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이번 <진단시>의 테마시편인 '한강' 시편들을 통해 
우리는 시의 강이 살기 위해서라도 우리 삶의 현장을 관통하는 
한강은 반드시 살려야 한다는 메시지를 읽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메시지는 사회학자의 몫도 정치권의 몫도 아니다. 독법을 통해 이번 
<진단시>의 이번 작업은 이 땅에 사는 사람들 사이에서 그 공감대를 
보다 넓혀갈 것이 틀림없다.

                       진단시 20집 「오, 한강」(19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