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평론·시감상

<문학평론> 생명과 노래 -洪海里論 / 이영걸

洪 海 里 2005. 11. 29. 10:34
생명과 노래-洪海里論/이영걸
 

     생명과 노래
                   ---洪海里論

                                   李永傑(시인·한국외국어대 교수)

                                      1
                                          
 『投網圖』(1969년)에서 『淸別』(1989년)에 이르는 20여년 동안 洪海里씨는 왕성한 시작활동을 보여주었다. 필자는 그간 네 편의 글로 그의 세계를 살펴보았으나 이번에는 『投網圖』에서 『淸別』에 이르는 그의 시의 궤적을 개관하고자 한다. 이런 목적으로 1965∼1983년의 작품들은 수록한 『洪海里詩選』(탐구당, 1983) 및 근년의 시집 『대추꽃 초록빛』(1987년)과 『淸別』(1989년)을 다시 숙독하였다.
 洪海里 詩의 전개를 대체로 美意識·자연·時代相으로 분류해 고찰할 수 있지만 이번의 글에서는 여러 국면을 관류하는 공통적인 주제로 시작의 모티프와 의의를 다룬 시편들을 조명하겠다. 詩作의 의의를 한국적 전통·자연의 관조·시대와의 연관을 통해 헤아리는 洪海里의 詩心은 문체와 어조와 시각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그의 시세계의 일관된 관심을 드러낸다.
 『花史記』(1975년)의 작품 「詩를 쓰는 理由」는 매우 침착한 어조로 시작과정의 성격을 암시한다.

   십리 밖 女子가 자꾸 알찐대고 있다.
   달 지나는지 하루살이처럼 앓고 있다.
   돌과 바람 새 능구렝이가 울고 있다.
   내 안을 기웃대는 눈이 빛나고 있다.

 침착한 어조의 연속적 진술로 점차 뚜렷해지는 시상의 표현에 앞선 苦心을 시사한다. '알찐대고 있다', '앓고 있다', '울고 있다' 등의 과정을 거쳐 드디어는 빛나는 눈의 內省과 희열에 이른다. '십리 밖 女子' '하루살이' '능구렝이' 등은 일견 불연속적 대상이자 비유이지만 제목의 명제가 초점을 제공하듯이 세월 속에 생명을 앓으며 표현하는 시작과정의 수고와 보람을 암시한다.
 첫시집 『投網圖』의 「善花公主」는 薯童의 전설에 근거하여 시인 자신의 시적 포부와 어려움을 다룬 작품이다. 서두에서는 '종일 피릴 불어도 / 노래 한 가락 살아나지 않음'을 자탄하며 '천년 피먹은 가락 / 그리 쉽게야 울리야만'이라는 깨달음에 이른다. 시적 포부와 어려움의 주제를 부연하는 후속되는 부분에서는 바다와 강물의 이미지를 구사하며 전통미와 시적 진실의 모티프를 다룬다.

   물거품 말아 올려 구름 띄우고
   바닷가운데 흔들리는 순금 한 말
   가슴으로 속가슴으로
   모가지를 매어달리는 빗살
   천년 서라벌의 나뭇이파리.

   달빛을 흔들어 놓고
   조상네 강물을 울어
   손가락 입술까지 적신다만
   금빛 가락 은빛 가락은
   눈물 뿌리던 사랑.

   먼지 쌓이는 한낮에 놀다 가는
   그림자뿐.

 햇살이 쏟아지는 바다의 상황으로 '순금 한 말'의 이미지를 제시하고 달빛 비치는 강물로는 조상의 얼을 되새기는 심경을 드러냄으로써 시인의 포부가 永時代的 애환과 전통적 정서의 취급에 있음을 암시한다. 결구에서는 시적 理想과 현실적 어려움의 거리를 '먼지 쌓이는 한낮'의 '그림자'로 개괄함으로써 삶의 성격과 자신의 능력을 겸허히 반성하고 있다. '순금 한 말'과 '금빛 가락 은빛 가락'은 시인이 지향하는 표현의 精彩이다.
 「善花公主」가 시작의 영시대적 의의를 다룬 것이라면 『花史記』의 「첫눈」은 詩作의 시대적 의의를 다룬 작품이다. 前者가 표현의 완전성을 강조한다면 後者는 시의 시대적 연관을 강조한다. '첫눈'을 '누가 하늘에서 부는 피리 소리'로 비유하는 이 시는 '텅 비어 비어 있는 사내들'에게 다음과 같이 호소한다.

   빈 가슴을 스쳐 지나는 맑은 바람결
   살아 생전의 모든 죄란 죄
   다 모두어 날려 보내고
   머릿결 곱게 날리면서
   처음으로 노래라도 한 자락 불러라
   사랑이여 사랑이여
   홀로 혼자서 빛나는 너
   온 세상을 무너뜨려서
   거대한 빛
   그 無地한 손으로
   언뜻 
   우리를 하늘 위에 와 있게 하느니.

  '첫눈'의 순결함을 유념해서 혼탁한 시대상에 저항하는 자세를 거침없는 가락에 담았다. 「善花公主」의 경우에는 표현과 진실의 관계를 '금빛 가락 은빛 가락은 / 눈물 뿌리던 사랑'이라 함으로써 주로 對人的 사랑을 강조한 것이라면 「첫눈」의 사랑은 죄와 혼탁한 시대에 맞서 순결을 지향하는 열정을 뜻한다는 점에서 새로운 관심이라 하겠다. '사랑이여 사랑이여 / 홀로 혼자서 빛나는 너'는 겸허의 덕과 염결성을 간직하려는 의지를 암시한다.
 『화사기』의 또 한 작품 「개울」에서는 가을 하늘을 자신을 비춰 보는 '큰 거울'로 비우하여 윤리적 성찰의 주제를 다룬다.

   어둠이 짙을수록 더욱 똑똑히 보이는
   내 영혼의 뼈와 살의 무늬들
   전신이 맑아오는 칠흑의 세계
   어디서 새벽녘 두레박소리 들리고
   어둠이 물러가는 그림자 보인다.

 '거울'은 빛 속에서야 물상을 비추지만 어둠 속에서 드러나는 영혼의 무늬는 '전신이 맑아오는 칠흑의 세계'의 역설과 함께 양심과 자아성찰의 힘을 뜻한다. '새벽녘 두레박소리'는 명암의 모티프와 관련되어 갱신과 해갈의 조짐을 암시하는 이미지이다. 가을의 '맑은 거울'을 다루는 후속되는 부분에서는 가을을 의인화하여 '그대 눈 속에선 / 물 흐르는 소리만 곱게 들리고' 있음을 언급한 후 진술에 근거하여 내성의 주제를 개괄한다.
 
   문득 나를 압도하는 가을 하늘이
   내가 나를 보지 못하고
   내가 나를 듣지 못할 때
   나의 꿈 속까지 헤매이면서
   나의 잠을 쫓고 있다.
 
 자아망각에 대한 각성과 윤리적 긴장이 잠긴 「꿈」의 대조와 의인적 관점과 상황으로 설득력을 얻는다.
 「피리」의 모티프는 같은 시집의 「소리」에도 취급된다. '하늘에서 / 누가 피리를 불고 있다'로 시작되는 이 詩도 의인법을 활용하며 '죽은 나뭇가지에 와서 / 아픔이 되는 바람의 자유'라는 개괄을 제시한다. 이어, '풀밭에 달려가 물구나무서는 / 맨살의 도시, 그 言語들'에 비판성을 드러낸다. 선행하는 '죽은 나뭇가지'의 연상과 함께 '물구나무서는 맨살의 도시'는 부정적 연상으로 진실에서 이탈된 삶의 공허성을 암시한다. 후속되는 부분에서는 '바람'의 윤리적 함축을 보강하는 자연경관의 세목들로 쇄신과 각성의 모티프를 펼친다.

   풀잎아 너의 꿈은 어디 있느냐
   사랑이여 부를 수 없는 노래여.
 
   살아나라 살아나라 하며
   날아가는 저 하늘의 구름 한 점.

   자갈밭에 그냥 내려 스미는
   혼자 깨어난 봄빛소리.

   아아, 하늘에서
   누가 피리를 불고 있다.

 '풀잎'과 '구름'과 '봄빛소리'의 세목은 「바람」의 주된 상징과 함께 생명 쇄신에의 염원과 이를 방해하려는 조건에 대한 고뇌를 대조한다. '자갈밭에 그냥 내려 스미는 / 혼자 깨어난 봄빗소리'는 악조건에 대한 안타까움과 함께 각성의 소중함을 '혼자 깨어난'에 암시한다. 또, 자갈밭에 내리는 봄비의 상황은 선행하는 시행의 '풀잎과 너의 꿈은 어디 있느냐'의 질문과 '살아나라 살아나라'의 기원을 더욱 간절한 것으로 만든다.
 「善花公主」에서 「소리」에 이르는 여러 시편은 이처럼 「피리」의 공통적 모티프로 시적 진실의 주제를 전통 및 시대와의 관련 속에 취급했다는 점에서 洪海里 詩의 변화와 지속성을 함께 주목하게 한다.  

                                       2

 앞에서 살폈듯이 『花史記』의 『詩를 쓰는 理由』는 네 개의 서술문을 침착한 어조에 담아 『投網圖』의 『善花公主』나 『花史記』의 시대적 고뇌를 담은 시편들의 열정에 대조를 이룬다. 「詩를 쓰는 理由」의 '돌과 바람 새 능구렝이가 울고 있다'는 서술문은 「善花公主」의 '조상네 강물을 울어'나 「소리」의 '풀잎아 너의 꿈은 어디 있느냐'에 비해 관조적 자세와 절제된 가락을 특징으로 지닌다.
 관조와 절제를 생명과 노래의 모티프로 다룬다는 점에서 『花史記』의 표제시와 「보리밭」등의 시편도 주목되는 업적이다. 『花史記』제4호는 「善花公主」와 「거울」등에서 본 명암의 모티프를 활용하며 생명과 노래의 연관을 다룬다.

   꽃밭에는 오히려 향그런 불길
   불이 타오르고 있다
   오랜 세월의 흐름을
   순수한 어둠 속에서 해를 닦아
   꿈 속의 원시림을 밝히고 있다
   어둠 속에서 밝게 피는
   한 잎 두 잎의 웃음
   웃음의 이파리가 날리는 숲
   밤을 먹은 작은 새들이
   금빛 햇발을 몇 개씩 물고 있다
   황홀한 아침이면
   고운 노래가 울려 퍼지고 있다.

 이곳의 「어둠」은 생명의 개화와 발현을 위한 예비단계인 만큼 적극적 의의를 지닌다. 어둠은 생명의 모태인 셈이다. '어둠 속에서 밝게 피는 / 한 잎 두 잎의 웃음 / 웃음의 이파리가 날리는 숲'은 생명의 주기 전체를 긍정하고 있다. 어둠과 빛은 생명과 죽음처럼 서로를 보충하는 관계이다. '밤을 먹은 작은 새들이 / 금빛 햇발을 몇 개씩 물고 있다'에 담긴 정조와 이미지는 귀중한 생명의 의의를 '어둠'과의 연관 속에 긍정한다는 점에서 「거울」의 '어둠이 짙을수록 더욱 똑똑히 보이는 / 내 영혼의 뼈와 살의 무늬들'의 시상과 동질성이다. 또, 「善花公主」의 달빛 비친 강물의 이미지와 '금빛 가락 은빛 가락은 / 눈물 뿌리던 사랑'이라는 심회도 상기시킨다.
 「보리밭」도 계절감과 함께 자연의 인생론적 함축을 차분히 다룬다.

   가랑잎을 갉아 먹으며
   산자락을 휘돌아 온
   앙상한 뼈바람이
   풋풋한 흙 속의 한 알 보리를 흔들어
   잠을 깨우고 있었다.

 의인법으로 자연과 생명현상을 관조하며 '가랑잎'과 '한 알 보리'를 대조하고 '앙상한 뼈바람'과 '풋풋한 흙'을 대조한다. 이 시에는 '두견새 목청 틔이는 / 동지 섣달', '햇볕이 / 땡땡땡 울고 있었다', '찌르륵 찌륵, / 여치가 한낮을 걸르고 있었다' 등 소리와 노래의 모티프가 빈발한다.
 자연경관을 차분히 다룬 「보리밭」에는 이미지와 인생적 연상을 결합시키는 고양된 어조도 드러난다.

   대창을 든 병사들처럼
   갈구리가락을 밭쳐들고
   아이들이
   그을음없이 타는 油畵,
   황금벌판을 파도처럼 달려가고 있었다
   미친 듯한 반 고호의 自由
   넓은 밭마다 가득 차고 
   한 켠으론 黃土ㅅ빛 고개가 보였다
   半萬年 오른 고개가 보였다.

 익은 보리밭의 풍경을 다채로운 비유와 引喩로 묘사한 이 구절에는 반 고호의 비극적 생애와 가난했던 한국의 삶에 대한 감회가 보리밭의 풍요와 아름다움과 합쳐서 강렬한 순간들을 이룬다.
 『花史記』에 공존하는 차분한 어조와 열정적 어조, 서술적 문체와 修辭的 문체, 객관적 敍景과 적절한 진술 등은 洪海里 詩의 다채로움에 기여하는 동시에 자연과 사물의 관조와 인생론적 열정간의 밀접한 연관을 시사한다.
 관조와 열정의 연관을 『우리들의 말』(1975년)에 실린 세 편의 시에 근거해 좀더 살펴보자. 「텅 빈 귀」는 진술에 기울면서도 시대상황에 대한 짙은 암시성을  지닌다. '우리는 귀를 막고 우리는 들으려 한다', '죽은 소리는 소리가 아니다', 등의 진술을 담고 있지만 자연경관에 의거해 시대적 진실을 표현하는 만큼 쉽게 포착되지 않는 애매성이 있다.

   밤낮없이 시장기가 드는 나의 귀 
   바람소리 폭포소리만 귓전을 친다
   우리는 귀를 막고 우리는 들으려 한다
   죽은 소리는 소리가 아니다
   천 리 만 리 밖에서도 가득 차오는
   산 소리가 하늘빛 깨치면서 
   산빛으로 물빛으로 달려가고 있다
   죽은 꽃이 떠가는 허공 중으로
   목금을 찍고 있는 까치 몇 마리
   새벽녘이 그들의 광장이라면
   사내야 눈감고 달려가는 사내야
   길이 보이느냐 죽음으로 가는 길이
   텅 빈 귀에 난 길을 타고
   달려가는 바람소리는 뜨겁다.

 첫줄의 '밤낮없이 시장기가 드는 나의 귀'는 진실을 갈구하는 심경을 표현하지만 '우리는 귀를 막고 우리는 들으려 한다'가 암시하듯 진실을 갈구하는 마음에게는 '산 소리'를 제대로 들을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결론부의 '눈감고 달려가는 사내'는 '우리는 귀를 막고'의 경우와는 달리 온갖 위험을 무릅쓰고 정도를 달려가는 이로 해석된다. 결구의 '텅 빈 귀'도 진실을 향해 열려 있는 겸허한 정신을 뜻한다. 둘째 줄의 귓전을 치는 '바람소리 폭포소리'가 습관적인 것이라면 결구의 '달려가는 바람소리'는 진실을 추구하는 정신을 표상한다, '하늘빛' '달빛' 눈빛'도 새벽녘의 '까치' 울음과 함께 자연경관의 윤리적 함축을 지닌다.
 진술의 암시성에 의존한 「텅 빈 귀」에 비해 「메밀꽃」은 서경에 기운다. 달빛 속의 「메밀꽃」의 심상을 비유와 연상에 의해 제시하는 이 시에서도 「텅 빈 귀」에 암시된 명암의 모티프가 활용되고, '목소리'의 비유에 사물의 윤리적 함축을 담는다.

   소복을 한 젊은 女子가
   달빛과 달빛 사일 오가며
   天上에서 바래인 玉洋木 한 필을
   山脚에 펼쳐  널고 있다
   겨드랑이 아래로 사태지는 그리움
   저 서늘한 불빛으로 달래이며
   천년을 사루어도 다 못할 情을
   하얀 꽃으로 피우고 있다
   달이 이울면 산이 쓸리고
   반쯤 젖어 흔들리는 고운 목소리
   알몸의 어둠을 하얗게 밝히고 있다.

 이 시에는 조용한 사물 관조와 함께 '그리움'의 모티프에 근거한 감정이입과 열정이 느껴진다. '天上에서 바래인'과 '저 서늘한 불빛으로 달래이며'에는 초월과 절제의 정신을 긍정하는 심경이 암시되어 있고, 바람에 흔들려 울려오는 '반쯤 젖'은 '고운 목소리'도 인고와 슬픔의 의의를 상기시켰다. '알몸의 어둠을 하얗게 밝히고 있다.'는 결구에는 이미지와 심경의 절묘한 융합이 주목된다. 어둠을 극복하는 情恨의 힘을 긍정한다는 점에서 이 시의 기풍은 『投網圖』 시편들의 전통적 정서와 『花史記』의 시대적 고뇌와 열기를 배합한 것이라 하겠다.
 「메밀꽃」에 다루어진 '그리움'의 모티프는 「그리움을 위하여」에서는 「텅 빈 귀」의 경우처럼 시대적 문맥 속에 취급된다. 『우리들의 말』(1977년)을 전후하여 쓴 연작시 「武橋洞」의 詩風을 상기시키는 이 시는 도회적 삶의 소외와 전원의 순수성을 대조한다. 전원의 밝음과 평화가 회상된 정서인 반면 도회적 소외는 극복해야 할 상황이다.

   서로 스쳐 지나면서도
   만나지 못하는 너를
   보고 불러도 들리지 않는 너를
   허망한 이 거리에서
   이 모래틈에서
   창백한 이마를 날리고 섰는 너를 위하여.

   네 속에 있는 나를
   내 속에 있는 너를
   우린 벌써 박살을 냈다.

   아득한 나의 목소리
   아득한 너의 목소리
   아득한 우리 목소리.

 만남과 교류가 없는 도회적 삶을 '너'와 '나'의 관계로 묘사한 서두의 구절은 '너'의 모습이 '나'의 모습일 수도 있음을 암시하고, 후속되는 구절은 공동체 의식의 결핍이 자아망각에 연유한 것임을 묵상케 한다. 서로에게 닫지 않은 인간의 '목소리'에 대조해 話者가 회상하는 것은 전원의 음향이다.

   흙벽에 등을 대고 듣던
   새벽녘 선한 공기를 찍는 까치소리
   한낮 솔숲의 뻐꾸기 울음
   그믐밤 칠흑빛 소쩍새 울음.

 하루의 리듬에 따라 자연의 소리에 귀기울이는 집중된 정신이 훤소한 도심의 산란한 정신에 대조된다. 결구에서는 '보리푸름 위 종달새 밝은 봄빛과 / 삘기풀 찔레꽃의 평화를 위하여' 도회의 '묵은 시간'을 떠나야겠다고 결심한다. 도회적 삶의 부정적 특성에 반하여 긍정된 전원의 특질은 순수와 소박함에 근거한 기쁨과 평화이다. 이전에 쓴 평문에서 필자는 이 점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이 시는 이렇게 소외와 단절의 도회생활의 단순성을 대조시킴으로써 원초적 순진성을 향한 그리움을 표현하고 있다. 도회생활의 平面에서 인간관계가 회복될 수 있겠는가의 문제는 회피되고 있는 셈이다. 단지 불만스러운 상황의 확인만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도회생활에서의 인간관계의 회복은 압축을 지향하는 서정시의 범위 속에는 자세히 다루기가 어렵지 않을까 한다. 이후의 洪海里 詩는'그리움'의 주제를 계속 추구하며 자연물상의 윤리적 함축에 관련지어 바람직한 삶의 성격을 규명한다.
 1980년 이후의 여러 시편에는 『대추꽃 초록빛』(1987년)과 『청별』(1989년)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도회적 삶의 성격을 다룬 『武橋洞』(1976-1978년)에 대조해 자연을 취재하는 빈도가 잦아지며, 지역의 풍물과 삶을 집중적으로 다룬 『淸別』의 「甫吉島 詩篇」과 「牛耳洞 日誌」에도 자연친화적 정조에 근거해 인생론적 명상을 펼친다. 1980년경의 「詩」는 詩作과 자연친화의 상관을 다룬다는 점에서 주목되는 작품이다. 2부로 구성된 「詩」의 제1부를 살펴보자.

   슬픔보다 더 순수한 언어로
   말의 집을 이루고자 했었다.

   가장 아름답고 힘있는
   살아 있는 말로.

   이리저리 엮고 얽어놓으면
   별이 보이고
   새들도 날아와 우짖거니 했으나,

   단지 
   지붕을 인
   벽일 뿐이었다.

   향그런 흙과 바람
   시원한 내가 흐르고
   햇빛이 찬란히 비춰주기만 한다면, 

   새싹이 트일 일이었다.

 평이한 문체로 시적 포부를 개진한 이 작품은 시의 생동성과 함께 자연친화의 주제를 강조한다. 그러나 이러한 포부와 성과에 대한 반성은 「善花公主」「花史記」「보리밭」 등의 세계에 일부 실현되었다는 점을 생각할 때 시를 존재의 '집'으로 삼으려는 지속적 관심의 표출로 짐작케 한다. '슬픔보다 순수한 언어'는 전통적 情恨과 시대적 고뇌를 포함하지만 '향그런 흙과 바람 / 시원한 내' 등의 세속은 주로 인간정신에 끼치는 자연의 유익한 영향을 암시하고 있다.
 「詩」와 같은 시기에 발표된 「風蘭」과 「쏜살이 되어 날아가는 혀」는 각각 사물의 관조와 역설적 진술로 언어의 표현성과 진실과의 연관을 다룬다는 점에서 보충하는 작품들이다. 「쏜살이 되어 날아가는 혀」에서는 언어의 시대적 기능을 헤아린다. '바람에 날아가는 말에는 날개가 달렸는가 / 물에 떠가는 말은 오리발을 달았는가 / 흙 속의 말에는 뿌리가 돋아났는가'에 통렬한 역설을 담은 후 '말'의 효능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아무리 말이 잘 달린다 해도
   이르지 못하는 나라
   아무리 말을 잘 닫게 한다 해도
   이르지 못할 나라.

 이 구절의 첫 문장이 理想의 표현과 현실의 간극을 유념한 것이라면 둘째 문장은 시적 염원과 이상의 거리에 대한 깨달음으로 해석된다. 또, 도입부와 결구에 '나무는 무슨 말을 하는가 / 바위는 무슨 말을 하는가'의 說疑文을 마련함으로써 자연의 예지에 귀기울이는 겸허의 덕을 묵상하고 있다.  
 '물빛 여자 속살같은 향을 날리는 / 한 채 젖빛나라 이루고져'로 시작되는 「風蘭」은 관조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자연의 슬기를 열렬한 어조로 긍정한다.

   하늘 위에 다리 뻗고
   안개 비 젖은 바람 전신으로 맞으며
   깎아지른 벼랑 바위
   무너지는 나무등걸
   서풍 북풍에 흔들리면서
   반만년을 오로지 흔들리면서
   달빛같은 숨결을 이어왔거니
   남해 서해 까물치는 쪽빛 하늘
   싱싱하게 빛나는 파도의 입술
   소금기 가신 햇살의 음향과 색채
   솜털구름 같은 꽃을 피우리라
   바다와 하늘과 바람으로
   찬란한 물새들의 울음을 엮어
   젖빛 울음나라 이루리라
   젖빛 울음나라 이루리라.

 「風蘭」을 키우는 환경과 그 생리를 취급하는 동시에 '서풍 북풍에 흔들리면서 / 반만년을 오로지 흔들리면서 / 달빛같은 숨결을 이어왔거니'에는 민족적 삶의 성격에 대한 감회도 담아 장구한 세월에 걸친 인고의 삶을 따스히 긍정하고 있다. 이러한 감회에 따라 '깎아지른 벼랑 바위 / 무너지는 나무등걸' '솜털구름 같은 꽃' '젖빛 울음나라' 등의 세목도 인생론적 함축을 지니게 된다.

 『대추꽃 초록빛』(1987년)의 「그리움」과 「너를 위하여」 등의 시에는 『淸別』(1989년)에도 이어지는 '그리움'과 비어 있음'의 모티프가 빈발한다. '그리움'은 존재와 理想을 향한 갈망이며, '비어 있음'은 세속의 욕심과 산란함에 대조되는 求道와 虛心을 뜻한다. 또, '그리움'과 연관되어 존재의 秘意를 뜻하기도 한다. 
 「그리움」은 사물의 존재론적 의의와 관련하여 詩作의 충동을 '그리움'으로 정의한다.

   대추꽃의 초록이나
   탱자꽃의 하양,  

   들장미의 빨강이나
   석류꽃의 선홍,

   아니면
   싸늘하나 따스히 녹는,

   아이스크림 같은
   안타까움 한 줌.

 사물의 형태와 색깔에 대한 흥취와 함께 일반성을 유념하는 마음에 '안타까움'이 있다. 그러기에 詩作은 시간 속에 소멸하는 존재를 영속적인 형식에 보존하려는 충동인 셈이다.
 「그리움」과 같은 관심을 보이는 「너를 위하여」는 사물의 인간적 연상을 다룬다. '잔디풀 잠깨는 길가 /키 작은 오랑캐꽃 같은 여자', '눈 덮인 온실 속 / 난초꽃 같은 여자' 등의 세목을 거쳐 다음의 결구에 이른다.

   산등성이 홀로 피어 있는
   들국화 같은 여자,

   아지랑이 같고
   백지에 내리는 눈발 같고

   그래서 반쯤 비어 있는
   그런 너를 위하여.

 사물의 연상과 흥취를 다루며 잠시 머물다 소멸되는 존재의 비의를 묵상한다. '반쯤 비어 있는'에는 존재가 배타한 허무에 대한 연민과 비감이 느껴진다.
 「蘭」에서는 사물의 연상을 일련의 인간적 비유로 제시한다. '천년 / 면벽한 비구의 화두', '영혼의 / 녹색 언어로 읊은 / 서정시' 등을 거쳐 인생론적 개괄에 이른다.

   푸른 마당에 벌이는
   끝없는
   춤사위

   촛불 오르는 동안
   풀어야 할
   매듭이다.

 「蘭」의 형상과 색채에 근거한 상념의 긍정이 있고 유한한 존재의 秘意에 대한 감회도 미묘히 표현되어 있다.
 「蘭아 蘭아」에서는 역설, 비유, 진술 등의 다채로운 기법으로 존재의 인생론적 명상을 펼친다. '뼈가 없는 네게는 / 뼈가 있는데' '뼈가 있는 내게는 / 뼈가 없구나'의 힘찬 파라독스로 시작해 '햇빛으로 타는 침묵 / 햇빛으로 엮는 약속이 있다.' 같은 관조에 이른다. 사물의 윤리적 함축과 함께 생명의 威儀를 묵상하는 심경이 부각된다.
 『대추꽃 초록빛』에는 초기시의 전통적 소재에 이어지는 「百結歌」 「온달」 등의 시편이 있다. '온달은 큰 달 / 보름달인데 세상이 어둡어요'로 시작되는 「온달」은 '이 밤도 피리를 불어 / 저 무수한 별들을 빛나게 하고 / 길을 떠나야지요'라는 각오로 詩作의 윤리적 의의를 강조한다.
 「百結歌」에서도 '백결'의 연상에 착안하여 '가슴이 비어 있는 / 이 시대를 위하여' '천지간 소리란 소리 / 다 모아서 곡을 지으리라'는 포부를 피력한다. '가슴이 비어 있는 / 이 시대'는 허욕에 사로잡힌 세태의 비판이지만 노래를 짓는 일은 이상과 허심을 향한 줄기찬 노력이다.

   아아 더 먼먼 사람의 나라
   비어 있음을 위하여
   이 가슴을 다 쏟아
   내 영혼의 모음을 다 모아
   곡을 지으리라
   곡을 지으리라.

 '아아 더 먼먼 사람의 나라'와 '비어 있음을 위하여'는 물질적 가치 대신 영적 가치를 존중하는 인간사회를 향한 염원이다. 「百結歌」의 진지한 어조는 이 점에서 「쏜살이 되어 날아가는 혀」의 신랄한 역설에 대조를 이룬다.
 『淸別』에 실린 「異說 놀부論」도 전통적 소재의 활용으로 '그리움'의 모티프를 다룬다. 『흥부전』의 설화와 해학이 현실의 질곡을 벗어나려는 서민의 꿈에 관련된 것임을 유념하여 '파랑도', '금빛 그리움' 등의 색채의 상징으로 理想界를 가리킨다.

   그리운 섬 그대여
   비유가 없는 이 시대
   풍자가 없는 이 나라
   바닷속에 숨었다 드러났다 하는
   파랑도 같은 그대
   그리운 섬이여.

   지리한 장마끝
   하늘 터지며
   반짝이는 웃음소리
   언뜻 스치는
   낯익은 얼굴
   금빛 그리움이다.

 '비유'와 '풍자'가 이상과 현실의 간극을 헤아리는 정신의 긴장에서 생성됨을 환기하며, '파랑도'와 日光의 이미지로 순수와 광명의 세계를 楮念한다.
 『淸別』의 압권은 「甫吉島 詩篇」과 「牛耳洞 日誌」 연작이다. 둘 다 자연친화적 情操에 근거해 인생론적 명상을 펼친다는 점에서 補足的 작품들이다. 지역의 삶과 풍물을 집중적으로 다룬 두 연작은 「武橋洞」 연작의 실행성에 대조해 평명한 문체의 구사와 구체적 표현의 증대를 보인다. 「보길도 시편」은 「투망도」에 도입되어 빈번히 다루어진 '바다'의 면모가 집중적 표현과 점층적 효과를 얻은 작품이며, 「牛耳洞 日誌」는 「武橋洞」의 시대적 비판에 대조해 자연친화와 함께 바람직한 삶의 성격을 다룬다는 점에서 보충적인 작품이라 하겠다.
 「甫吉島 詩篇」에는 「시인」「바다읽기」 등의 부제가 암시하듯이 사물의 관조와 시작의 연관을 다각적으로 다룬다. 「甫吉島 詩篇·1」은 '시인'을 이렇게 정의한다.

   바다에 오면
   바다를 품고
   바다를 길러
   바다가 되고,
 
   섬에 오면
   섬을 품고
   섬을 길러
   섬이 되는 사람.

 언어의 절약과 점층적 리듬이 주목되는 이 시는 평명성과 함께 담시성을 지닌다. 바다와 섬을 기른다는 표현은 의인적 연상과 더불어 바다가 함축하는 바를 오랜 기간 명상하는 이의 심경을 드러낸다. 시는 존재의 명상을 통한 친숙화 과정이라 할 때 시적 표현은 대상과의 동일화라는 측면을 지닌다.
 「바다읽기」(제5호)는 「시인」(제1호)의 경지에 표면상 반대되는 상황을 언급한다.

   바다를 읽고 싶어 그 앞에 섰더니

   바다가 먼저 나를 읽어 버렸다

   갑옷을 입고 그 앞에 서서

   나는 마음을 풀 수가 없었다.

 「바다읽기」의 제목 자체가 성급한 욕심의 오만성을 암시한다. '바다가 먼저 나를 읽어 버렸다'는 의인적 관점으로 과욕을 깨달은 심경을 시사한다. 사물의 착실한 이해는 겸허한 마음과 지속적인 체관을 요구한다. '마음을 풀 수가 없었다'는 고백으로 친숙한 과정 이전의 긴장과 생소함을 지적한다. 결국, '바다를 읽고 싶'은 성급함 대신 '바다를 품고 / 바다를 길러 / 바다가 되'는 동일화 과정을 겪어야 한다.
 「바다에 오면」(제9호)은 보다 조화로운 상황을 다룬다.

   누구나 이곳에 오면
   눈이 뜨이고 귀가 열린다

   눈에 뜨이는 것 귀에 들리는 것
   모두가 다 시요

   만나는 사람마다
   모두가 다 시인이니

   눈먼 사람 바다로 오라
   귀먹은 사람 바다로 오라

   이곳에 오면
   온전히 살아 있음이 부끄럽다.

 일상적 자아의 습관을 벗어 버린 순수한 마음은 새로운 개안과 각성을 가져온다. 모든 사물과 모든 사관을 '시'와 '시인'으로 보게 되는 심경은 순수한 마음의 회복이 부여하는 쇄신된 감수성의 결과이다. 여기에 대자연이 안겨 주는 유익한 영향이 있다. 결구의 '온전히 살아 있음이 부끄럽다'는 진술은 이전의 '온전'할 수만은 없엇던 삶의 반경이자, 특정한 환경이 안겨 주는 개안과 각성이 영속적일 수는 없다는 깨달음도 포함한다. 생활인은 대부분의 시간, 일상적 타성의 무게 아래에 놓이는 까닭이다.
 「牛耳洞 日誌」 연작에도 노래와 말의 모티프가 빈발한다. 허심과 노래의 상관을 다루는 「어느 날」(제3호)은 삶의 시름을 자전적 맥락에서 소묘한 도입부에 이어 자연경관의 인생론적 의의를 묵상한다.

   머잖아 이 마을에 눈이 내리면
   백운대 인수봉이 한결 높으리
   바람소리 더욱 높아 귀를 잃고
   구름장 팔을 휘휘 내저으며
   비인 가슴으로 노래하리라

 '백운대 인수봉'은 초월의 상징이며 '귀를 잃고', '비인 가슴' 등의 부정적 연상의 어구도 인생의 불가피한 조건에 대한 허심과 달관을 시사한다.
 「山行」(제4호)에도 '문득 새소리에 멍청히 나를 잃어버린다'고 한 후 '참나무 마른 잎'의 소리에 귀기울이는 심경을 표현한다.

   다시 내릴 길을 따라
   참나무 마른 잎의 어눌한 말소리
   더듬더듬 들으며
   산을 오른다

 「다시 내릴 길」은 '어디로 가고 있는가', '내가 무엇인가' 등의 본질적 의문이 제기된 이 시의 문맥에서는 자연의 유구한 질서 속에서 생명의 주기를 겸허히 묵상하는 인생론적 함축을 지닌다. '어눌한 말소리'. '더듬더듬 들으며'의 부정적 수식어로 자연과 인생의 이치를 곰곰이 헤아리는 심경을 드러낸다.
 「백운대 인수봉을 보며」(제6호)도 자연과 인간의 삶을 대조하며 靜觀과 虛心의 순간을 다룬다.

   나무가 나무로 서서 숲을 이루고
   바위가 비로소 바위로 서는
   이곳에 서면
   저 시장의 개미 떼 벌 떼
   그들의 눈썹 위로
   새들을 날리고 서서
   천 마디 만 마디의 말
   침묵으로 이르는
   바위 아닌 산을 본다
   산이 아닌 거인을 본다.

 자연의 전체성 속에 자리잡은 물상의 本然을 묵상한 후 이를 훤소한 도심과 대조한다. 다시, '바위 아닌 산', '산이 아닌 거인' 은 사람들의 소모품인 열정에 대조되는 자연의 영속성과 의연함과 초월성을 강조한다.
 『投網圖』에서 『淸別』에 이르는 20여년 간의 洪海里 詩의 전개는 詩作의 모티프를 다룬 작품의 빈도로 다채로우면서도 일관된 관심을 드러낸다. 한국적 전통에 대한 첫 시집의 관심에  『花史記』로부터는 자연관조 및 시대 비판을 추가함으로써 시세계를 크게 확장한다.  『花史記』의 자연과 시대에 대한  동시적 관심은 사물의 관조와 인생론적 열정간의 밀접한 연관을 주목케 하며, 이후의 시들도 자연친화의 정조와 함께 존재론적 명상과 윤리적 성찰을 펼친다. 『우리들의 말』과 「무교동」 연작에 강화된 시대상황에의 관심은 『대추꽃 초록빛』과 『淸別』에 이르러서는 '그리움' 과 '비어 있음' 의 모티프를 통해 관조와 허심과 이상의 주제로 심화된다. 또, 자연친화적 정조와 인생론적 명상을 결합시키며 바람직한 삶의 성격을 규명한다.
 『投網圖』의 「善花公主」에 피력된 시적 포부와 『花史記』의 「詩를 쓰는 理由」에 취급된 시상과 표현의 주제는 점차 시작의 존재론적 윤리적 의의의 성찰로 강화되고 드디어는 자연과 인생의 이치를 헤아리는 허심과 달관에 이른다. 초기의 관심을 새로운 문맥에서 다루기도 한다. 『대추꽃 초록빛』의 「百結歌」, 「온달」과 『청별』의 「異說 놀부論」등은 첫 시집에 도입된 전통적 소재의 활용으로 시작의 윤리적 의의와 理想과 虛心의 경지를 다룬다. 洪海里 詩는 이처럼 생명과 노래의 연관에 대한 줄기찬 명상으로 자연과 시대와 인생의 양상들을 폭 넓게 조명한다.

                                              『現代詩와 傳統意識』(문학예술. 19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