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평론·시감상

<문학평론> 전통의식의 지속과 전환의 의미 / 병든 지구 : 유시욱

洪 海 里 2005. 11. 29. 10:18
전통의식의 지속과 전환의 의미/유시욱
 

전통의식의 지속과 전환의 의미

                 柳時煜(문학평론가)
                        


     1
   「진단시」는 동인 시집으로 1982년 3월에 창간호를 낸 이래 지금까지
10년이 넘게 매년 한두 회씩 간행하여 이번 호로 총 18집에 이르고 있다.
그 동안 많은 해설자나 비평가 혹은 독자들의 평을 통해서 동인들의 활약
상이나 동인지로서의 위상이나 색깔이 밝혀졌으리라 본다.
   작품에 대한 촌평에 들어가기 전에 먼저 동인지에 대한 일반적인 성격
을 잠시 살펴보기로 한다.
   동인지의 기능적 특성은 대체로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는
단순히 발표할 지면을 제공하는 것, 둘째는 독자들에게 참신한 감각을 
환기시켜 개성 있는 실험시를 선보이는 것, 셋째는 둘째 번의 개체적 
성격을 한데 묶어 유형화 하는 ‘에꼴’을 형성하는 일이다.
   한국문학사는 동인 문학으로 출발하여 광복 이전은 물론 그 후 한참
동안 그들의 영향력은 문단의 흐름을 좌우하다시피 했다. 그리고 절대
적인 지면이 동인 형성의 요인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수많은 동인
들이 부침을 거듭했지만 문학적 신명을 같이 하는 사람들로 색깔 있는 
에꼴을 형성했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작품 경향 상으로는 
순수와 공리의 대립적 성격에서 서정주의와 프롤레타리아니즘이다. 
모더니즘을 표방하는 동인군들이 난립했고 그 인적 구성은 즉흥적이고 
무작정한 이합집산식이 아니고 때로는 문학적 신념을 두고 열띤 토론 
끝에 소신껏 탈퇴와 가입을 분명히 한 사례를 불 수 있다. 그러나
근래에 와서 동인지는 위와 같은 집합적 개성이 없는 사화집의 성격을 
크게 못 벗어나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종래의 
동인지 개념을 부정, 반박하는 목소리도 있다. 즉 오늘날같이 다양한 
사회 구조 속에서 동인지 문학이 획일성을 요구하는 에꼴 일변도로
존재할 필요성이 없고 오히려 고착된 에꼴은 시인의 개성이 상실되고
동인지의 질을 저하시키는 요인이 된다는 것이다. 문제는 에꼴의 의미를 
획일화된 문학적 신념이다. 전형적인 양식 속에 자유분방한 시인의 
개성을 가두어 두는 방향으로 해석하는 데 있다. 동인지의 특성은 요약
하면 보편 속의 개성이다. 어차피 한 시대의 작품을 전반적으로 이해
하기 위해서는 국문학사의 시대 구분 만큼이나 장르 분류가 어쩔 수 
없이 중요성을 띠는 것은 사실이다. 특히 요즈음 우리 시단에서 남용되는 
듯한 인상마저 주는 시의 하위 장르 분류도 그런대로 필요할 수밖에 
없다. 가령 해체시, 상황시, 민중시, 노동시, 도시시, 일상시, 선시, 신서정시, 
형이상학시 같은 용어는 소재나 주제 혹은 표현 방식을 기준으로 분류한
것인 만큼 시단의 창작 추세를 가늠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개인
시집과는 달리 그룹성을 띤 동인지가 위의 장르적 성격을 규정하는 데 
더 적극적이고 실효성이 큰 역할을 담당할 수 있다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평단의 일각에서는 90년대의 시단은 경향상의 주류가 부재한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 즉 80년대 후반부터 중심 세력이 퇴조하고 시적 개성이 상실
되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어쩌면 동인지의 침체된 활동 상황과 
맞아떨어지는 현상으로 볼 수 있다. 그것은 동인지가 문학 표현의 실험실
이라는 사실을 전재로 할 때 오늘의 동인지가 실험 정신의 결여로 해서 
문학적 영향력을 상실했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최근의 전반적 상황과는 달리 10여년에 걸쳐 동인 공동 관심
사에 대한 동질성 창출이라고 하는 보편적 테마를 내걸고 동인 활동을
간단없이 지속하고 있는 진단시 동인들은 상당한 주목의 대상이 될 수 
있다. 그들은 주로 전통적 소재를 현대적 감각으로 상상력을 재련한다는 
소위 신보수주의를 표방하고 전통성과 혁신성을 조화롭게 수용하는 것을
시적 의장(意匠)으로 삼는다. 한국적 사상이나 사고의 양식 및 한국적 
전통 이미지를 현대의 다양하고 복잡한 문화적 토양 속에 형상화 한다는 
것은 그 성과 여부를 떠나서 고무적인 사실이다. 문제는 그들이 내건 
화려한 캐치프레이즈와는 달리 실천상 여러 가지 장애적 요소가 한계점
으로 가로막고 있다는 사실이다. 가령 테마를 ‘온달’이나 ‘동동’이나 ‘서동’
이라고 했을 때 단순한 회고적 감각이나 기억의 재생이 아니고 현대의 
문화적 토양에 이식하기 위해 해체와 생성의 상상적 삼투작용을 거쳐야 
한다고 할 때 그것이 용이한 작업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칫하면
저수준의 이미테이션이나 패러디에 머물기가 쉽다. 이 말은 이미지의 
해체와 재창조는 시인의 정서적 반응만이 아니고 문화 전반에 대한 
역사적 인식을 필요로 한다는 말도 내포되어 있다.
   이러한 인식의 차원과는 별개의 사실로 테마의 선택에서 제17집과 
제18집에서 중대한 변화를 보이고 있다. 그것은 종래의 문화적 전통적 
소재와는 별개의 소재를 선택했다든가 아니면 그것을 폐기하고 후기산업
사회의 메커니즘이 지배하는 공간 속에 의식의 탈바꿈을 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변화는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것은 앞에서 지적했듯이
문화적 전통 소재에 대한 현대적 의미를 창출하지 못하고 회고적 서정성에 
안주하려고 할 때 표현의 한계성에 부딪칠 수밖에 없다는 부정적 시각과
시인의 정신을 압박해 오는  거대한 현대적 메카니즘에 대한 최소한의 
본능적인 방어 의식이나 빈사상태의 인간을 구제한다는 필연적 사명감
이라고 할 긍정적 시각 어느 쪽일 수 있다. 이는 다음과 같은 시적 
명제의 선택과 관련된다.
   보통 철학적 명제이면서 시적 명제로도 적용시켜 볼 수 있는 것으로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라고 하는 인식적 방향으로,
지식과 관련되는 측면이고, 둘째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하는 윤리적/사회적
방향으로, 사회적 당위성에 관련된다. 셋째는 ‘무엇이 흥미를 유발하는가’
하는 것으로 리비도적 미학적 방향으로, 이는 본능적 순수성에 근거한다.
이 세 가지 명제는 충분히 구별될 만한 성격의 것은 아니다. 지식(인식)은 
도덕적 당위에 의해 제재를 받지 않을 수도 없고 윤리적/사회적 명제는
직관적 존재론적 결정이나 선택이 아니고 인간 존재의 당위적 실체가 무엇
이란 것과 우리의 사회적 삶의 구조에 대한 엄격한 지식을 포괄한다. 다시
말하면 시를 포함한 예술은 윤리적/ 사회적인 것으로부터 첨예하게 분리될
수 없고 오히려 그것의 주요한 매체가 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윤리적 
사회적인 것은 인식적인 것으로부터 쉽게 구별되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예술은 사회적인 지식의 형태이며 어떤 규범적인 윤리적 기틀 안에서 제어
당하기 때문이다. 이 말은 예술이 인식적 기능과 윤리적 효능을 같이 
가지고 있다는 뜻도 된다. 진단시가 테마의 방향전환을 시도한 것은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을 것 같다. 말하자면 전통적 사실이나 사상에 
대한 인식적 방향과 미학적 방향에서 부분적(두 가지 테마를 동시에 취하는 
경우)으로나 아니면 전적으로 윤리적 당위적 방향으로 궤도 수정을 했다는 
것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이것은 현대가 안고 있는 문화적 병폐와 물질
문명의 악조건이 선택이나 회피의 여지가 없이 치명적인 압력을 가해오는
데 대한 거의 반사적으로 작용하는 위기의식에서 발단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동인들의 테마시 <병든 지구>는 물질문명으로 해서 
오는 현대 사회의 딜레마가 그것을 통해 이해되는 분열과 불협화음까지를
기꺼이 수용하는 포스트모더니즘적 공격성은 띠지 못했다 해도 대체적으로 
소극적 방어적 현상은 띠고 있다고 본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절망적 
위기의식의 바탕 위에서 사실적인 징후 진단 형식을 취하든가, 아이러니와
시니시즘의 기법으로 숨은 공격 형식을 취하든가, 아니면 섬세한 비극적 
서정으로 방황하기도 하고 현실 극복의 에너지원을 자연에서 구하는 전통적 
서정 형식을 취하고 있다는 것이다.

     2
   洪海里의 시는 앞의 林步의 경우와 아주 유사하게 테마시와 일반시의 
성격이 확연히 구별될 뿐 아니라 테마시에 임하는 시인의 센스나 감정이나 
어조 혹은 의도도 아주 유사하다. 말하자면 치고 빠져나가는 행위의 성격을 
띤다. 역겨운 것에 대한 돌팔매질을 하고는 빠져나와 조용히 거닐면서 
자연과 인생을 관조하는 격이다.

     묘비명

     외롭고 쓸쓸한
     빈 꿈을 꾸고 있는
     지구
     여기 잠드노니,

     이제 이 비석도 삭아 내리리라
     코도 떨어지고
     음부도 썩어 내리고
     발바닥도 무너지리라

     깰 수 없는
     죽음의 잠 속에
     빠지리라

     흔한 것이
     귀한 줄 모르는
     인간들아

     잘 먹고 
     잘 살아라

     잘코사니!

   테마시 <묘비명>은 지구의 종말을 초래한 인간들을 매도하고 저주하는데
격한 감정과 어조를 구사한다. 그러다가 <기러기 하늘에 달이 오르고>에 오면
앞의 가쁜 호흡은 조용히 가라앉으면서 침울한 정조의 터널을 거쳐 극적으로 
떠오른 달빛으로 가슴을 환히 적신다.

     바람결마다 구름이 물드는
     가을도 가고

     말도 못하고 겨울을 맞아
     맨살로 터지네

     눈만 내놓고 우는 
     앙상한 밤에

     팽팽한 빗소리
     속절없이 젖는데

     무엇으로 마른 영혼을 가리우랴

     지상의 저 끝 어디쯤
     누가 등 하나 닦고 있는지

     기러기 하늘에 달이 오르고

     가슴마다 환한 불
     따뜻이 켜지네.

         <기러기 하늘에 달이 오르고>의 전문

   ‘말도 못하고 겨울을 맞아 맨살로 터지며’ 살아가는 메마른 영혼을 가리
우려고 하는 애정이나 절망의 땅 어느 한 끝에서 희미한 남포등의 불빛을
기대하는 심리는 <단풍나무>에서 순수를 증류하는 미의식으로 전이된다. 
시각과 청각을 공감각화한 단풍나무의 복합 이미지에서 인간적인 절규를 
읽을 수 있다.

     여름내 뜨거운 불잉걸로
     징징징징
     달이고 달인
     색깔을 모아
     지상의 말간 피로
     씻어 헹구어
     천지간에 목을 뽑는
     백조의 노래여
     늙은 창녀 같은 적막강산
     겨울이 가면
     다시 목을 뽑으리라
     푸르디 푸른
     빨갛디 빨간 목을.

       <단풍나무>의 전문

   <으악새>에서도 양 감각의 이미지는 자유자재로 구사되어 있다. 억새풀 
같은 흔한 소재에서 참신한 상을 끌어내기란 용이한 일이 아니다. 생명의
비단에서 굽이치는 구름길이나 바람길, 새 떼의 비상, 물보라 이는 파도, 
양 떼로 이어지는 시각적 표상과 단소소리와 기침소리, 울음으로 연결되는 
청각 이미지만으로도 비극적 상념을 조성한다. 추호의 사변적 진술은 물론 
묘사를 통한 수식적 언술도 배제되어 있다. 이미지가 감각적이면서도 지적 
요소를 모두 구비한다고 할 때 객관적 상관물의 선택은 지적 요소에 해당
하는 시인의 기지에 크게 좌우된다고 본다.

     바람에 일렁이는 은백의 머리칼
     아름답게 늙은 사람 고운 사람아
     저건 꽃이 아니라 차라리 울음이리
     낮은 곳으로 펼치는 생명의 비단이여
     구름으로 바람으로 굽이치는 만리길
     끊일 듯 들려오는 향기로운 단소소리
     가다가 돌아서서 넋을 잃고 바라보면
     수천 수만 새 떼의 비상이네
     물보라 피우는 능선의 파도이다가
     풀밭에 달려가는 양 떼이다가
     하늘로 날아오르는 쓸쓸한 그리움이네
     산기운 모아 뽑는 허이연 기침소리
     저건 꽃이 아니라 차라리 울음이네.

                  <으악새>의 전문

     3
   <병든 지구>라고 하는 제재의 성격으로 해서 시가 어쩔 수 없이 문명
비판적인 방향으로 흐를 수밖에 없지만 그 시각의 양상이나 언술의 태도는 
상당한 차이점을 드러내 주고 있다. 크게 보아서 동인들은 지구라고 하는 
환자의 증상을 진단하는 형식을 취했고 그 태도는 단순한 폭로에 그치거나 
직설적 매도 아니면 아이러니와 풍자가 곁들인 비유와 상징도 있고 그 밖에 
모더니즘의 기법이나 담담한 산문 형식의 알레고리를 구사하는 등 다양하다. 
문제는 인류 보편의 문화적 갭이나 민족 고유의 정신적 통로에 놓인 시대
적인 아폴리아를 어떻게 극복하느냐 하는 데 인식의 초점이 있다면 이번의 
<병든 지구>의 테마시는 폭로 아니면 매도 혹은 풍자라고 하는 공격형 
서정의 장치로 메카니즘의 병원체를 제거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고 할 수 
있다. 더욱이 그들이 서정주의를 지향하는 시인들이라고 할 때 오늘날 
같은 문화적 난세에 백의종군의 의미를 심었다고나 할까.
   그러나 이러한 시사성을 띤 테마는 제한된 인식이나 서정의 형식을 취하기 
쉽고 사고의 범주도 현재성을 크게 벗어날 수 없다는 일반적인 약점을 안고 
있다. 테마시가 일반적으로 갖는 본질적인 제한된 시각에다 이러한 테마의 
제한성 안에 계속 멈춰 있을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보수와 혁신의 조화를
표방하는 본래의 취지와 의미를 살리는 뜻에서 장기간 지속해 왔던 전통적 
소재의 의미 발굴에 다시 관심을 돌릴 것을 기대해 본다.

             진단시 18집 『지금 자궁은 정전중이다』(시문학사 19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