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갈피 속의 오늘]
1968년 남산에 ‘소월詩碑’ 건립
그의 시가 그러하듯이, 그 이름은 그 상실감으로 해서, 그 그리움으로 해서 절절하다.
소월, 그는 서른둘에 요절했으나 그 문학적 성취는 엄연하다. 유일한 시집 ‘진달래꽃’(1925년) 한 권으로 한국 시사(詩史)에 불멸의
위치에 놓였다. 그가 시를 쓰던 1920년대에 그 누구도 그에 미치지 못하였다.
외래 조류(潮流)가 화려하게 신시(新詩)를 ‘도금’하던 그때에 소월은 커다란 곡선을 그리면서 전통(傳統)으로 회귀했다. ‘가시리’와
‘정읍사’를 불러냈다. 종시 가누지 못할, 응어리진 정한(情恨)을 토해냈다. “소월은 고향이 부르는 소리에 쏜살같이 돌아온 귀향자와
같았다.”(서정주)
즐겨 애송되는 그의 시는 동요가 되고, 가요가 되고, 가곡이 되었다.
그는 애상(哀傷)의 이미지에 절어있지만 실상은 매웠다. 3·1운동 때 삐라를 가슴에 품고 앞장을 설 만큼 강단이 있었다. “소월은
순정(殉情)의 사람이 아니고, 어디까지나 이지(理智)가 승한, 총명한, 그리고 심독(心毒)한 사람이었다.”(김억)
어린 시절 집안은 부유했으나 ‘폐인 아버지’의 그늘에서 자라야 했다. 그것은 소월에게 원초(原初)의 어둠이었다. 아버지는 철도공사장의
일본인 목도꾼들에게 잔인하게 구타당해 정신질환을 앓았다.
그의 말년은 더욱 스산하다. 소월은 전답을 팔고 빚을 내 신문사 지국을 운영하였으나 파산하고 말았다. 이때부터 그의 내면은 참혹하게
일그러진다. 술로 지새는 나날이었다. “세기(世紀)는 저를 버리고 혼자서 앞서서 달아나는 것 같습니다.”
그의 사인(死因)은 분분하다.
스승인 김억은 그가 아편을 먹고 자살했다고 밝혔으나 당시 신문은 뇌일혈로 사망했다고 보도했다. 각기병으로 죽었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북한의 ‘문학신문’에 따르면 그는 죽기 전 일경(日警)에 불려 다니면서 ‘만주 망명’과 자살을 자주 언급했고, 그의 베개 밑에서 흰 약봉지가
발견됐다고 한다.
1968년 서울 남산에, 이제는 명물이 된 소월 시비(詩碑)가 세워졌다.
그는 남(南)에서나 북(北)에서나 시비를 세워 기리고 있는 거의 유일한 시인이다.
이기우기자 keywoo@donga.com
우리는 그를 그저, 소월(素月)이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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