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갈피 속의 오늘·동아일보

<책갈피> 김기림

洪 海 里 2005. 12. 30. 07:42
04/05/10

[책갈피 속의 오늘]

 

1908년 시인 金起林 출생

‘아무도 그에게 수심(水深)을 일러준 일이 없기에/흰나비는 도무지 바다가 무섭지 않다.//청(靑)무밭인가 해서 내려갔다가는/어린 날개가 물결에 젖어서/공주처럼 지쳐서 돌아온다….’

1930년대에 모더니즘의 ‘앞선 걸음’을 갔던 시인 김기림.

애송시 ‘바다와 나비’는 서구 이미지즘의 물을 한껏 들이켠 그의 면모가 여실하다. 당시 감상과 퇴폐에 전 한국시의 ‘굳은살’을 벗겨냈다. 그 시어(詩語)의 다채로움과 재기발랄함이라니.

그가 열어젖힌 우리시의 근대적 공간은 ‘魚族과 같이 新鮮하고 旗빨과 같이 活潑하고 표범과 같이 大勝’하였다.

“모더니즘은 문명의 아들이다. 우리 신시(新詩)에 비로소 처음 얼굴을 내민 도회의 자식이다. 문명의 뭇 면이 풍월(風月) 대신 등장했고, 모더니즘은 건축가의 설계 아래 자신의 언어를 지어냈다.”

어찌 임화와 김기림을 빼고 한국문학의 근대성과 아이덴티티를 논하랴.

“해방 이전 우리 비평의 최고 수준”을 이루었다는 임화의 리얼리즘 시론. 그리고 서구 모더니즘의 기예를 통해 한국 문학과 역사의 근대성을 굴착(掘鑿)해 들어갔던 김기림.

그러나 애석하게도 두 사람의 문학적 성취는 분단(分斷)의 굴절 속에서 맥이 끊기고 말았다. 미완으로 묻혔다. 김기림은 6·25전쟁 때 납북된다. 그는 절실히 근대를 갈구했으나 그 비극성을 예감했음인가.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의 발발은 ‘근대’, 그것의 파산을 예고했으며 위기에 선 ‘근대’의 초극(超克)이라는, 말하자면 세계사적 번민에 우리 젊은 시인들은 마주하고 말았던 것이다….”

그래서 일제하 식민지 지식인에게 ‘근대의 바다’는 수심도 알 길이 없고, 삼월에도 꽃이 피지 않는 무생명의 불모(不毛)의 공간으로 다가왔던 것이다.

‘바다와 나비’는 모더니스트의 슬픈 자화상이기도 하다. 그 스산한 내면의 풍경이다.

그는 ‘태양의 풍속(風俗)’에서 절규하듯 읊는다.

‘태양아/너의 사나운 풍속을 좇아서 이 어둠을 깨물어 죽이련다.//…태양보다 이쁘지 못한 시. 태양일 수가 없는 서러운 나의 시를 어두운 병실에 켜 놓고 태양아 네가 오기를 나는 이 밤을 새워가며 기다린다.’

이기우기자 keywo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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