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갈피 속의 오늘·동아일보

<책갈피> 봄봄/김유정

洪 海 里 2006. 1. 11. 19:37

[책갈피 속의 오늘]

 

1908년 소설가 김유정 탄생

[동아일보 2006-01-11]

1908년 1월 11일 소설가 김유정(金裕貞)이 태어났다.

그는 웬만한 천재의 조건을 갖춘 작가였다. 스물두 살에 연희전문학교에 입학하자마자 그만두면서 “더 배울 것이 없어 자퇴한다”고 했다. 스물일곱에 조선중앙일보 등 2개 신문 신춘문예에 동시에 이름을 올리면서 화려하게 등단했다. 이상 임화 등 천재 문인을 쓰러뜨린 폐결핵이 김유정을 비켜가지 않은 것도 흥미롭다. 그는 등단한 지 2년밖에 안 된 1937년 세상을 떠났다. 서른이 채 안 된 나이였다.

물론 김유정의 천재성을 증명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그의 소설이다. 특히 속어와 비어를 뛰어나게 부리는 언어감각은 경탄스럽다. 작가가 벌이는 말잔치 속에서 주인공인 순박한 농민들은 평화롭고 흥겨운 나날을 보내는 것처럼 보인다.

놀라운 것은 행간에 스며 있는 애처로움이다. 따라 읽다 보면 어깨가 들썩여지면서도 언뜻언뜻 농민의 고단함이 비쳐 쓸쓸해진다.

‘장인에게 닭 마리나 좀 보내지 않는다든가 애벌논 때 품을 좀 안 준다든가 하면 그해 가을에는 영락없이 땅이 뚝뚝 떨어진다. 이 바람에 장인님집 외양간에는 눈깔 커다란 황소 한 놈이 절로 엉금엉금 기어들고 동리 사람은 그 욕을 다 먹어가면서도 그래도 굽신굽신하는 게 아닌가.’(단편 ‘봄봄’ 중에서)

여섯 살 때 고향 강원 춘천을 떠나 서울에서 자란 그는 23세에 귀향했다. 지식인답게 야학당을 열어 농민을 가르치면서 농촌의 삶과 부대꼈다. 작가의 눈에 보인 것은 아름다운 농촌 풍경이 아니라 지주·마름·소작농의 계급 갈등이었다. 작가의 입담에 홀려 놓치기 쉽지만 김유정의 소설이 담고 있는 것은 이런 날카로운 문제의식이다.

탁월한 작가였지만 사랑에는 번번이 실패했다. 명창 박녹주(朴綠珠)를 짝사랑해 요즘 말로 스토커처럼 쫓아다녔지만 거절당했다. 시인 박용철(朴龍喆)의 동생 박봉자(朴鳳子)에게 편지를 30여 통 보냈지만 답장 한 장 받지 못했다. 여성에게서 받지 못한 사랑을 동료 문인들이 채워줬다. 김유정이 병에 시달릴 때 평론가 김문집(金文輯)이 나서서 후원금을 걷었다. 함께 폐결핵을 앓던 이상(李箱)은 동반 자살하자고 할 정도로 각별했다.

실연의 아픔은 김유정이 귀향해 창작에 몰두한 직접적 계기가 됐다. 늘 그렇듯 사랑은 그 결과가 어떻든 예술의 원천이 된다.

김지영 기자 kimj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