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詩』와 우이시낭송회

<봄편지> 이 비가 그치면 / 김판용(시인)

洪 海 里 2006. 4. 4. 19:41

이 비가 그치면

 

김 판 용(시인)

 

다시 봄비가 내립니다.
버들가지 같은 봄비---.
그저 하염없이 내리치듯 길고 긴 봄비
봄비는 저를 그렇게 만듭니다.

벌써 3월이 지나고 4월입니다.
이제 들녘도 색깔이 달라지겠지요.
여정에서 잡은 몇 개의 풍경을 띄웁니다.



저희 집 화단에 핀 노루귀입니다.
봄마다 노루귀꽃을 보면
괜히 슬퍼지고,
또 옛날이 사진이 보고 싶습니다.

잎이 노루의 귀를 닮았다하여
붙여진 이름인데
원래의 꽃잎은 퇴화되고 꽃받침만 남았지요.

꽃받침도 저렇게 예쁜데
원래 꽃잎은 또 얼마나 예뻤을까?
그러고 돌아보면
자꾸 앨범을 꺼내 내 청춘의 사진을 보게 되지요.

나에게도 이런 시절이 있었다니.........

노루귀의 화려한 시절은 갔을까요?
아니면 산에 오르면서 낮게 낮게 눈을 깔아야만 볼 수 있는
지금이 꽃시절일까요?

오늘은 앨범 한 번 보세요.
지난날의 내 모습이 오히려 촌스러울 수도 있으니.



얼레지꽃인데 역시 우리 집 화단의 것입니다.
얼레지는 뿌리가 약하고 깊이 뻗기에
좀처럼 옮겨 심을 수 없지요.

지난 여름 선각산에 올라갔다가
씨에서 막 발아한 모종을 가져온 것인데
하나가 살아서 꽃을 피웠습니다.

꽃잎을 쫙 벌리고
날렵하게 앉아 있는 모습을 보면
건들고 싶으면 건드려 보라는 듯
요염한 여인도 같고---.
그래서 꽃말이 "바람난 여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잎이 얼룩이 져서 얼레지라고 부르는데
산에 오르면 이제부터 막 무리 지어 피어날 것입니다.
작년에도 오봉산의 얼레지를 소개해 드린 것 같습니다.



흔하게 볼 수 있는 할미꽃입니다.
그러나 이곳은 아직 일러
멀리 구례에 가서 찍어온 것입니다.

고개를 숙이고 있어서
꽃 안이 잘 드러나지 않는데
참 화려하기 그지 없습니다.

할미꽃을 백두옹이라고 부르는 것은
꽃이 머리를 숙여서가 아니고
지고 나면 하얀 꽃술이 밖으로 드러나기 때문이지요.
그게 흰 머리 같아서 붙여진 이름이지요.
설총의 화왕계에서
화왕을 심하게 꾸짖는 이가 백두옹이지요.



구례군 산동면의 어느 산골에 핀
산수유꽃입니다.
아래쪽은 꽃이 시들한데 산이 높아서
아직도 꽃빛이 싱싱합니다.

봄날 산수유 꽃밭을 소요하다 보면
모든 것을 잊고 싶을 때가 있지요.
매화나 벚꽃과는 다르게 산수유꽃 그늘은 참 고요합니다.

그래서 같이 갔던 후배는
며칠 있고 싶다고 하더군요.
"~싶다"는 말은 이룰 수 없거나
이루어도 순간인 것들에 대한 원망이 담겨 있는 것 같습니다.



산에서 내려와도 꽃은 있지요.
정읍 산외면에 소재한 김동수 가옥입니다.
우리 지역에서는 보기 어려운
아흔아홉 칸의 큰 집이지요.

영남지방에서 보는 대가의 형태가 아니라
소박한 중인계급의 가옥입니다.
산외 동진강 상류의 대지주였던 이 집은
앞산인 주화산이 화기가 있다 하여
앞에 연못을 파는 등 풍수에도 대비했지만
한때는 파가에 직면하기도 했었답니다.

조금 있으면 금낭화가 필 텐데---.
그집의 금낭화는 참 곱답니다.
또 많은 식솔들을 건사했을 우물을 보면
부귀영화가 덧없음을 느끼게도 되지요.



지난 주말에 묘제를 지내러 갔다가
막 피어나는 산오리나무 꽃과 잎을 보았습니다.
저 어린 것들의 향연---.
여기저기 솟구치는 여리고 힘찬 것들을 보다가 셔터를 눌렀지요.

이제 비가 그치면
저런 잎들이 솟구치겠지요.
봄날, 나른해지기 쉬운데.........
저 새로 돋는 잎과 꽃들처럼 힘차시기를 기원합니다.

2006. 4. 4.

김판용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