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평론·시감상

<평론> 蘭을 닮은 백지의 시인: 洪海里 / 진순애(평론가)

洪 海 里 2006. 9. 11. 12:49
 

蘭을 닮은 백지의 시인

     ―洪海里의 신작시(<牛耳詩>제114호에 수록)를 읽고

                                                          진   순   애



 가람 이병기의 난초송에서 선비정신이 일깨워졌다면, 홍해리의 난초송은 세속적 인간의 냄새가 선비정신과 함께 묻어나 있어서 보다 친밀하다. 그래서 한 나라의 문학사는 통시적 거시구조 속에 공시적인 미시구조와 연계되어 질 수밖에 없음을 새삼 확인시키기도 한다. 그것은 또 전통의 현재적 의미망을 형성하며,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가는 회귀의 정신을 구성해 보여주기도 한다.

 그렇다면 왜 하필 蘭인가. 선조들은 자연에 대한 예찬과 자연과 같은 순리, 그리고 자연과 같은 아름다움을 가장 빼어난 이데아의 규율로 보았기 때문에, 그 하나의 대상이 蘭이었음에, 한낱 하늘거리는 풀자락이 지금까지도 이렇게 혼란스런 우리네 마음을 정화시키는 힘으로 유지되고 있는 것일 게다.

 그러면 여러 가지 풀 중에서 蘭는 그토록 칭송되어져야 할 풀인가. 蘭의 아름다움에 취할 기회가 없었던 필자는 한때 하찮은 저 풀잎에 왜 그다지들 심취해 하는지 잘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蘭으로 둘러싸인 어느 사무실을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그 좁은 잎새들 사이에서 한 송이 빼어난 자태의 꽃을 피워올린 난초화분을 보고서, 그때야 비로소 난초 기른이의 마음들을 짐작할 수 있었다. 물론 그렇다하여 蘭에 대한 예찬이, 난초뿐만 아니라 梅菊竹을 비롯한 자연에 대한 예찬이 선조들의 의인화된 의식행위란 생각을 지금도 떨쳐버리지는 못한다. 거기에는 인간을 깨우치기 위한 의도된 의식이 지배적이란 말이다. 물론 이는 인간이 한 무더기의 풀포기만도 못하다는 역설적 인식이 배어있음을 모르지 않는다. 풀포기만도 못한 인간상을 우리는 인간중심 시대인 현대에 더욱 더 많이 만나기 때문에, 풀을 비롯한 자연에 대한 관념행위는 인간중심의 현대지만 여전히 자연이라는 전범에 기댈 수밖에 없다는 인간의 한계성을 확인시켜 주는 주요한 기제로 작용한다.

 그래서 홍해리의 ‘蘭을 사랑하는 일이란’ 사람을 잃어버린 이 시대에 온유하고 따끔한 일침을 가한다. 만일 시인이 ‘나는 난초와 같지만 너는 아니야’라고 말했다면, 우리는 아무도 감동받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우리의 의식이 그만큼 무감각해졌다는 의미이기도 하겠고, 또는 어느 사이엔가 ‘우리는 모두 모두 똑같이 타락한 요즘 사람들일 뿐이야’라고 반항적으로 되기도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인은 미적 주체를 난초로, 그리고 시인 자신은 난초를 향한 구도자적 자세로 설정하고 있어서 성찰의 미를 돋보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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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빈 것밖에/ 없는/ 나를/ 채울 이/ 그대뿐.

                         ―<愛蘭―白紙>에서

  눈물로 씻은 세상/ 아니면/ 네가 보이지 않는다.

                                 ―<愛蘭>에서 

  무슨 말이 필요하랴/ 가슴 여미고/ 두 손 모두어/ 네 앞에 서면

                                              ―<愛蘭―낮은 자리>에서

  혼불만 붙어 있는 빈 몸/ 더 밝은 빛을 위하여/ 속울음을 잠재우나니

                                                  ―<愛蘭―紫蘭行>에서

  그리움으로 가득히 차오르는/ 십리 밖 날라리 소리에/ 피어나는 한 폭 수채화

                                          ―<愛蘭―寒蘭을 노래하다>에서


 「牛耳詩」제114호(1997.12)의 신작특집으로 실린 홍해리의 시 다섯 편 중에서, 그 시의 지배소적 의미로 채워진 항목을 열거해 보았다. ‘나는 빈 것’이고, 그 빈 ‘나’를 채울 것은 그대, 그 난초뿐이라는, 그래서 또 ‘나’는 ‘백지’라는 은유를 창조한다. ‘나는 백지’라는 의식은 난초향에 의해서 채워져야 할 ‘빈 것=나’라는 의미 외에도, ‘나는 이미 난초의 순결에 닿아 있다’는, 또는 무소유 및 무욕의 의식 또한 내포하고 있어서 난초에 대한 시인의 무의식적 의미망을 만날 수 있다. 즉 홍해리 시인은 <愛蘭>에 대한 시를 쓰기 이전에도 이미 난초에 대한 사랑 행위에 그만큼 빠져 있었다는 사실을 이는 확인시킨다. 시인은 여기에 오기까지 충분히 눈물로 자신을 씻어 왔으며, 언어의 거짓된 장치를 깨달았으므로, 보다 더 밝은 빛을 위하여 울음을 속으로 속으로 잠재우고, 한해의 짐을 부리며 한해가 저무듯이 모든 것을 쓸어버린 헐벗은 마음으로 그렇게 난초처럼 아름답기를 지향한다. 그래서 그의 시는 아름답고 정결한 감동을 피워올린다. 蘭을 사랑하는 일이란 곧 ‘나를 사랑하는 일’이며, 蘭의 향기처럼 사랑의 향기를 세상으로 향하게 하는 일의 일환이라는 듯이.


   평론가 陳順愛씨는 <文學思想>으로 등단했으며, 성균관대학대학원에서 국문

  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성균관대, 광운대, 충북대 등에 출강하고, 여러

  문예지를 통해 활발히 비평활동을 전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