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평론·시감상

<서평> 수천수만 개의 꽃등에 관하여『봄, 벼락치다』/ 여태천

洪 海 里 2006. 10. 19. 12:27

<서평>


수천수만 개의 꽃등에 관하여

― 洪海里 시집, 『봄, 벼락치다』


여태천(시인)



홍해리 시집『봄, 벼락치다』는 비유로서의 꽃이 아니라 “수천수만 개의 꽃등”에 관한 것이다. 일반적으로 시에 등장하는 꽃은 자기의 근원으로 돌아가서 일자(一者)에 귀환한다. 그게 우리가 아는 비유와 상징으로서의 꽃이다. 그런데, “수천수만 개의 꽃등”은 말하자면, 그 일자(一者)의 꽃을 저버리고 다양한 감각으로 피워낸 꽃이다.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홍해리의 시에서 꽃과 “수천수만 개의 꽃등”이 완전히 갈라서는 것은 아니다. “수천수만 개의 꽃등”은 최소한 하나의 꽃으로서의 완전함을 잃어버리지 않는다. 아니, 잃어버릴 수 없다. 여기에는 시인이 보여준 비유로서의 꽃에 대한 무한한 경사가 숨겨져 있기 때문이다. 그 꽃은 의미 그대로 시인의 눈을 멀게 했지만, 대신 절실하고 영원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 글은 특별한 방식으로 외부세계에 반응하는 시인의 태도와 그 반응이 만든 내면에 주목하고자 한다. 예컨대, 시인이 지금까지 보여주었던 인상 깊은 몇 개의 꽃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 하나의 표징으로서의 “수천수만 개의 꽃등”에 대해 말하는 것은 시인의 시적 태도와 내면의 풍경을 이야기하는 데에는 그리 효과적이지 않다는 뜻이다.

우리는 모두 보편적 삶을 살아가지만 언제나 자신만의 특별한 주변세계를 갖고 있다. 시인이라고 예외일 수 있겠는가. 오히려 그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꽃을 보며, 꽃에 대해 고민한다.


수천수만 개의 꽃등을 단 매화나무가 날리는 향香이 지어 놓은 그늘 아래 꽃잎 띄운 술잔에 열이레 둥근 달도 살그머니 내려와 꽃잎을 타고 앉아 술에 젖는데,

꽃을 감싸고도는 달빛의 피리 소리에 봄밤이 짧아 꽃 속의 긴 머리 땋아 내린 노랑저고리의 소녀가 꽃의 중심中心을 잡아,


매화를 만나 꽃잎을 안고 있는 술잔을 앞에 놓고 부르르 부르르 진저리를 치고 있는

시인詩人들,

― 「옥매원玉梅園의 밤」 부분


“수천수만 개의 꽃등을 단 매화나무” 아래 “향香”이 그늘처럼 드리워져 있다. 이 극진한 아름다움의 순간, “꽃잎 띄운 술잔에 열이레 둥근 달”이 비친다. 달도 아름다움에 취해 꽃잎을 타고 놀다 술에 젖는다. 이 한 폭의 그림에 대한 설명은 그야말로 ‘吟風弄月’ 혹은 ‘無爲自然’이라는 낯익은 주석으로 충분해 보인다. 술과 꽃과 달과 피리, 거기에 “노랑저고리의 소녀”까지 어느 것 하나도 빠지지 않은 완벽한 풍류의 세계다. 그런데, 이 아름다움의 진면목을 앞에 두고 “부르르 부르르 진저리”를 치고 마는 “시인詩人들”이 있다. 자연에 도취되어 ‘無我之境’에 이른 것일까? 아니라면, 이제는 너무나도 흔해빠진 것으로 이해되는 자연과 인간의 일체를 결곡한 언어로 형상화했다고 해야 옳은가? 그러나 그렇지 않다. 자연에 기대어 감정을 표현하는 것은 낡은 것이지만 자연 그 자체는 낡은 것이 아니다. 자연이 낡을 수는 없다. 언제나 새로운 것이 자연이다. 자연을 빌미로 감정을 풀어놓는 시인의 안이한 태도가 낡아빠진 것이다. 언제나 그것이 문제가 된다. “수천수만 개의 꽃등”은 자연에 대한 낡은 비유에 대한 역설적 사유가 낳은 아름다움에 대한 비유다.

물론 그 아름다움의 한가운데 꽃이 있고, 그 꽃의 한가운데 소녀가 있다. 소녀는 시인들이 자연의 아름다움에 취해 자신을 망각하는 것을 제어하듯이 일자(一者)의 자연으로 되돌아가려는 꽃의 “중심中心”을 잡는다. 여기서 “중심”이란 말은 근원적인 것에 대한 환상일 수 없다. 그것은 시인으로 하여금 “부르르 부르르 진저리”를 치게 하는 어떤 힘이다. 아니 그 “중심”에 있을 때, 우리는 “진저리”를 치게 된다. 다시 말해, 무아지경의 저 낙락으로 함몰될 위기에 처한 시의 언어를 구하려는 “시인들”의 악착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다시 한번 강조하건대, “수천 수만 개의 꽃등”은 자연의 아름다움이 아니라 시인의 언어가 피울 수 있는 가장 힘겨운 꽃이다. 홍해리의 시집 『봄, 벼락치다』에서 꽃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시인의 “수천수만 개의 꽃등”에서 가장 뚜렷하게 확인되는 것은 저 깊은 곳에 꼭꼭 숨겨둔 감정을 자연스럽게 풀어놓는 언어의 유연함이다.


한여름 다 해질녘

봉숭아 꽃물을 들인다

꽃을 따 누이의 손톱마다

고운 물을 들인다

이쁜 반달손톱 속에는 벌써

첫눈이 내린다

매미 소리 한철 같은 누이의

첫사랑이 내린다

추억이 짓는 아스라한 한숨소리

손톱 속으로 스며들고

손가락 꼭꼭 싸맨 그리움이

추억추억 쌓이고 있다

해 설핏한 저녁에 꽃물을 들이는

눈썹마당에 이는 바람인 듯

슬슬슬 어스름이 내릴 때

가슴속에선 누가 북을 치고 있는가

다소곳 여민 적삼 안으로

그리움이 스멀스멀 스며들고

입술 촉촉 젖어 살짝 깨무는 소리

어스레한 누이의 젖은 눈가로

봉숭아꽃 하나 둘 지고 있었다.

― 「추억, 지다」 전문


“봉숭아 꽃물”로 비유되는 추억에 대한 감정이 다양한 언어의 운용으로 빛을 발하고 있는 작품이다. ‘추억, 지다’라는 단순한 제목은 얼마나 아련한가. 그러나 시인은 그 감정에만 기대지 않는다. 누이는 첫눈이 내릴 때까지 그 꽃물이 남아있기를 바랐다. “매미 소리 한철 같은 누이”의 첫사랑에 대한 간절함과 그리움이 “꼭꼭” 싸맨 손톱 사이에 스며있는 “봉숭아 꽃물”처럼 “추억추억” 쌓이고 있다. 그 간절함과 그리움은 영원하지 않다. “슬슬슬 어스름이 내”리는 것처럼 그 절실함도 저녁 무렵 마당에 부는 바람이 되어 누이의 가슴을 싸늘하게 식히고 빠져나간다. 그러나 어디 쉽게 잊혀질 수 있겠는가. 누이의 “다소곳 여민 적삼” 안으로 그리움은 또 다시 “스멀스멀 스며”든다. “꼭꼭” “슬슬슬” “스멀스멀” 등과 같은 의태어는 마치 그 감정이 살아서 시의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는 듯한 느낌을 갖게 한다. 뿐만 아니라 “추억추억”이라는 관념어의 중첩은 첫사랑에 대한 누이의 애틋한 감정이 이제 희망을 잃어버리고 말았음을 감각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비록, 그리움이 손톱 끝에 남아있지만 그것은 실현될 가망이 없는 사랑에 대한 증거에 가깝다. 누이의 아픔이 “추억추억” 쌓이고 있다. 우리의 감정이 관념으로도 표현될 수 있다는 것은 매우 흥미로운 사실이다. 종종 홍해리 시에서 언어는 감정의 저 깊은 곳을 울리고 매우 건조하게 시의 표면을 장식하기도 한다. 가령,


왜 슬픔은 가시처럼 자꾸 배어나오는지

무장무장 물결표로 이어지고 끊어지는 그리움으로

세상 가득 흰 물이 드는구나.

― 「찔레꽃」 부분


에서처럼 “슬픔은 가시처럼” 자꾸 배어나온다 라는 익숙한 직유 다음에 이어지는 그리움에 대한 표현이 “무장무장 물결표”로 되어있음을 기억하자. 그리움이란 물결처럼 아주 작은 감정의 파동에서 시작해서 끊임없이 이어지다가 해일이 되어 모든 것을 삼켜버리기도 한다. 물론 시인은 그 끝에 대해 관심이 있는 게 아니다. 떨리는 감정의 그 시작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이어지고 끊어지는” 그리움의 속성이 “무장무장”을 통해 실감을 얻고 있다. 시인은 “무장무장”이라는 말의 중첩을 통해 언어가 가닿을 수 없는 감정의 주름을 실감나게 표현했다. 흥미로운 것은 그것 역시 “세상 가득 흰” 물을 들이는 ‘찔레꽃’이라는 사실이다. 이와 달리 감정을 표현하는 언어의 유려함이 인식론적 차원에서 언어유희로 재현되는 경우도 있다. 이때 시인이 보여주는 말의 운용은 단지 언어유희에 그치지 않고 시적 역설로 이어진다. 가령, 시 「팽이는 때려야 돌고 돌아야 선다」는 말의 놀이와 사유의 깊이가 절묘하게 만나는 지점을 포착하고 있다. 


멈춘 팽이는 죽은 팽이다

죽은 팽이는 팽이가 아니다

토사구팽이다


멈추면 서지 못하는

팽이를 때려다오

돌아서 서도록 쳐 다오


너의 팽이채는

쇠좆매,

윙윙 울도록 때려다오


중심을 잡고

불불대도록,

불립문자가 되도록 쳐 다오.

― 「팽이는 때려야 돌고 돌아야 선다」 전문


“멈춘 팽이” “죽은 팽이” “토사구팽”으로 이어지는 말의 연쇄만 본다면 이 시는 그다지 새로울 게 없다. 이미 오래전에 시인은 그 말의 재미가 오를 수 있는 높은 경지를 시험했고 또 보여주었다. 최소한 이번 시집에서 시인의 말은 놀이가 주는 쾌감을 넘어서고 있다.

이 시에서는 그 말의 부딪힘이 언어를 통해 한 번 더 새로워진다. 시인은 죽은 팽이를 살리듯 자신의 언어를 되살리려고 한다. 그것은 단일한 의미로 환원된 언어를 다시 자유롭게 하는 일이다. 가령, “서지 못하는”[不立]는 팽이를 돌려 “불립문자”(不立文字)가 되도록 한다는 것은 쉽게 얻을 수 있는 통찰은 아니다. 언어에 대한 깊은 사유를 바탕으로 하지 않고서는 이 낙차를 쉽게 이해하기 어렵다. “불립문자”란 불가(佛家)에서 흔히 말하는 ‘염화미소(拈華微笑)’의 깨달음을 지시하지 않는다. 서지 않으면 팽이[언어]가 되지 않는다는 현상적 관찰이 문자로 된 것은 언어가 아니라는 철학적 사유로 이어진다. 이 “불립문자”야말로 언어를 의미의 죽음으로부터 살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그 오래된 진리는 오직 시의 언어만이 보여줄 수 있다. 시인이 바로 눈앞에 있는 “서지 못하는” 팽이에서 저 멀리 있는 “불립문자”를 얻었다. 뿐만 아니라 바로 그 앞 구절에 시인은 “불불대도록”이라는 말을 적어 “불립문자”가 지닐 수 있는 왕성한 힘을 느끼게 했다. 때로 언어에 대한 시인의 예민한 감각은 그 기원을 돌아보게 한다.


점심은 한가운데 점을 보는 것이다

오늘 점심은 마음에 까만 점을 놓는다

아니, 가슴에 불을 켠다

― 「점심點心에 대하여」 부분


“점심點心”이라는 말은 ‘일일이식(一日二食)’을 했던 중국에서 아침과 저녁 사이에 드는 간단한 식사를 일컫는 말이었다. 시인은 점심으로 자장면을 먹으면서 까만 점을 마음에 찍고 넘겼다. 자장면의 까만 이미지에서 촉발된 이 시에서 시인은 “가슴에 불을 켠다”는 잃어버린 “점심”의 기원과 함께 자장면이 지닌 점심으로서의 가치를 동시에 복원했다. 삶에 대한 관심은 언어에 대한 관심과 다르지 않다. 우리는 시인의 여러 시편에서 이를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다.


우체국 가는 길

초등학교 앞

어른 키만한 나무

구름일 듯 피어나는 복사꽃

헤실헤실 웃는 꽃잎들

가지 끝 연둣빛 참새혓바닥

일학년 일과 파할 무렵

이따금 터지는 뻥튀기

혼자서 놀고 있는 눈부신 햇살


요요하다.

― 「요요」 전문


시인은 눈부신 햇살이 쏟아지는 초등학교 앞, 복사꽃이 핀 풍경을 아주 멀리서 조감하듯 바라보고 있다. 나른한 햇살과 나무와 꽃잎과 참새, 그 햇살 사이를 돌아다니는 소리들이 만드는 풍경을 “요요하다”라고 말했다. “요요하다”라는 한 문장이 한 연으로 구분되어 앞의 연을 설명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현상으로 보여준다. 이 말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중첩되어 있다. 말하자면, “요요하다”에는 그 풍경의 고요함[寥寥]과 그 풍경이 만드는 상쾌한 느낌[夭夭], 그리고 그 풍경을 보고 느끼는 화자의 들뜬 내면의 움직임[搖搖]이 동시에 숨겨져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 아름답고 맵시 있는 풍경은 마치 화자의 유년을 그대로 재현하고 있다. 이 풍경을 보고 마음은 흔들리고 들뜰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 ‘요요’란 ‘다시 돌아온다’는 뜻의 필리핀 말이기도 하다. 시인이 의도했건 그렇지 않았건 간에 이 시에는 “요요하다”라는 말이 만드는 여러 풍경이 동시적으로 펼쳐진다. 뿐만 아니라 그 풍경은 과거와 현재를 순식간에 왕복하고, 언어는 그 내면과 현실을 왕복한다.

현상학적 관찰에 집중하는 시인의 언어는 사물의 발견과 이해에 주력함으로써 자기의 삶을 꾸준히 확대하고 풍부하게 한다.


새벽 까치부부가 마당에, 몰래

그려 놓은 뫼비우스의 띠.


묘명하다.

― 「뫼비우스의 띠 ― 첫눈」 부분


이 시는 시인의 특별한 관찰력이 돋보인다. 하얀 눈이 가득 쌓인 마당에 발자국이 선명하다. 평상시 우리는 그 발자국을 눈여겨보지 않지만 행여 그것을 유심히 본 이라면 발자국이 일정한 동선을 따라 이어지지 않음을 발견할 것이다. 시인은 그 모양을 “뫼비우스의 띠”로 이해했으며, 그것을 “묘명하다”라는 말로 표현했다. 여기에는 선명한 것이 오히려 더 어두침침하고 아득할 수 있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혹은 혼란과 혼미가 매우 단순한 것의 겉모양에 불과하다는 뜻도 된다. 가령, 그것은 “너는/천리 밖”에 있고 “나는/만리 밖”에 있다는 생각으로 이어지는데, 이 또한 우리의 삶이라는 것이 확연하게 제 모습을 보여주지 않음을 거리를 통해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시인의 이와 같은 인식의 깊이는 일상적인 삶에 대한 사유마저 역전시키기도 한다.


(내일은 없다)

그리고 사람과 삶, 가장 아름다운 불꽃처럼

우리말로 된 이름씨들 앞에서

한없이 하릴없이 하염없이 힘이 빠지는 것은

아직 내게 어둠이 남아 있기 때문일까

한 그릇의 밥이 있어서일까

일탈이다, 어차피 일탈逸脫이다.

― 「일탈逸脫」 부분


괄호로 묶인 “(내일은 없다)”라는 말은 비극적 세계관에서 비롯한 게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현실이 바로 내일이라는 뜻으로, 우리의 고정된 사유에 구멍을 뚫어준다. “우리말로 된 이름씨들” 앞에서 화자가 하염없이 힘이 빠지는 이유는 그 이름씨가 지닌 어떤 힘 때문일 것이다. “우리말로 된 이름씨들”은 어떤 호명에 의해서도 제한되지 않는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다. “귀 눈 등 똥/말 멱 목 발” 등과 같은 순수한 우리말로 호명되는 것들은 어떤 이데올로기적 규제나 통제를 받지 않는다. 그 이름에는 모든 개별성이 지니는 잉여와 가능성이 내재한다. 마치 그것은 “어둠”과 “한 그릇의 밥”으로 비유되는 화자의 욕망처럼 어떤 것으로도 충족되지 않는다. “어차피 일탈逸脫이다”라고 했을 때, 그 “일탈”이 현실로부터의 도피가 아니라 언어에 대한 새로운 가능성을 염두에 둔 말임은 당연하다. 시인이 직접 “내가 물이고/꽃이고 불이다/흙이고 바람이고 빛이다”라고 단언할 수 있는 까닭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조금 먼 길을 돌아와야 하겠지만, 그 구절이 “어차피 일탈逸脫이다”라는 진술에 이르기까지 시인이 견지했던 사유의 흔적을 찾는 일은 그렇게 어렵지 않다. 그러므로 시인이 너무나도 익숙한 말을 화두로 내세워 새로움에 대해 말하는 것 역시 당연한 일이 아니겠는가.


“처음 뵙겠습니다

잘 부탁합니다”

그렇게 살 수는 없을까

하늘 아래 새것은 없다지만

세상은 새롭지 않은 것 하나 없지

― 「처음이라는 말」 부분


우리가 하루에도 몇 번씩 건네는 “처음 뵙겠습니다/잘 부탁합니다”라는 인사말이야말로 새로움에 대한 시인의 간절함을 가장 적절하게 대신한다. “처음”이라는 말에는 언제나 긴장과 들뜸과 기대가 동반된다. 이 순간 모든 신경은 처음 만나는 바로 그 사람에게 집중된다. 시인의 말처럼 모든 게 다 처음이다. “하늘 아래 새것은 없다지만/세상은 새롭지 않은 것 하나 없”다. “우리말로 된 이름씨들”이 그렇고, 삶이 그렇다. 우리가 매순간 느끼는 감정도 새롭지 않은 것은 없다. 시인은 그 “처음”을 언어로 만드는 사람이다. 대상을 관찰하는 시인의 시선은 골똘하고 날카롭다.


물속으로 내리박았던

물총새,

나뭇가지에 앉아, 잠시,

진저리치듯.


온몸으로 폭탄으로

또다시,

물속에 뛰어들기 위하여

물속을 들여다보듯.

― 「다시 시를 찾다」 전문


물속으로 온몸을 폭탄처럼 내던지는 “물총새”의 모습에서 우리는 언어로 표현하기 어려운 시인의 강렬한 열정을 느낄 수 있다. 먹이를 향해 질주하는 물총새의 속도는 시인이 대상을 향해 세우고 있었던 날카로운 감각과 다르지 않다. 그 대상에 대한 화자의 진실한 태도가 “나뭇가지에 앉아, 잠시,/진저리치”는 것에서 드러난다. ‘시’라는 대상이 언제나 시인에게 “진저리”를 치게 한다. ‘다시 시를 찾다’라는 제목에서 시인이 지닌 태도의 진지함과 진정성을 엿볼 수 있다. 시인은 언제나 그랬듯이 그 물속을 골똘히 들여다본다. 어디에 투신하는 것은 맹목일 수 있지만, 그 투신의 맹목을 제어할 수 있는 힘은 그 현상을 오랫동안 관찰하는 일에서 얻을 수 있다. 이번 시집에서 홍해리 시인이 보여준 “수천수만 개의 꽃등”이 모두 여기에서 비롯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평생 퍼마신 술이라는 이름의 물로

이 몸은 술통이 되었다

술독이 오른 술독이 되었다

술독이 오르니 온몸에 술의 독이 퍼지고

술병이 든 술병이 되었다

온몸이 술이 되었다

몸은 없고 술만 있다

바람에도 날아가고

물 한 방울에도 씻겨 내리는

아무것도 없는 몸이 되었다

― 「날아가는 불」 부분


내가 아는 시인은  늘 술을 가까이 하고 즐겼으며, 진실로 사랑했다. 술을 즐기지 못하는 나는 그 열정을 부러워했다. 그 술로 그의 몸은 “술통”이 되었고, “술독”이 오를 대로 오른 시인의 몸은 “술병”처럼 투명해졌다. 아마 사실이리라. 그러나 이 고백이 비극적으로 들리지 않는다. 그것 또한 사실이다. 여기에는 시인이 견지하고 있는 투철한 신념이 숨어있다. “아무것도 없는 몸”에 대한 깊이 있는 사유가 술과 술병으로 형상화되었다. 말하자면, 술과 술병의 투명성이 몸의 사라짐으로 이어진 것이다. “몸은 없고 술만 있다”는 진술이 “아무것도 없는 몸”으로 전환되는 시점에서 우리는 어떤 비약을 느낄 수 있다. 그 비약은 술이 지니는 휘발성의 탓도 있겠고, 술병의 투명성에 기댄 바도 있겠지만, 무엇보다 온몸으로 질주했던 시인의 삶의 태도에서 오는 것 같다. 시인이 이 시의 제목을 ‘날아가는 불’이라고 한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날아가는 불’은 하나의 꽃이다. “바람에도 날아가고 / 물 한 방울에도 씻겨 내리는” 꽃이 시인이다. 아름다운 꽃은 이렇게 날아가면서도 핀다. 시인의 정열은 불과 같고, 그의 언어는 꽃처럼 아름답다. 평생 시인이라는 이름으로만 살아왔던 누추하지만 그러나 진실한 삶에 대한 가장 아름다운 비유가 아니겠는가. “수천 수만 개의 꽃등”이 부디 일자(一者)로 환원되는 꽃의 이데올로기로 호명되지 않기를 바란다.

(『牛耳詩』, 2006년 11월호)



* 여태천 시인은 2000년 『문학사상』으로 등단했다. 시집『국외자들』과 시론집『김수영의 시와 언어』가 있으며, 현재 고려대와 상명대에 출강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