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일남 17

제비꽃 필 때 / 정일남(시인)

제비꽃 필 때 洪 海 里 봄보다 먼저 오는 고요, 그 자체 제비는 오지 않아도 너는 피느니 안쓰럽고 작은 꽃, 네가 필 때면 웬 놈의 햇빛은 또 그리 밝아서 백주에도 천둥 울고 벼락 치는가 꺾지도 못하는 꽃, 짙은 보랏빛. * 시인의 집단 세계에도 남모르는 비밀들이 있다. 어떤 시인은 집필에 매달리기보다도 잡지사나 평론가, 그리고 신문사를 찾아다니는 시인이 있는가 하면 아예 외부와는 교제를 단절하고 칩거하며 좋은 시만 쓰려는데 집착하는 시인이 있다. 홍해리 시인은 후자에 속하는 시인이라 할 수 있다. 우이동에서 살며 동인으로 활동했다. 임보 시인도 같은 동인이었다. 그것이 발전해서 전국적인 규모의 문예지《우리詩》로 변모했다. 이 잡지는 월간으로 매달 발간된다. 이 문예지의 편집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너무..

약속 -치매행致梅行 · 23​ / 정일남(시인)

약속 -치매행致梅行 · 23​ 洪 海 里​ 언제 여행 한번 가자 해 놓고,​ 멋진 곳에 가 식사 한번 하자 해 놓고,​ 봄이면 꽃구경 한번 가자 해 놓고​ 지금은 북풍한설 섣달그믐 한밤입니다.​ ​ * 홍해리 시인의 아내는 불과 사오 년 전만 해도 서울시내 초등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교사였다 한다. 집에서는 세 아이의 어머니며 시인인 남편의 뒷바라지를 했던 현모양처였다, 자식들 키워 며느리도 보고 손자 손녀도 커가는 행복한 집안이었다, 그래서 정년퇴직도 했다. 그동안 이루지 못 했던 여행도 하고 여유롭게 살 일만 남았던 것이다. 그런데 아내가 조금씩 이상해지기 시작했다. 처음엔 그저 건망증인 줄 알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기억력 감퇴에 실어증 증세까지 나타났다. 언젠가 홍해리 시인이 시..

어린아이 - 치매행 · 4

어린아이 -치매행致梅行 · 4 洪 海 里 아내는 어린애가 되었습니다. 내가 밖에 나갈라치면 어느새 먼저 문밖에 나가 있습니다 억지로 떼어놓고 외출을 하면 왜 안 와? 언제 와? 늘 똑같은 두 마디 전화기 안에서 계속 울고 있습니다 내가 자기를 낳은 어미도 아니고 아버지도 아닌데 한평생 살 비벼 새끼 낳고 기른 죄 많은 지아비라서 나는 나이 든 아기의 아빠가 되었습니다. 오늘도 내 사랑하는 아가는 내게 매달려 한마디 말은 없지만 그냥, 그냥, 말문을 닫고 웃기만 합니다. * 홍해리 시인이 이란 시집을 냈다. ‘시인의 말’에서 홍해리 시인은 ‘치매는 치매(癡呆)가 아니라 치매(致梅)라 함이 마땅하다. 무념무상의 세계, 순진하고 무구한 어린아이가 되는 병이 치매다.‘라고 말하고 이 시집을 치매 환자를 돌보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