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평론·시감상

<평론> 전통과 상상력 / 피리 : 김준오

洪 海 里 2006. 11. 3. 18:14

傳統과 상상력
- 테마시「피리」

김준오(문학평론가 · 부산대 교수)

1

『震檀詩』동인들은 그 엄격한 규율 때문에 우리의 동인지 역사에서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이 특별한 의미는 사실 매우 역설적이다. 왜냐하면 그 엄격한 규율이란(창간호의 서문에서 표명했듯이) '우리 것에의 관심'에서 출발한 테마시를 싣는다는 것이고, 그래서 1982년 제 1집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테마시의 공통된 제재들이 우리에게 매우 낯익은, 허구적이거나 역사적 인물 아니면 사물들이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우리에게 낯익은 제재들을 공통적으로 그리고 집요하게 다룬 것이 오히려 우리에게 별난 일처럼 보이는 것이다. 그만큼 우리가 전통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거나 망각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제재가 '우리의 것'이라고 해서 『진단시』동인들의 테마시가 반드시 전통시일 필요는 없다. 테마시의 의의는 '우리의 것'의 재발견에만 있지 않다. 오히려 그것은 전통적인 제재에 대한 시인 저마다의 새로운 해석에서 찾아 볼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모험 아닌 실험'을 (「진단시」창간호 서문) 모색하겠다는 동인들의 다짐에서 이미 표명된 바 있다.

2

그러나 『진단시』의 테마시들은 지금까지 대부분 전통시의 범주에 속했다. 제재를 비롯하여 정서와 사상이 전통적이고 때로 가락도 전통적이었다. 14집의 「피리」테마시들도 두드러지게 전통지향적이고 그리고 서정적이다.

전통미학으로서 리듬의 탐구는 홍해리의 테마시들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그의 「피리소리」,「입술피리」, 그리고 「茶墨室」은 모두 4음보의 전통율격을 채용하고 있다. 특이한 점은, 앞의 두 작품은 변형된 형태이지만 4行詩의 전통 시가형식이라는 점이다.
꼭같이 2행씩 한 연에 배치하여 총 18행으로 구성된 「피리소리」는 의미단락으로 보면 4행시의 변형(한 연을 한 행으로 한)이고, 연작 4행시이다. 그의 시어는 지나치게 선택적이어서 우리로 하여금 순수한 서정의 세계, 그것도 동양화적인 세계로 이끌고 간다.

아쉽고 그리워라 / 어릴 적 피리소리 // 끈 · 길 · 듯 · 끊 · 어 · 질 · 듯 / 이-어-지-는-가 // 천 마디 만 마디 말 / 소리 하나로 // 구멍마다 피가 돌아 / 윤이 나는데

시인은 둘째 연을 비롯하여 전체적으로 행의 배열에서 일종의 형태시적 시각 효과를 의도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둘째 연은 문자가 아닌 < · >과 < - >의 부호를 각 음절 사이에 끼워 넣고 의미의 시각화에 기여하도록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서정을 환기하는 제재가 한정적이고 너무도 부드럽고 가냘픈 시어 선택으로 시어와 일상 언어의 2분법적인 엄격한 단절은 노증하는 감상적 태도를 면치 못하고 있다. 이런 점은 다분히 동화적 어조의 분위기까지 자아내고 있는 「입술피리」에서도 드러난다. 전형적 4음보의 4행시인 「茶墨室」은 신선적 풍류의 세계를 형상화한 일종의 예술가 시이다. 그의 시는 가장 시적이다.

3

서정시의 원형은 동일성이다. 이 동일성은 통시적인 것과 공시적인 것의 두 유형이 있다. 전자의 통시적 동일성은 불변성 또는 영원성이고, 후자의 공시적 동일성은 자아와 세계와의 일체감과 조화감이다. 적어도 『진단시』14집의 작품에 관한한 영원성과 불변성은 지배적 · 시적 가치로 수용된다. 테마시들이 두드러지게 제재에 시간적 연속성을 부여하고 있는 착상이나 연가풍의 시에서 영원성을 사랑의 본질로 설정한 것 등은 이런 통시적 동일성의 양상들이다.

테마시는 마치 일반 백일장의 시처럼 시인이 제재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제재가 '주어지는' 것이다. 그만큼 테마시는 제한적이고 시인의 상상력을 구속한다. 이런 제한성과 구속성을 얼마나 극복하는가 하는 것은 『진단시』동인들이 표명한 것처럼 각자 개성의 문제이고, 역설적이지만 '모험 아닌 실험'의 모색에 관한 문제이다. 동일성과 '낡은' 세계관과 서정의 바탕이 되어서는 안 된다.
정의홍과 신규호의 정치적 성격의 시처럼 테마시의 전통지향성과 서정주의와의 다른 면모를 발견하게 되는 것은 우리의 기쁨이 아닐 수 없다.
이런 점에서 가장 흥미로운 것은 홍해리의 「세상은 깨어 있다」가 그의 테마시와 너무도 명백하게 대조되고 있는 점이다. 이 명백한 대조는 한 시인이 어떻게 그처럼 이질적 작품을을 시간적 거리와 별로 상관 없이 생산할 수 있는가 하는 경악감까지 준다.

눈으로 사기치고 몸으로 사기치고 / 세상은 깨어서 반짝반짝하는 구나 // ……다 깨어 있구나 시퍼렇게 깨어 있구나 / 세상은 깨어 세상에서 사기치고 있구나

이 작품은 우선 문체면에서 테마시와 대조적이다. 그의 테마시의 시어선택과 배열은 극히 제한되고 절제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 작품은 70년대 이후 한국 현대시에 두드러지게 나타난 요설체이다. 언어절제가 결핍된 요설체의 장광설은 언어의 애정결핍을 상징하고 이 결핍은 또 그대로 현실에 대한 깊은 혐오감을 반영한다. 사실 이 작품은 아이러니와 해학을 동원한 풍자시이다. 테마시가 동일성의 시정신으로 제재를 처리한 반면, 이 풍자시는 비판적 산문 정신으로 근본적 시인의 상반된 태도의 산물이었던 것이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진단시』동인들이 '우리의 것'에 대한 관심과 모색은 재현적 작업만으로는 불충분하다. '우리의 것'을, 우리의 과거를 개성적으로, 그리고 '지금 여기'의 당대적으로 해석했을 때 테마시는 그 의의를 획득할 수가 있는 것이다. 이것은 누구보다도 『진단시』동인들이 이미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다.
(『현대시와 전통의식』문학예술, 1991)

 

 

<시>

 

입술피리

 

洪 海 里

 

 

경상북도 안동골
김원길 시인

입술로 새를 접어
날리고 있네

포롱포롱 날더니
하늘가 앉아

반짝반짝 떠도는
별이 뜨누나

별 점점 선을 긋고
달빛 산산 깨어지고

술잔바다 파도 일어
찰랑이노니

그 새 떼 날아와
목 축이고 날개 씻고

혓바닥 입술마다
춤을 추는 피리소리.

 

 

 

 

피리소리

 

洪 海 里

 

 

아쉽고 그리워라
어릴 적 피리소리

끊 ·길 ·듯 ·끊 ·어 ·질 ·듯
이 - 어 - 지 - 는 - 가

천 마디 만 마디 말
소리 하나로

구멍마다 피가 돌아
윤이 나는데

물소리 바람소리
모두 모아서

강물을 잠재우고
대숲 재우고

달빛바다 올올 엮어
아른아른 피리소리

기러기 기러기 떼
하늘에 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