洪海里와 蘭

<蘭칼럼 3> 난을 보면

洪 海 里 2006. 11. 28. 17:59
 

난을 보면


   이번에는 지난 창간호에 실었던 시「난을 보면」의 해설로부터 이야기를 끌어가야 하겠다. 제 눈이 안경이란 말이 있지만 난을 보는 사람들의 관점이란 비슷하리라 생각된다. 난을 찾아 주말이면 밤차를 타고 다음날 아침부터 자생지를 답사하다 보면 난이란 식물의 신통함에 감탄을 하게 된다. 식물군 가운데서 가장 진화된 고등식물이 난이란 점에서 볼 때 우리 인간과의 닮은 점이 많다는 것은 당연지사일 것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자생지의 지세를 보면 사람들이 터잡아 살고 싶은 명기요, 죽어서 묻히기를 원하는 명당자리이다.


  동남향 산기슭에 소나무들이 모여 살아 시원한 솔바람이 지나가고 맑은 햇빛이 걸러지는 곳, 산기슭 아래로는 잔잔한 호수가 그린 듯이 펼쳐져 있는 곳, 마을에서 한가히 노니는 닭들의 울음소리와 개 짖는 소리가 들려오는 곳, 그런 곳에 다소곳한 초가지붕의 곡선을 이루고 난은 살고 있다. 소나무 바늘 사이로 겨울이면 햇볕이 따사롭고 여름이면 뜨거운 햇살을 어느 정도 막아주며 호수에서 올라오는 알맞은 습도가 난을 살지게 한다.


  자생지를 답사해본 사람이면 누구나 느꼈겠지만 난은 핵가족주의를 경원한다. 씨앗이 땅에 떨어져 난균을 만나 한 개의 생명체로서의 일생을 시작하면 수 십 년이 지나도 그 자리에서 몇 대, 아니 몇 십 대가 오순도순 정답게 대가족으로 살고 있다. 비록 한 세대의 잎의 생명이 진하면 지저분한 것을 남기지 않고 잎은 미련없이 이승을 하직한다. 똑 소리가 날 것만 같은 잎의 떨어짐에서 우리는 옛선비들의 지조를 느낄 수 있지 않을까. 잎이 떨어지고 고구경만 남아 지나온 연륜을 자랑하며 가계의 족보를 펼치고 있는 것을 보면 우리 민족의 비참했던 역사를 보는 것 같아 숙연해진다.


  난이 사는 곳은 부자흙이랄 수 없는 척박한 땅이다. 자갈밭에 부엽이 쌓여 가난한 집의 밭뙈기 같다. 그러나 그곳에 뿌리를 뻗고 한 집안을 이루어 사는 모습은 더 이상 다숩을 수가 없이 정겹고 흐뭇하여 핵가족을 주장하는 젊은이들이 귀 기울여 들을 얘기가 들리는 듯 하다.


  새촉이 땅을 뚫고 솟아올라 자라나고 한여름 무더위에 솟아난 꽃봉오리가 가을 겨울을 지나 봄이 되어 꽃을 피우면 그 모습은 사랑 바로 그것이다. 양팔을 벌려 감싸고 보듬어 안는 듯한 모습은 바로 사랑하는 사람들의 자세요, 모든 것을 포용하는 군자의 마음가짐이다. 더구나 꽃을 가만히 들여다 보면 하늘과 땅이 보이고 하늘엔 투박한 사내가 땅에 있는 질박한 여인네와 사랑의 속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그 사랑은 오랜 세월의 비바람과 눈보라를 이겨낸 맑고 고요하고 그윽한 사랑이지 만나자마자 불꽃을 튕기는 즉석사랑은 아니다. 난은 인간이다. 아무리 남녀평등, 여성상위 시대를 부르짖어도 남자는 남자, 여자는 여자가 아닌가. 난꽃은 알을 품고 있는 암컷과 하늘에 떠서 돌며 지키고 있는 수컷새의 형상이다.


  난은 가장 한국적인 식물이요, 그 꽃은 한국인의 은근과 끈기와 강인함을 그대로 보여준다. 반만년 역사의 긴 흐름속에 늘 외부의 침략에 당하기만 하면서도 끈질기게 살아남은 우리 선조들의 꺾이지 않았던 얼과 그 생명력이 피워내는 꽃이다.


  난꽃은 요란하게 화장을 하지 않은 한국의 미인이다. 요즘이야 미인의 조건도 서구화하고 말았지만 난꽃은 화려한 옷으로 감싸지 않아도 그대로 아름답고 매력적이다. 단순히 아름다운 것보다 매력적인 것의 생명이 길지 않은가.


  삼사월 난꽃이 어우러진 남도지방의 자생지에 가서 보라. 한 포기에 수 십대의 꽃이 쏟아져 나와 피어 있는 광경은 마치 농악을 신명나게 연주하는 흥겨운 한판 놀이터다. 꽹과리 장고춤으로부터 노래란 노래, 춤이란 춤을 모두 모아 신나게 벌이고 있는 꽃잔치마당이다. 소리가 없다고 노래가 아니요, 움직임이 없다고 어찌 춤이 아니라 하랴. 소리 없고 움직임이 없어도 온누리에 그대로 퍼지는 노래요 춤이다.


  누가 우리 난에 향이 없다고 하는가. 물론 대개는 비릿하고 밋밋한 향을 지닌 개체가 많다. 그러나 그 꽃들이 어우러졌을 때도 그렇던가? 난꽃을 모르는 이들은 초록색의 꽃이 없다고 하지만 난꽃의 주색은 녹색이다. 이파리도 녹색, 꽃도 녹색, 녹색의 보석으로 피로한 눈을 맑게 해주고 마음의 졸음을 몰아내 준다.


  현실이 답답하면 우리는 그곳을 떠나려 한다. 날개를 달고, 초록빛 날개를 달고 상상의 나라로 가자. 하늘가를 하늘하늘 날다 돌아와 호수에 자신의 얼굴을 비추어 보자.


  대추꽃을 보았는가. 초록빛의 작디 작은 꽃, 있는 듯 없는 듯한 그 꽃의 향의 맑기가 마치 난향이다. 꽃 가까이 코를 가져간다 해서 진하고 강하고 달고 탁하지 않고 멀리 떨어져 있다 해서 약하고 연하고 미미하지 않다. 난향은 가까이 있으나 떨어져 있으나 맑고 깨끗하기가 마찬가지다. 난이 있어서 우리는 산을 찾는다. 난이 있어서 우리는 난을 기른다. 기른다기보다 함께 사는 것이다.

 

-『梅蘭山芳』(1985. 11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