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蘭과 난인蘭人
난蘭
천년
면벽한 비구의
화두요
무언의 말씀으로
올리는
넉넉한 기도
영혼의
녹색 언어로 읊는
서정시
소리없이
천상의 악기로 타는
가락
푸른 마당에 벌이는
끝없는
춤사위
촛불 오르는 동안
풀어야 할
매듭이다.
-졸시「난」의 전문
난바람이 서서히 불어오다 갑자기 거센 폭풍으로 변해 나라를 강타하고 있다. 이미 난에 날개가 돋기 시작했다. 실하고 깨끗해야 할 뿌리는 잘려나가고 거대한 날개만 퍼덕이고 있다. 바다 건너 불어온 바람을 타고 난이 날아다니고 있다. 누렇게 병든 이파리, 싹둑싹둑 가위질당한 몸뚱어리, 검은 점을 보석처럼 달고 난들이 퍼덕이고 있다. 누구네 난은 혓바닥만 살아 무성하고 누구네 난은 모가지만 살아 있다고도 한다. 난을 기르면 난이 된다는 옛고을을 지나 난을 기르면 개가 된다는 나라의 난실에서는 보신탕 냄새가 진동을 한다. 요즘은 고상하게 사철탕이라고 하니 사철 푸른 난과의 유사성이 더하는 것 같다. 이제는 보신탕의 냄새를 맡은 쥐새끼들까지 난실에 몰려들어 어린 싹을 잘라놓고 뿌리를 뒤집어 놓는다. 여담이지만 새끼개라고 하면 귀여운 느낌이 드는데 개새끼하고 하면 왜 귀에 거슬리는지 생각해 보면 재미가 있다. 여하튼 똥개 잡종견들이 난의 뼈다귀를 물고 으르렁 컹컹대면서 힘자랑을 하고 있는 소식을 들은 사군자인 맹상군, 평원군, 신능군, 춘신군이 부끄럽다고 눈을 감아버렸다고 한다. 사람은 보이지 않고 금덩이가 난을 안고 있어서 번쩍번쩍 우리의 눈을 부시게 하고 있다.
난경매가 지난 1982년 10월 두번째 일요일이었던 10일, 남문상가의 '매란방'에서 최초로 실시되었다. 그날은 각 일간지의 기자들도 모여들었고 텔레비전 방송국에서도 카메라를 들이대고 취재를 하던 광경이 눈에 선한데 벌써 50여회를 헤아리게 되었다. 그날 일번으로 경매에 나간 물건이 필자의 '춘란소심'이었다. 전남 해제반도산이었는데 10촉의 건강한 난으로 꽃대가 6개나 올라와 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 난이 지금쯤은 여기저기로 시집을 가서 예쁜 며느리로서의 역할을 다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경매를 처음 시작했을 때는 경매에 대한 지식이 없어서 폭소를 터뜨리게 하는 재미난 장면이 많았었다. 그런 광경이 요즘도 종종 눈에 띄어서 경매에 참여하는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고 있다. 경매자가 난의 품종이나 특성 등을 설명하고 난 다음 “50,000원!”하고 가격을 놓으면 그것을 사려는 사람도 똑같이 “50,000원!”하고 반복을 한다든지, 고 구경을 묻어 새촉을 받은 난을 싼 값으로 내놓으면 그가격이 건실한 난의 가격보다도 많은 액수까지 올라가게 되어 “그만, 그만!”하고 경쟁을 멈추게 하는 일이나, 중국란(혜란)의 '봉(鳳)'을 잡게 되면 “봉 잡았네!”하는 등 가만히 보고 들으면 두어 시간의 경매가 금방 끝나는 것 같다. 물론 봉(鳳)이란 ①봉황, ②봉황의 수컷을 뜻할 뿐 아니라 ③'빨아 먹기 좋은 사람', '빼앗아 먹기 만만한 사람'을 의미하니 “봉 잡았네!”하는 말 속에는 ‘봉을 잡았으니 술값일랑 걱정없다’는 저의가 내포되어 있는 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요즘 경매장의 풍경을 보면 서로 자성해야 할 일들이 종종 눈에 들어온다.
첫째는 흡연 문제다. 내가 내 담배를 피우는데 네가 무슨 상관이냐 한다면 할 말은 없다. 그리 넓지도 못한 공간에 많은 사람들이 꽉 들어차 있는데 담배연기를 공장 굴뚝처럼 뿜어내서야 쓰겠는가. 애연가들에겐 미안한 말씀이나 잠시 밖에 나가서 끽연을 즐기고 난을 보고 난을 다루는 장소에서는 금연을 해 주었으면 한다. 요즘은 세계 여러 나라에서 금연운동을 벌이고 있다. '내가 피워 자살 행위, 남이 마셔 살인 행위'라는 표어나 해골을 그려놓은 포스터가 용고뚜리에게 아무런 효력이 없다면 문제는 심각하다.(용고뚜리란 담배를 지나치게 피우는 사람을 뜻하는 순수한 우리말이다)
기왕에 경매 얘기가 나왔으니 두어 가지 더 보태야겟다. 우리가 경매장에 나가는 것은 물론 자기에게 필요한 적당한 난을 구입하는 것이 첫번째 목적일 것이다. 그러나 경매장은 난인들이 서로 만나 그간의 난 이야기를 나누는 만남의 장소요, 난에 관한 지식, 정보를 나누어 갖고 습득하는 배움의 장소라고 생각된다. 만남의 장소로써의 경매장은 경매가 시작되기 전과 끝난 후의 일이요, 배움의 장소는 경매가 진행되는 동안 난의 종류, 특성, 재배법 등에 관한 설명을 들으면서 새로운 사실을 익히는 장소로써의 역할이다.
간혹 몇몇이 가까운 사이끼리 모여 앉다보니 경매가 진행되는 동안에도 주변 사람들에게 방해가 될 만큼 큰 소리로 떠들어대는 사람들이 있다. 경매에 참여한 사람이라면 난에 관심이 있고 그래서 난을 더 갖고자, 더욱 깊이 알고 잘 길러보고자 하는 마음에서 모였을 텐데---염불보다 잿밥에 관심해서야 될 일인가. 다같이 조용하고 진지한 가운데 경매가 끝날 수 있도록 협조하는 정신을 가져야겠다.
또 한 가지 서글픈 얘기는 경매가 끝나고 자기가 산 난의 대금을 치르지 않고 그냥 가버리는 사람이 있다고 하는 후문이다. 꽃을 돈 주고 사고 파는 것이 우리 동방예의지국의 미풍양속에 저촉되는 일이라서 옛날에 참외 서리하듯 난서리 재미를 즐기는지는 모를 일이나 이왕 돈을 주기로 하고 산 것이라면 피차에 지킬 것을 지켜야 도리인 것이다. 물론 의도적으로 그러는 사람이야 없겠지만 어쩌다 그리던 난을 입수하게 된 나머지 너무 기뻐 깜빡했다면 그 후에라도 대금을 지불함이 마땅한 일이다. 경매가 계속될수록 낯선 사람들의 출현이 많은 것은 난의 보급이 빨리 그리고 널리 전파되고 있는 것으로 풀이되어 기쁜 일이지만 종종 바람직하지 않은 일이 있어 눈쌀을 지푸리게 한다. 우리가 난을 기르기 시작하고 취미로서의 맛과 멋을 느끼려 한다면 그냥 풀을 기르는 것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 그 풀은 마음의 풀이요, 정신의 풀이요, 영혼의 풀이요, 기도의 풀이요, 예술의 풀이어야 한다. 취미라고 하는 것은 돈으로 환산될 때 그 가치는 죽는다. 여가 시간에 재미로 하는 취미생활---그것이 우리에게 주는 즐거움이야말로 진정 값진 보석이다.
채란 여행은 늘 우리를 들뜨게 한다. 새로운 것에 대한 기대란 언제나 신선한 감동이다. 양지쪽의 일년생 풀들이 누렇게 한 해를 결산하고 찬서리가 기러기 떼를 밤하늘에 날릴 때가 되었다. 자생란에 관심 있는 사랍들은 벌써 마음이 남도지방에 가 있다. 행선지를 정하고 날짜를 꼽고 차편을 확인하고여기저기 연락을 하면서 지도 위에 꿈을 부풀리고 있다. 금년 봄에 새싹이 나와 변이된 아름답고 귀한 난들이 손짓을 하고 있다. 들리는 바로는 벌써 몇 차례 산행을 한 사람들도 있다는 얘기다. 나무와 풀이 무성하게 우거진 산등성이를 아카시아나 청미래덩쿨에 긁히고 찔리면서 또 독사와 쐐기를 피하면서 땀을 흘리는 산행도 묘미는 있다. 그러나 욕심을 내서는 안될 일이다. 이제부터라도 산행을 하는 사람들은 난을 더욱 사랑하도록 노력해야겠다. 자생지에 가서 흔히 보게 되는 난의 시체더미가 우리를 슬프게 하는데 돈을 벌기 위해서 채란을 가는 사람들도 이제 정신을 차려야 할 때다. 애란인이라면 함부로 난을 밟고 무지막지하게 캐낼 것도 아니요 어쩌다 뿌리가 뽑혀져 뒹굴고 있는 난을 만나며 고이 심어줄 일이다. 뿌리만 살짝 묻어주면 튼튼히 살 수 있을 텐데 그냥 나뒹굴고 있는 난을 만나면 한심한 생각이 들어야 마땅하다.
희귀한 변이종이나 돌연변이한 난을 찾는 일만큼 버려져 있는 난을 보호하고 보살피는 일도 중요하게 인식해야겠다. 우리의 난을 보살펴야 할 사람은 바로 우리 자신뿐이다. 중국사람들이 와서 우리 난을 보호 육성해 줄 것인가, 아니면 일본사람들이 와서 우리 것을 개발 연구해 줄 것인가. 이참에 한 가지 권고하고 싶은 사항은 채란을 떠날 때 간단히 메모를 할 수 있는 준비를 하고 가라는 것이다. 난을 채란할 때의 주위 환경이나 자생상태, 정확한 지리적 사항 등을 적어 가지고 오면 앞으로 많은 도움이 되리라 믿는다. 가능하면 카메라를 휴대하고 가서 채란 전의 상태도 촬영해 두는 것이 바람직하다.
아무쪼록 우리의 귀한 난을 우리가 귀하게 여기는 풍토 조성에 앞장서야겠다. 자기 부모를 존경하지 않는 자가 누군들 존경할 수 있으며 또 자신을 귀히 여기지 않는 사람이 누굴 귀히 여기겠는가. 채란의 호기를 맞으면서 자신과 주변을 돌아보는 기회를 마련해 봄도 바람직한 일이라 여겨진다.
-『梅蘭山芳』(1986. 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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