洪海里와 蘭

<蘭칼럼 6> 난아 난아

洪 海 里 2006. 11. 28. 19:16
 

蘭아蘭아

 

         洪海里


뼈가 없는 네게는

뼈가 있는데


뼈가 있는 내게는

뼈가 없구나.


너는

겨울밤의 비수요

대추나뭇가시

차돌맹이요

불꽃이다.


네게는

햇빛으로 피는 평화

햇빛으로 쌓는 역사

햇빛으로 웃는 사랑

햇빛으로 아는 진실

햇빛으로 보는 영혼

햇빛으로 타는 침묵

햇빛으로 엮는 약속이 있다.


네게는

바람으로 오는 말씀

바람으로 맞는 기쁨

바람으로 크는 생명

바람으로 얻는 휴식

바람으로 벗는 고독

바람으로 거는 기대

바람으로 빗는 무심이 있다.


네게는

물로 닦는 순수

물로 아는 절대

물로 사는 청빈

물로 비는 허심

물로 우는 청일

물로 빚는 여유

물로 차는 지혜가 있다.


네 발은 늘 젖어 있고

내 손은 말라 있다.


마른 손으로

너를 안으면

하루의 곤비가 사라지고

먼 산 위에 떠돌던 별, 안개

바람이 네 주변에 내려


내 가는 손이 떨리고

마취된 영혼이 숨을 놓는다.


고요 속에 입을 여는

초록빛 보석

살아 있는 마약인 너


십년 넘게

네 곁을 지켜도

너는 

여전히 멀다.


  지난 6월에 나온 <매란산방> 5호를 보면 몇 달을 거르고 책이 나온 이유가 모두 내 탓으로 되어 있다. 물론 매란방 홍 사장이 변명 아닌 우스개로 한 말이긴 하지만ㅡ그간 되지도 않은 글을 읽어준 독자들에게 송구스러움을 금할 길이 없다. 홍 사장의 표현으로는 칼럼이 빠지니 맥이 빠진 것 같다고 했으니 이 글을 쓰기가 두려워진다. 이제 칼럼이 다시 들어가고 <매란산방>의 맥이 뛰게 되었으니 난계에 신선한 가을바람이 불었으면 하는 바람 간절하다. 그리고 이제부터 칼럼의 고료를 대폭 인상하라고 요구를 해야겠다. 각종 문예지나 여타의 잡지, 사보에 싣는 원고의 고료야 그렇다손 치더라도 소위 난을 하는 사람들이 만들고 보는 글인데 고료가 째째해서야 쓰겠는가. 일회분을 쓰면 '풍설' 한 분은 안고 가지 못한다 해도 '녹운'이나 적어도 '환구하정', '군기' 한 분은 들고 갈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난을 기르며 글을 씁네 하는 주제에 돈타령만 늘어놓고 있으면 난이 난으로 자라지 않고 개가 될까 두렵다. 더구나 요즘 난을 하는 사람들이 개 같다는 자탄 타탄의 소리가 여기저기서 드높은데 돈 얘기는 예서 빨리 덮어야겠다.

  난이 잡초임에는 틀림없으나 춘추시대의 인물 중에서도 고매한 인격과 학식을 지녔던 사군자의 칭호까지 붙여주고 우리가 가까이해온 지가 천년이 넘는데 어째서 요즘 난을 기르는 일이 부끄럽고 창피하게 되었는지 모두가 반성하고 옳은 길로 가도록 노력해야겠다. 난을 기르는 사람이면 조금이라도 다른 점이 있구나 하는 소리는 들어야 하지 않을까. 난을 기르면서 뭔가 느끼고 생각하고 깨우쳐서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나도 난을 길러봐야 겠다, 나도 난을 기르면 저렇게 될까 하는 마음을 갖게 할 수는 없을까?


 만우절로 4월은 와서

 수줍은 빛깔로

 개나리 진달래는 터지는데

 독가스가 눈물로 내리는

 안개의 거리 대학가

 돌팔매가 겨누는 곳은 어디인지

 심장인지

 허공인지

 오늘도

 독가스가 눈처럼 뿌려지고

 돌맹이가 즐비한 거리를

 택시로 지나다

 아픈 눈으로 하늘을 본다

 명안과에서

 김안과로

 다시 신안과에서

 대학병원 안과로

 나의 눈은 끌려 다닌다

 희망과 나락

 어둠과 빛

 그 가는 틈서리를

 왔다 갔다 하며

 4월은 깊어가는데

 뿌연 하늘 아래

 그날은 언제인지

 오늘도 병원으로 가는 길에

 절망시편을 속으로 읊는다.

 나비 한 마리 날지 않는다.

                    ㅡ 졸시「절망을 위하여」 전문

 

   금년은 내게 있어 시련의 해인가 싶다. 이제까지 병원이란 곳을 별로 관심하지 않고 사십대 중반을 넘어섰는데 갑자기 병원신세를 톡톡히 지고 말았다. 정말로 날벼락이었다. 우리 신체의 장기 가운데 어느 하라나도 덜 중요한 부위가 있으랴만 그중에서도 눈은 다른 곳보다 신경이 예민하고 날카로운 기관이 아닌가 한다.

  위에 전문을 인용한「절망을 위하여」는 병원에 다닐 때의 상황을 그려본 작품이다. 한 가닥의 희망을 찾아 이 병원 저 병원을 찾아다닐 때 학생들의 시위로 어수선한 상황을 내 개인적인 문제와 중첩시켜본 것이다.

  그간 삼 개월을 병원에 누워 지내면서, 또 퇴원을 하고 통원치료를 받으면서, 휴직기간 동안 집에서 요양을 하면서, 참으로 많은 생각의 늪에 깊이 빠져 볼 수 있었다. 건강에 관한 생각도 하고 인생에 대해서도 많은 시간을 흘려보내며 뭔가 잡아보려고 노력을 했다. 그러나 잡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송사리 한 마리 없었던 것을 지금 생각하면 다행이라 여겨진다. 그래야 또 투망을 던질테니까.

  이제까지 살아온 반생을 돌이켜보면 뭐 한 가지 잘한 것도 이루어 놓은 것도 없다. 모두 잘못한 일뿐이어서 머리만 어수선하다. 자식으로서, 아이들의 애비로서, 친구로서, 가르치는 사람으로서, 난을 기르는 사람으로서, 시행착오만 해왔을 뿐이다.

  내 인생의 주인공은 나일 뿐인데 내게 주어진 일회적인 삶을 무의미하게 허비할 수는 없지 않은가 하는 생각에 앞으로는 내 자신에게나 남에게나 진실되고 착하고 아름답게 살아야겠다는 마음가짐을 하게 되었다.

  난을 가까이하고 기르는 일도 그렇다. 깨끗하고 멋지게 길러보지 못하고 늘 죽이는 연습만 하고 있으니 참으로 한심한 일이다. 그래서 자주 자문을 하게 된다. 왜 난을 기르는가? 전에도 '우리는 왜 난을 기르는가' 하고 물은 적이 있지만 다시 한 번 묻고 싶다. 내가 나에게, 내가 너에게, 아니 우리가 우리에게 묻는다. 왜 난을 기르는가?

  난의 곁을 지켜온 지 십년이 넘으면서도 아직 난을 난으로 기르지 못하고 있다. 잎을 깨끗하게 뽑아내지도 못하고 제때에 꽃을 피우지도 못하고, 무늬를 아름답게 하지도 못하는 안타까움 속에 아는 체하고 흉내만 내고 있다. 집에서 고생에 찌든 난들의 말이 들린다. ‘참 한심한 친구로군! 난을 기르면 난이 된다는데 너는 차라리 개나 길러라. 그래서 개나 되어라’하고.

 

  (『梅蘭山芳』1986. 9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