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푸른 느낌표!』에서 / 최석우'
가을 연가 / 洪海里
처서 백로 지나고 한로도 지나
초라해진 풀잎에 맺히는 이슬
방울방울 시리게 몸을 떠네
눈 시려 눈이 시려
아침 안개에 마음마저 부셔
바래지는 어둠 속으로
가는 이 없어도 마음 서럽고
슬픈 일 없어도 눈물은 젖어
이슬방울 안경 삼아
뒤돌아보면 출렁이는 바다
파도만 끝없이 가슴을 치고
버리지 못하고 흘러가는 세월
비단길 같은 꿈길도 외로워
길 따라 피어나는 눈물이거나
끝없이 따라오는 그리움이여, 이제
눈에 선히 밟히는 별이 되거라
함부로 사랑한다 말하지 말고
스쳐 지나는 바람의 손짓 따라
너의 목숨을 흔들어 대며
몌별袂別 연습을 하지 말거라
텅 빈 들녘으로 비어 있는 하늘로
가을은 가고 겨울은 젖고 있으니.
연가 두 닢
하나. 침향枕香, 그 식물성 사랑
두 줄기 강물이 만나는 곳
깊은 펄 속에 잠겨
정지된 기나긴 시간
천년 세월을 이겨낸
참나무 고목처럼
외로움이 되어버린 내가
너에게 기대어
꿈을 꾸노니,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한 닢의 어둠
마지막으로 너에게 막막히 갇히노니.
둘. 귀천歸川, 그 동물성 사랑
너에게 엎어져
아련히 구르노라면
하루 한나절 네 숨소리에 취해
마음 맑은 슬픔이 되랴
네 몸에 맺힌 이슬
내 입술만 죽여도 나는
온몸이 다 젖어
기다리노니, 눈물로 기다리노니
모천母川에 돌아온 한 닢의 사랑
내 종일 젖어 앓고 앓노니.
초여름에서 늦봄까지
1
그해 여름
혼자
빨갛게 소리치는
저 장미꽃더미 아래
나는
추웠네
한겨울이었네
속살 드러내고 속살대는
초여름 문턱에 서서
나무들은 옷을 껴입고 있었네
연초록에서 진초록으로.
2
천둥과 번개 사이로
불볕더위가 느릿느릿 지나가고
흰 이슬 방울방울
지천으로 내리는
황금벌판...
발가벗고 누워도
부끄럽지 않았네.
온몸의 광채
저 높은 거지중천으로
흥겹게 퍼져
하늘을 덮고 있었네
가슴에 응어리진
아픔의 알갱이도 금빛으로 익어
투명한 빛살로 원을 그리고
견고한 열매 속
하늘로 하늘로 길이 열리고 있었네.
3
온 세상에 흰눈이 내려쌓여
천지가 적막에 잠길 때
포근한 눈이불을 뒤집어쓴
보리밭 이랑이랑
별로 뜨고 있었네, 나는
긴긴 밤 서성이며
잠 못 드는 저 보리 싹들을 안고
일어서는 은빛 대지는
가장 지순한 한 편의 위대한 시를
깊이깊이 품어 안은 채
수천수만의 꽃봉오리를 밝히고 있었네.
4
산비둘기 울음으로
쑥 냉이 꽃다지 벌금자리로
돋는 사랑이여
차라리 질경이 속에 들어가
작디작은 씨앗이 되어
그리움이 이는 풀밭 길
연초록으로 피어나고 싶네
빛과 어둠
시작과 끝
삶과 죽음을 잇는 끈이 되어
두 손길 마주잡고
눈에 젖는 사랑
따숩은 세상길에
그의 시간이 되고 싶네
무량공간으로, 나는.
가벼운 바람
사람아
사랑아
외로워야 사람이 된다 않더냐
괴로워야 사랑이 된다 않더냐
개미지옥 같은 세상에서
살얼음판 같은 세상으로
멀리 마실갔다 돌아오는 길
나를 방생하노니
먼지처럼 날아가라
해탈이다
밤안개 자분자분 사라지고 있는
섣달 열여드레 달을 배경으로
내 생의 무게가 싸늘해
나는 겨자씨만큼 가볍다.
상사화相思花
내가
마음을 비워
네게로 가듯
너도
몸버리고
마음만으로
내게로 오라
너는
내 자리를 비우고
나는
네 자리를 채우자
오명가명
만나지 못하는 것은
우리가 가는 길이 하나이기 때문
마음의 끝이 지고
산그늘 강물에 잠기우듯
그리움은
넘쳐 넘쳐 길을 끊나니
저문저문 저무는 강가에서
보라
저 물이 울며 가는 곳
멀고 먼 지름길 따라
곤비한 영혼 하나
낯설게 떠도는 것을!
**구둣점과 연가름에 있어 원문과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보름 전에 '도서출판 우리글'에서 출간된 홍해리 선생님의 시집『푸른 느낌표!』(우리글, 2006)에서 제 취향대로 고른 시 5편입니다. 시집을 펼치면 우선 너무 예쁜 글씨체가 눈에 띕니다. 시집 발간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 최석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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