洪海里 詩 다시 읽기

시집『푸른 느낌표!』의 10편의 시 읽기

洪 海 里 2007. 1. 19. 17:07
시집『푸른 느낌표!』의 10편의 시 읽기

 

청명淸明 


손가락만한 매화가지

뜰에 꽂은 지

몇 해가 지났던가

어느 날

밤늦게 돌아오니 

마당 가득

눈이 내렸다

발자국 떼지 못하고

청맹과니

멍하니 서 있는데

길을 밝히는 소리

천지가 환하네.


 

가벼운 바람

 

사람아

사랑아

외로워야 사람이 된다 않더냐

괴로워야 사랑이 된다 않더냐

개미지옥 같은 세상에서

살얼음판 같은 세상으로

멀리 마실갔다 돌아오는 길

나를 방생하노니

먼지처럼 날아가라

해탈이다

밤안개 자분자분 사라지고 있는

섣달 열여드레 달을 배경으로

내 생의 무게가 싸늘해

나는 겨자씨만큼 가볍다.


 

산벚나무 꽃잎 다 날리고 
―隱寂庵에서
      

꽃 지며 피는 이파리도 연하고 고와라
때가 되면 자는 바람에도 봄비처럼 내리는
엷은 듯 붉은빛 꽃 이파리 이파리여
잠깐 머물던 자리 버리고 하릴없이,
혹은 홀연히 오리나무 사이사이로
하르르하르르 내리는 산골짜기 암자터
기왕 가야할 길 망설일 것 있으랴만
우리들의 그리움도 사랑도 저리 지고 마는가
온 길이 어디고 갈 길이 어디든 어떠랴
하늘 가득 점점이 날리는 마음결마다
귀먹은 꽃 이파리 말도 못하고 아득히,
하늘하늘 깃털처럼 하염없이 지고 있는데
우리들 사는 게 구름결이 아니겠느냐
우리가 가는 길이 물길 따르는 것일지라
흐르다 보면 우리도 문득 물빛으로 바래서
누군가를 위해 잠시 그들의 노래가 될 수 있으랴
재자재자 끊임없이 흘러가는 물소리 따라
마음속 구름집도 그냥 삭아내리지마는
새로 피어나는 초록빛 이파리 더욱 고와라.


 

우도牛島에서 


한 남지가 바다로 들어가고

또 한 남자가 따라 들어가고


그해 겨울

우도 바닷가에는


무덤마다 갯쑥부쟁이가 떼로 피어

바다만 바라보고 있었다


남정네들 떠나간 자리마다

눈빛이 젖어


낮게 낮게 몸을 낮추고

하염없이 바다만 바라보고 있었다.

 

 

시詩를 찾아서

 

세상이 다 시인데,

앞에서 춤을 추던 놈들

눈으로, 귀로 들어와

가슴속에서 반짝이다

둥지를 틀고 있다

바다에 그물을 친다

나의 그물은 코가 너무 커

신선한 시치 한 마리 걸리지 않는다

싱싱한 놈들 다 도망치고

겨우 눈먼 몇 마리 파닥이는 걸

시라고, 시라고 나는 우긴다

오늘밤엔 하늘에 낚시를 던져

별 한 마리 낚아 볼까

허공의 옆구리나 끌어당겨 볼까

물가에 잠방대는 나의 영혼

지는 노을이나 낚을까 하다

미늘만 떨어져 나가고

수줍게 옷고름 푸는 별도 잡지 못하고

천년이 간다

길은 산보다 낮은데

나는 산 위에서

우모羽毛 같은 몸으로

천리는 더 가야 하리라

시를 만나려면.

 

 

먹통사랑 


제자리서만 앞뒤로 구르는

두 바퀴수레를 거느린 먹통,

먹통은 사랑이다

먹통은 먹줄을 늘여

목재나 석재 위에

곧은 선을 꼿꼿이 박아 놓는다

사물을 사물답게 낳기 위하여

둥근 먹통은 자궁이 된다

모든 생명체는 어둠 속에서 태어난다

어머니의 자궁도 어둡고

먹통도 깜깜하다

살아 있을 때는 빳빳하나

먹줄은 죽으면 곧은 직선을 남겨 놓고

다시 부드럽게 이어진 원이 된다

원은 무한 찰나의 직선인 계집이요

직선은 영원한 원인 사내다

그것도 모르는 너는 진짜 먹통이다

원은 움직임인 생명이요

또 다른 생명을 탄생시키기 위해 직선이 된다

둥근 대나무가 곧은 화살이 되어 날아가듯

탄생의 환희는 빛이 되어 피어난다

부드러운 실줄이 머금고 있는

먹물이고 싶다, 나는.

 

 

바다에 홀로 앉아


도동항 막걸리집 마루에 앉아

수평선이 까맣게 저물 때까지

수평선이 사라질 때까지

바다만 바라다봅니다

두 눈이 파랗게 물들어

바다가 될 때까지

다시 수평선이 떠오를 때까지.

 

 

설중매雪中梅

 

창밖, 소리 없이 눈 쌓일 때

방안, 매화,

소문 없이 눈 트네

몇 생生을 닦고 닦아

만나는 연緣인지

젖 먹던 힘까지, 뽀얗게

칼날 같은 긴, 겨울밤

묵언默言으로 피우는

한 점 수묵水墨

고승, 

사미니,

한 몸이나

서로 보며 보지 못하고

적멸寂滅, 바르르, 떠는

황홀한 보궁寶宮이네.

 

 

해장술 한잔 할까, 우리?

 

 토막토막 끊긴 생각들이

밤새도록 빈집을 짓고 있었다

불타는 집을 짓고 있었다

새벽녘 불집 속에서 잠이 깨면

빈집은 이미 없다

세상은 있음과 없음으로 존재하고

높고 낮음으로 갈라지고

강하고 약함으로 싸우고 있다

가장 부드러운 견고함으로

눈물 젖은 절망의 파편들이

머리 속에 총칼을 들이대고 있다

악을 쓰던 간밤의 허망과

간 길 다시 간 생각으로

흔들리는 새벽녘

뿌연 안개치마에 감싸인 세상

콩나물국이나 북어국으로

희망 하나 발가벗은 채 달려가고

냉수 대접 속에서 재생하는데

해장술 한잔 할까, 우리?

 

 흔적

 

창 앞 소나무

까치 한 마리 날아와

기둥서방처럼 앉아 있다

폭식하고 왔는지

나뭇가지에 부리를 닦고

이쪽저쪽을 번갈아 본다

방안을 빤히 들여다보는 저 눈

나도 맥 놓고 눈을 맞추자

마음 놓아 둔 곳 따로 있는지

훌쩍 날아가 버린다

날아가고 남은 자리

따뜻하다.

(월간『스토리문학』2007. 1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