洪海里 詩 다시 읽기

다시 읽는 11편의 시 /『봄, 벼락치다』

洪 海 里 2006. 11. 19. 13:33

 * 다시 읽는『봄, 벼락치다』의 11편의 시 *

 

* 날아가는 불

 

洪 海 里


 

평생 퍼마신 술이라는 이름의 물로
이 몸은 술통이 되었다
술독이 오른 술독이 되었다
술독이 오르니 온몸에 술의 독이 퍼지고
술병이 든 술병이 되었다
온몸이 술이 되었다
몸은 없고 술만 있다
바람에도 날아가고
물 한 방울에도 씻겨내리는
아무것도 없는 몸이 되었다
의사는 알콜성 영양실조 진단을 내리고
금주를 선고했다
나는 금주주의자가 되었다
이제 나는 비어 있는 주막이 그립다
깨진 유행가 가락만 떠도는
그리운 술집,
물 속의 불집, 불의 집,
나는 술이 고픈 나그네가 되었다
아, 나는 떠도는 불이다
불의 집을 안고 날아가는
나는 술이다.

 

 

* 玉梅園의 밤



수천 수만 개의 꽃등을 단 매화나무가 날리는 香이 지어 놓은 그늘 아래 꽃잎 띄운 술잔에 열이레 둥근 달도 살그머니 내려와 꽃잎을 타고 앉아 술에 젖는데,

꽃을 감싸고 도는 달빛의 피리 소리에 봄밤이 짧아 꽃 속의 긴 머리 땋아내린 노랑 저고리의 소녀가 꽃의 中心을 잡아,

매화를 만나 꽃잎을 안고 있는 술잔을 앞에 놓고 부르르부르르 진저리를 치고 있는
詩人들,

차마
盞을 들지도 못한 채 눈이 감겨 몸 벗어 집어던지고.

 

 

* 요요


우체국 가는 길
초등학교 앞
어른 키만한 나무
구름일 듯 피어나는 복사꽃
헤실헤실 웃는 꽃잎들
가지 끝 연둣빛 참새혓바닥
일학년 일과 파할 무렵
이따끔 터지는 뻥튀기
혼자서 놀고 있는 눈부신 햇살

요요하다.

 

 

* 찔레꽃


장미꽃 어질머리 사이
찔레꽃 한 그루
옥양목 속적삼으로 피어 있다.

돈도 칼도 다 소용없다고
사랑도 복수도 부질없다고
지나고 나서야 하릴없이 고개 끄덕이는
천릿길 유배와 하늘 보고 서 있는 선비.

왜 슬픔은 가시처럼 자꾸 배어나오는지
무장무장 물결표로 이어지고 끊어지는 그리움으로
세상 가득 흰 물이 드는구나.

밤이면 사기등잔 심지 돋워 밝혀 놓고
치마폭 다소곳이 여미지도 못하고 가는
달빛 잣아 젖은 사연 올올 엮는데,

바람도 눈 감고 서서 잠시 쉴 때면
생기짚어 피지 않았어도
찔레꽃 마악 몸 씻은 듯 풋풋하여
선비는 귀가 푸르게 시리다.

 

 

 

* 처음이라는 말


'처음'이라는 말이 얼마나 정겨우냐
'첫'자만 들어도 가슴 설레지 않느냐
첫 만남도 그렇고
풋사랑의 첫 키스는 또 어떠냐
사랑도 첫사랑이지
첫날밤, 첫새벽, 첫정, 첫걸음, 첫나들이
나는 너에게 마지막 남자
너는 나에게 첫 여자이고 싶지
첫차를 타고 떠나라
막차가 끊기면 막막하지 않더냐
"처음 뵙겠습니다
잘 부탁합니다"
그렇게 살 수는 없을까
하늘 아래 새것은 없다지만
세상은 새롭지 않은 것 하나 없지
찰나가 영원이듯
生은 울음으로 시작해 침묵으로 끝나는
물로 시작해 불로 끝나는
홀로 왔다 홀로 가는 긴 여로
처음이란 말이 얼마나 좋으냐.

 

 

 

 * 뫼비우스의 띠
    - 첫눈


1
너는
천리 밖

나는
만리 밖

칠흑빛
어둠.


2
너의 새끼손가락 손톱 속에는
아직도 분홍빛 바람이 떠도는가

눈에 묻히는
동백꽃 송이.


3
새벽 까치부부가 마당에, 몰래
그려 놓은 뫼비우스의 띠.

묘명하다.

 

 

* 일탈逸脫


1
귀 눈 등 똥
말 멱 목 발
배 볼 뺨 뼈
살 샅 손 숨
씹 이 입 좆
침 코 턱 털
피 혀 힘---

몸인 나,
너를 버리는데 백년이 걸린다
그것이 한평생이다.

2
내가 물이고
꽃이고 불이다
흙이고 바람이고 빛이다.

그리움 사랑 기다림 미움 사라짐 외로움 기쁨 부끄러움 슬픔 노여움과 눈물과 꿈, 옷과 밥과 집, 글과 헤어짐과 아쉬움과 만남 새로움 서글픔
그리고 어제 괴로움 술 오늘 서러움 노래 모레 두려움 춤 안타까움 놀라움 쓸쓸함
(내일은 없다)
그리고 사람과 삶, 가장 아름다운 불꽃처럼
우리말로 된 이름씨들 앞에서
한없이 하릴없이 하염없이 힘이 빠지는 것은
아직 내게 어둠이 남아 있기 때문일까
한 그릇의 밥이 있어서일까
일탈이다, 어차피 逸脫이다.

 

 

 

* 추억, 지다


한여름 다 해질녘
봉숭아 꽃물을 들인다
꽃을 따 누이의 손톱마다
고운 물을 들인다
이쁜 반달 손톱 속에는 벌써
첫눈이 내린다
매미 소리 한철 같은 누이의
첫사랑이 내린다
추억이 짓는 아스라한 한숨소리
손톱 속으로 스며들고
손가락 꼭꼭 싸맨 그리움이
추억추억 쌓이고 있다
해 설핏한 저녁에 꽃물을 들이는
눈썹 마당에 이는 바람인 듯
슬슬슬 어스름이 내릴 때
가슴속에선 누가 북을 치고 있는지
다소곳 여민 적삼 안으로
그리움이 스멀스멀 스며들고
입술 촉촉 젖어 살짝 깨무는 소리
어스레한 누이의 젖은 눈가로
봉숭아꽃 하나 둘 지고 있었다.

 

 

 

* 팽이는 때려야 돌고 돌아야 선다



멈춘 팽이는 죽은 팽이다
죽은 팽이는 팽이가 아니다
토사구팽이다

멈추면 서지 못하는
팽이를 때려 다오
돌아서 서도록 쳐 다오

너의 팽이채는
쇠좆매,
윙윙 울도록 때려 다오

중심을 잡고
불불대도록,
불립문자가 되도록 쳐 다오.

 

 

 

 * 點心에 대하여



점심은 한가운데 점을 보는 것이다
오늘 점심은 마음에 까만 점을 놓는다
아니, 가슴에 불을 켠다
배꼽은 텅 빈 바다에 둥둥 떠 돌고 있다
오늘 점심은 2500원짜리 자장면으로 때운다
매끄러운 면발의 먼 길을 들고 나면
전신으로 졸음이 솔솔 불어온다
자장자장 자장가도 흘러든다
금방 그릇 가득 희망과 절망이 출렁인다
2500원이면 퇴계 선생 두 분과
은빛 하늘을 날아가는 학이 한 마리
자장면을 비울 때는
자장면이 아니라 짜장면이라고 해야 짜장,
맛이 더 나는지 알 수가 없다
나와 나 사이의 틈새를 날릴 소주 한잔 속에
가벼운 봄날을 새 한 마리 졸고 있다
도포를 입으면 도포짜리
삿갓을 쓰면 삿갓짜리가 되지만
도포도 없고 삿갓도 없어
봄날이 짜릿짜릿하다
슬픔의 힘은 아름답고 점심은 즐겁다
퇴계 두 분과 한 마리 학을
까만 자장면과 바꾸는 일은 위대한 거래다
눈을 감으면
세 마리 학이 나른나른 날고 있다.

 

 

 

* 다시 詩를 찾다


물속으로 내리박았던
물총새,
나뭇가지에 앉아, 잠시,
진저리치듯.

온몸을 폭탄으로
또다시,
물속에 뛰어들기 위하여
물속을 들여다보듯.


(시집『봄, 벼락치다』우리글. 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