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詩』와 우이시낭송회

[스크랩] 『우리시』 2007. 2월호[제224호]

洪 海 里 2007. 3. 23. 04:49


 

바람과 실존의 문제 / 조병기

 

  어느해 늦가을 첫눈이라도 올 듯한 적막한 밤이었다. 뜰가에 서니 아파트 불빛들이 꺼졌다 켜지고, 켜졌다 꺼지곤 한다. 명멸하는 별빛 같기도 하고 임종직전의 맥박 같기도 했다.

  뜰 한 귀퉁이에서는 바람들이 낙엽을 쓸고 있었다. 나무들은 찬란했던 지난 계절을 털어버리고 적막한 어둠속에서 앙상하게 서 있었다. 비로소 엄습해 오는 허무와 무상함! 그 날 밤은 뜬눈으로 지새우고 만다. 아스팔트길 위에서 납작하게 깔려죽은 강아지, 수년동안 뇌암을 앓다가 딸 둘을 남겨둔 채 머리가 다 빠져 세상을 버린 아내의 친구, 그 뿐이 아니다. 국토개발 한답시고 수십 년 묵은 거목들이 순식간에 뭉떵뭉떵 잘려나가는 기억을 지울 수가 없다.

 

부산한 뜰 위에서

그대들은 가을을 쓸고 있었네

안부가 묻고 싶을 때

그대들은 그렇게 가고

죽는 일만큼이나 어렵게

사는 일만큼이나 어렵게

풀잎도 재우고 약속도 날려 보내고

안개 속에서 우리들의 질문은 시작되나 보다

비밀스런 가지들의 흔들림

무성함 말의 숲을 관통하면서

빈 뜰 위에서 잠들지 못하는 기침소리.

-졸시[바람에게]에서-

 

  세상살이가 많이 좋아졌다고들 한다. 먹을 것도 걱정이 없어졌고, 얼마큼 문화생활도 할 수 있으니 이만하면 행복한 것 아니겠는가. 어머니는 오래오래 사시는 줄로만 알았는데 어머니는 좋은 세상을 못 보시고 홀로 가난한 세상을 사시다가 저 세상으로 가셨다.

 

올해도 쑥잎은 무성하게 돋아나고 있습니다

철모르는 아이들처럼 논둑에서고 밭둑에서고

수북이 쑥쑥 자라고 있습니다

방천길 따라 남산만큼이나 배부른 가난을 이고

걸어오시는 당신

쑥 보퉁이에서 모락모락 입김이 서려옵니다

바람 편에나 당신의 안부를 물을까요?

묏등에 뻐꾸기 와서 한낮을 웁니다

-졸시[]에서-

 

  무엇이 우리를 절망하게 하고, 신바람 나게 하는가? 가끔씩 나는 헤아릴 수 없는 바람의 무수한 몸짓과 변용을 찾아 나서고 싶을 때가 있다. 결코 만나리라고는 생각지 않지만, 자연현상의 의미를 뛰어넘는 바람의 존재를 확인하고 싶을때가 있다. 결국 시는 자기무화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닐까?

  삶과 죽음, 신비와 허무, 방황과 일탈에서 오는 회의와 연민은 시를 쓰게 하는 모티프가 된다고나 할까. 유년의 바람 체험은 훗날 시적 체험으로 바뀌면서 시 쓰기의 창구가 되기도 한다.

 

보리모개 푸르게 패는 방천 둑

누이는 들찔레 덤불 속 꽃배암 보고

진저리를 친다.

들찔레 먹고 꾹꾹, 들쑥 먹고 꾹꾹,

잔등 너머 뻐꾸기 퍽이나도 울어쌓고

외갓집 간 엄마는 언제 올라는지

울타리 새로 술술 소나기 몰고 온 잡것들

머리칼 산발하고 멍석 위에 뒹굴다가

몰래 헛간으로 빠져나가 삼밭에 가서 눕고

가죽나무 까치집 쳐다보며 기침만 하던 할머니

기어코 저승으로 가시고 만다.

-졸시[마파람]에서-

 

  침묵의 음성이 들려온다.

"너희들이 서 있는 곳에 내가 서 있었고,

지금 내가 누워 있는 여기에 너희들도 누워 있게 될 것이다."

섭씨 45도의 고열을 콧바람으로 식힌다

하얀 바람이 와서 검은 머리를 빗질한다

차가운 열풍에 나부끼는 사막의 바람아.

-졸시[미라의 말]에서-

 

  시는 사물의 인간화와 인간의 사물화에서 인간과 사물이 육화肉化될때, 시는 더욱 생명력을 발휘하는게 아닐까? 때로 직관은 시작에서 큰 도움이 된다. 시인과 사물이 맞부딪칠 때 촉발되는 이미지는 상상력이 가시화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보면 영감과 직감은 무관하지 않으며 영감은 시신이 내려 주는 것이 아니라 오랜 체험의 축적에서 만들어진 상상력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빨이 희디흰 그 여자는

몸 전체에 불을 지르고 노래를 부른다

입이 큰 그 흑인 여자는

바다 같은 슬픔이나 되자고 흐느끼며

달려오라고, 달려가라고

외치고 있었다.

힘이 센 그 여자는

하늘이나 되자고, 바람이나 되자고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눈이 큰 그 여자는

황홀하게 부서지고 있었다.

-졸시[파도에게]에서-

 

  한때 시 쓰기를 포기한 적이 있다. 암울한 현실 앞에서 시는 아무것도 해결할 수 없고 바라만 보고 있어야 하는 무력함 때문이었다. 어느 날 아침 영등포역 출근길에서 만취가 된 여성 노숙자가 뿜어대는 원망과 분노를 보았다. 밤 열차를 타고 차창에 기대어 창밖을 내다본다. 눈이 부시도록 밝은 교회의 네온과 모텔 간판을 보면서 알 수 없는 우수에 잠긴다. 무엇이 우리를 슬프게 하고 무엇이 우리를 절망하게 하는가.

 

빨강 신호가 반짝거린다

지구 저 켠에서 누가 보냈겠지.

저승까지도 그 신호가 가는 것일까

잠자리 한 마리가 거미줄에 걸려

파닥이지만 몸살 하지만

모두가 허사로고 허사로고

바람이 몇차례 흔들어 보다가 포기하고 만다.

유리벽을 뚫고 들락거리는 막강한 힘 앞에서

무엇을 어쩌자는 게야

진득이는 거미줄에 갇혀 질식하는 것들

-졸시[휴대폰]에서-

 

더러 문명 비판적인 시가 좋을 때가 있다. 그 여성 노숙자와 같이 갇혀 있는 응어리를 분출하면서 무력한 의식을 깨워주기 때문이다. 이미 우리는 보이지 않는 거미줄 같은 정보망에 갇혀 살고 있는 존재가 된 지 오래다. 다시 한 번 실존의 문제에 부딪친다. 인간의 모순 앞에서 절망하고 만다. 아무리 거울 속에 들어가 내 얼굴을 찾고자 해도 빈 거울 뿐이다.

  언제부턴가 애이불상哀而不傷이라는 조선조 시론이 시작의 카타르시스적 일탈 행위를 막아주고 있다. 언어는 의식의 표현이고, 정서의 발현이다. 시의 언어는 외연적 의미망에서 벗어나 새로운 사물을 발견하려는 노력이 요구되고 수사적 기법보다는 진실이 드러나야 한다. 시작 과정에서 충분한 상상력과 현실적 체험이 만나서 또 하나의 생명을 잉태시켜야 한다. 언어의 역사성을 중시하고 언어의 본질적 접근 또한 사물의 본질 파악과 깊이 연관된다고 믿는다.

  시를 시이게 하는 것은 음악성 즉, 리듬이다. 아직까지도 시작이나 시 해석의 중요한 항목으로 음수율(자수율)을 빼놓지 않는다. 전통시가의 경우는 더욱 심하다. 시의 리듬은 자수율에 의한 기준보다는 의미단위, 또는 호흡단위에 두는 것이 시상의 제약에서 자유로울 수 있고, 시 낭송의 호흡 조절에도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직도 시인이라는 말이 두렵고 자신감이 없다. 대표작이 어떤 작품이냐고 물어 올때 참으로 당혹스럽다. 내 이름을 기억해 주는 작품 한 편 남기고 싶은 소망이 있기 때문에 시를 포기하지 못하는 것일까?

출처 : 우리시(URISI)
글쓴이 : 은비 원글보기
메모 : 『우리시』 2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