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봄, 벼락치다』2006

[스크랩] 홍해리 시인

洪 海 里 2007. 8. 13. 12:42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홍해리(洪海里) 시인
본명 洪峰義, 충북 청원 출생.
1964년 고려대학교 영문과 졸업.
시집
『투망도』(선명문화사, 1969) 『화사기』(시문학사, 1975) 『무교동』(태광문화사, 1976) 『우리들의 말』(삼보문화사, 1977) 『바람 센 날의 기억을 위하여』(민성사, 1980) 『홍해리 시선』(탐구신서 275, 탐구당, 1983)『대추꽃 초록빛』(동천사, 1987) 『청별』(동천사, 1989) 『은자의 북』(작가정신, 1992) 『난초밭 일궈 놓고』(동천사,1994) 『투명한 슬픔』(작가정신, 1996) 『애란』(우이동사람들, 1998) 봄, 벼락치다 (2006년)
현재 <우이시> 주간

-----------------------------------------------게시된 시-----------------------------------------------

 

봄, 벼락치다 / 洪海里
비 그친 오후 / 홍해리
둥근잎나팔꽃 / 홍해리
난타 / 홍해리
매화나무 책 베고 눕다 / 홍해리

죽죽竹竹 / 홍해리

무화과無花果 / 홍해리

 

 

 

, 벼락치다 / 洪海里

 


천길 낭떠러지다, 봄은.

어디 불이라도 났는지
흔들리는 산자락마다 연분홍 파르티잔들
역병이 창궐하듯
여북했으면 저리들일까.

 나무들은 소신공양을 하고 바위마다 향 피워 예불 드리는데 겨우내 다독였던 몸뚱어리 문 열고 나오는게 춘향이 여부없다 아련한 봄날 산것들 분통 챙겨 이리저리 연을 엮고 햇빛이 너무 맑아 내가 날 부르는 소리,

 우주란 본시 한 채의 집이거늘 살피가 어디 있다고 새 날개 위에도 꽃가지에도 한자리 하지 못하고 잠행하는 바람처럼 마음의 삭도를 끼고 멍이 드는 윤이월 스무이틀 이마가 서늘한 북한산 기슭으로 도지는 화병,

 벼락치고 있다, 소소명명!

 

시집 <봄, 벼락치다> 2006년 우리글

 

 


비 그친 오후 / 홍해리  

- 선연가嬋娟歌

 


집을 비운 사이
초록빛 탱글탱글 빛나던 청매실 절로 다 떨어지고
그 자리
매미가 오셨다, 떼로 몰려 오셨다

 

조용하던 매화나무
가도 가도 끝없는 한낮의 넘쳐나는 소리,
소낙비 소리로,
나무 아래 다물다물 쌓이고 있다

 

눈물 젖은 손수건을 말리며
한평생을 노래로 재고 있는 매미들,
단가로 다듬어 완창을 뽑아대는데, 그만,
투명한 손수건이 '하염없이 또 젖고 젖어,

 

세상 모르고
제 세월을  만난  듯
쨍쨍하게 풀고 우려내면서
매미도 한철이라고 노래하고 있는 것인가


비 그친 오후
일제히 뽑아내는 한줄기 매미소리가
문득
매화나무를 떠 안고 가는 서녘 하늘 아래

 

어디선가
심봉사 눈 뜨는 소리로 연꽃이 열리고 있다
얼씨구! 잘한다! 그렇지!
추임새가 덩실덩실 춤을 추고 있다.

 

 

 

둥근잎나팔꽃 / 홍해리

 

 

아침에 피는 꽃은 누가 보고 싶어 피는가

홍자색 꽃 속으로

한번 들어가 보자고

가는 허리에 매달려 한나절을 기어오르다

어슴새벽부터 푸른 심장 뛰는 소리---,

헐떡이며 몇 백리를 가면

너의 첫 입술에 온몸이 녹을 듯, 허나,

하릴없다 하릴없다 유성으로 지는 꽃잎들

그림자만 밟아도 슬픔으로 무너질까

다가가기도 마음 겨워 눈물이 나서

너에게 가는 영혼마저 지워 버리노라면

억장 무너지는 일 어디 하나 둘이랴만

꽃 속 천리 해는 지고

타는 들길을 홀로 가는 사내

천년의 고독을 안고, 어둠 속으로

뒷모습이 언뜻 하얗게 지워지고 있다

 

 

 

난타 / 홍해리

 


양철집을 짓자 장마가 오셨다

물방울 악단을 데리고 오셨다

난타 공연이 밤새도록 계속되었다

빗방울은 온몸으로 두드리는 하늘의 악기

관람하는 나무들의 박수소리가 파랗다

새들은 시끄럽다고 슬그머니 사라지고

물방울만 신이 나서 온몸으로 울었다

천둥과 번개의 추임새가 부서진 물방울로

귀명창 되라 귀와 눈을 씻어주자

소리의 절벽들이 귀가 틔여서

잠은 물 건너가고 밤은 호수처럼 깊다

날이 새면 저놈들은 산허리를 감고

세상은 속절없는 꿈에서 깨어나리라

깨어지면서 소리를 이룬 물방울들이

다시 모여 물의 집에 고기를 기르려니,

 

방송에선 어디엔가 물난리가 났다고

긴급 속보를 전하고 있다

약수若水가 수마水鹿가 되기도 하는 생의 변두리

나는 지금 비를 맞고 있는 양철북이다.

 

 

 

매화나무 책 베고 눕다 / 홍해리

 

 

겨우내 성찰한 걸 수화로 던지던 성자 매화나무

초록의 새장이 되어 온몸을 내어 주었다

새벽 참새 떼가 재재거리며 수다를 떨다 가고

아침 까치 몇 마리 방문해 구화가 요란하더니

나무속에 몸을 감춘 새 한 마리

끼역끼역, 찌익찌익, 찌릭찌릭! 신호를 보낸다

‘다 소용없다, 하릴없다!’ 는 뜻인가

내 귀는 오독으로 멀리 트여 황홀하다

한 치 앞도 모르는 게 인생이라는데

고요의 바다를 항해하는 한 잎의 배

죄 되지 않을까 문득 하늘을 본다

창공으로 날아오르는 입술들, 혓바닥들

천의 방언으로 천지가 팽팽하다, 푸르다

나무의 심장은 은백색 영혼의 날개를 달아

하늘 높이 날아오르고

언어의 자궁인 푸른 잎들

땡볕이 좋다고 금빛으로 반짝이고 있다

파다하니 뱉는 언어가 금방 고갈되었는지

적막이 낭자하게 나무를 감싸안는다

아직까지 매달려 있는 탱탱한 열매 몇 알

적멸로 씻은 말 몇 마디 풀어내려는지

푸른 혓바닥을 열심히 날름대고 있다

바람의 말, 비의 말, 빛의 말들

호리고 감치는 품이 말끔하다 했는데

눈물에 젖었다 말랐는지 제법 가락이 붙었다

그때,

바로 뒷산에서 휘파람새가 화려하게 울고

우체부 아저씨가 다녀가셨다

전신마취를 한 듯한, 적요로운, 오후 3시.


 

 

죽죽竹竹 / 홍해리

 


하늘바다 헤엄치는 저 은린들아

이쁜 눈썹 푸르게 반짝이거라

눈짓으로나 또는 몸짓으로나

여긴 달 뜬 세상 꿈속이어서

귀에 가득 반짝이는 저 이쁜 것들이

한도 끝도 없이 일으키는 파돗소리

길 다 지우고 산도 모두 허물어 버려

허허벌판 만리 허공 비우고 있구나

네 몸의 그늘과 살의 그림자까지도

대명천지 아니라도 일색이어서

푸른 그리움은 해마다 되살아오고

진달래 붉은 산천 꽃이 피어나

갈 곳 없는 풍찬노숙 나의 가슴을

봄바람소리 흔들어 잠 깨우는구나.

 

 

 

무화과無花果 / 홍해리

 


애 배는 것 부끄러운 일 아닌데

그녀는 왜 꼭꼭 숨기고 있는지

대체 누가 그녀를 범했을까

애비도 모르는 저 이쁜 것들, 주렁주렁

스스로 익어 벙글어지다니

은밀이란 말이 딱 들어맞는다

오늘밤 슬그머니 문지방 넘어가 보면

어둠이 어둡지 않고 빛나고 있을까

벙어리처녀 애 뱄다고 애 먹이지 말고

울지 않는 새 울리려고 안달 마라

숨어서 하는 짓거리 더욱 달콤하다고

열매 속에선 꽃들이 난리가 아니다

질펀한 소리 고래고래 질러대며

무진무진 애쓰는 혼 뜬 사내 하나 있다.

 

 

 

황홀한 봄날 / 홍해리

 


우이도원牛耳桃源 남쪽
100년 묵은 오동나무
까막딱따구리 수놈이
딱딱딱, 따악, 따앆, 따앜,
빨간 관을 자랑하며
동쪽으로 문을 내고
허공을 찍어 오동나무 하얀 속살을
지상으로 버리면서
집짓기에 부산하고,
암놈은 옆의 나무에서
따르르르, 따르르르, 옮겨 앉으며
딱, 딱, 딱,
먹이를 캐고 있다
새들마다
순금빛 햇살에 눈이 부셔
물오른 목소리로 색색거리고,
연둣빛, 연분홍, 샛노랑 속에
세상을 오르고 내리면서
버림으로써, 비로소, 완성하는
까막딱따구리의
황홀한 봄날.

 

출처 : 좋은 시를 찾아
글쓴이 : null 원글보기
메모 :

'시집『봄, 벼락치다』2006'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시> 그녀가 보고 싶다  (0) 2009.02.16
맛에 대하여  (0) 2008.07.31
필삭筆削  (0) 2006.05.06
생각에 잠긴 봄  (0) 2006.05.06
날아가는 불  (0) 2006.05.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