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평론·시감상

이 詩, 나는 이렇게 썼다 /「다시 가을에 서서」

洪 海 里 2007. 11. 23. 18:47
 

이 詩, 나는 이렇게 썼다

-「다시 가을에 서서

 

洪 海 里

 

  1975년에 나온 나의 두 번째 시집『화사기花史記』에 내가 유난하게 기억하고 있는 가을 시가 한 편 실려 있다. 「다시 가을에 서서」라는 이 작품은 시집에 실리기 전인 1973년 가을에 발간된 동인지『내륙문학』제4집에 게재되었는데 가을의 애잔한 풍경이 담담하게 담겨 있다. 늦가을에 환하게 피어 있는 샐비어를 배경으로 소박한 주막집의 주모와 시인이 등장하는 몇 개의 장면으로 한 편의 시를 엮은 것이다. 주모는 막 지고 있는 노을을 술잔에 열심히 퍼 담고 있고 시인은 샐비어에 눈을 빼앗긴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장면이 바뀌면 밭에서 일을 하다 비를 맞으며 다리를 건너는 애틋한 오누이의 슬픈 전설을 지절거리면서 달래강이 잔잔히 흘러가고 있다. "달래나 보지, 달래나 보지!" 한번 달라고나 해 볼 것이지 왜 말도 못하고 죽었느냐고 강물은 비에 젖어 착 달라붙은 흰 적삼의 누이가 되어 되뇌고 있다. 완행버스가 덜컹거리는 길가에 저녁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다. 한창 푸르던 내 나이 서른하나의 자화상도 슬쩍 비치고 있는 것으로 보아 1972년에 쓴 것이 드러나 있다. 그때 내가 서른하나의 뜨겁고 푸른 파도를 타고 있었던가 보다.

 

   사르비아 활활 타는 길가 주막에서

   소주병이 빨갛게 타고 있다.

   불길 담담한 저녁 노을을

   유리 컵에 담고 있는 주모는

   루비 영롱한 스칼릿 세이지 빛

   반짝이는 혀를 수없이 뱉고 있다.

   여자의 손톱이 튀어나와

   어둠이 되고 파도가 되고 있다.

   살 속 가장 깊은 곳에서

   석류꽃처럼 피던 그미의 은빛 넋두리가

   드디어 하늘을 날고 있다.

   이슬을 쫓는 저녁 연기도

   저문 산천의 으스름으로 섞여

   꽃잎은 천의 바다를 눈썹에 이고

   서른 하나의 파도

   허허한 내 오전의 미련을

   부르르 부르르 경련을 하게 한다.

 

  1969년에 첫 시집『투망도投網圖』를 내고 난 얼마 뒤였다. 청주에 살고 있던 나는 충북에 있는 문인들의 구심점이 될 동인지가 하나도 없음을 안타깝게 여기고 있었다. 당시 충주에는 고 박재륜 시인이 계셨고 오래 전부터 교유를 하고 있는 양채영 시인이 있어 주말이면 자주 그곳에 놀러가곤 했었다. 당시 교통편은 기차가 아니면 완행버스였다. 시간이 정해져 있는 기차는 마음에 들지 않아서 나는 주로 버스에 몸을 싣고 흔들리며 왕래하곤 했다. 양 시인과는 서로 마음이 통하는 사이였기 때문에 그곳에 가면 주막에서 막걸리 잔을 꽤나 기울이면서 동인지에 대한 생각을 모으곤 했다.

  그래서 그의 생각과 나의 열정이 만나 결실을 맺은 것이 바로 지금의『내륙문학內陸文學』이다. 당시 청주상고에 재직하고 있으면서 충북 도내의 글 쓰는 이들을 끌어 모아 1972년 봄에 창간호를 내고 이어 봄가을로 4집까지 발간했다. 당시의 내 생각은 『내륙문학』을 계간지로 만드는 것이었다. 그러나 내가 직장 관계로 고향을 떠난 후 이 동인지는 여러 차례 신산의 세월을 거쳐 왔지만 지금은 많은 동인들이 참여하는 튼튼한 잡지로 뿌리를 내려 해마다 한 권씩 나오고 있다.

(한때 그의 고향인 청주에 있으면서 나와 자주 만났던 그는 술잔을 기울이며 내륙지방의 문학을 위하여 무엇인가 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열을 올리곤 했다. 지금은 충북 유일의 동인지로서, 또는 이 지역 동인지의 효시로서 그 명맥을 잇고 있는 『內陸文學』의 탄생도 실은 그의 이와 같은 몸살과 나의 작은 착상에 의해 실현되었던 것이다. - 梁彩英, 1975)

  시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 엉뚱한 길로 빠지고 말았다. 70년대 초 어느 해 늦가을이었다. 충주에서 토요일 오후 늦게 만나 막걸리로 밤을 지새운 다음날 양채영 시인과 나는 달래강에 나가 하루를 보내게 되었다. 오후가 되어 청주로 돌아가는 버스를 타려고 달천교 옆에서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처마가 낮은 주막집이 눈에 띄었다. 참새가 방앗간을 어찌 그냥 지나칠 수 있겠는가. 더구나 주막집 길가 쪽으로 새빨간 샐비어가 무더기로 피어 활활 타오르고 있지 않은가. 양 시인과 나는 다시 주막집 나무탁자를 가운데 두고 마주앉아 샐비어를 안주로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물론 막걸리를 마시면 두 시간 넘게 가는 길에 버스를 세워야 하는 어려움을 겪을 것이 뻔하니 소주를 들 수밖에야! 그때의 샐비어는 요즘의 키 작은 꽃보다 훨씬 컸던 것으로 내 기억 속에 지금도 피어 있다.

  해가 뉘엿뉘엿 지기 시작할 무렵 버스가 와 나를 실어 주었다. 애타게 발목을 잡는 샐비어를 뒤로 하고 차창 밖으로 눈을 주자 낮은 산 밑으로 펼쳐져 있는 밭에서는 연기가 뽀얗게 피어오르고 있었다. 연기를 피워 서리가 내리는 것을 막아 밤새에 남새를 보호하려는 농부들의 노력이었다. 우리 선조들의 지혜를 엿볼 수 있는 농사법이 나를 연기 속으로 끌고 들어가는 것이었다. 차를 타고 오면서 주머니에 있는 작은 공책을 꺼내 괴발개발 적어 놓았던 것이 바로「다시 가을에 서서」로 태어나게 된 것이다. 언제나 나의 시는 몇 개의 단어 또는 몇 줄의 메모에서 싹이 트고 자라서 한 그루의 나무로 세상에 서게 된다. 물론 몇 단어로 된, 또는 몇 줄로 된 시의 씨앗이 싹도 트지 못하고 버려지고 죽고 마는 경우가 허다하지만.

  샐비어가 활활 피어오르는 길가 주막에 소주병이 빨갛게 타고 있었다. 샐비어의 선명한 빛깔이 소주잔을 가득 채우고 춤을 추었다. 술시중을 드는 주모도 노을빛에 얼굴이 물들고 있었다. 이 시 속에는 세 사람이 등장한다. 주모와 양채영 시인과 이 시를 쓴 본인이다. 물론 장면이 바뀌면 밭에서 불을 피워 연기를 올리고 있는 농부들의 모습도 보인다. 버스를 몰고 있는 운전기사와 졸고 있는 승객들도 함께 달리고 있다.

  이제 차가 올 시간이 되었으니 그만 마시라고 잔소리를 하는 주모의 목소리가 은빛으로 흔들렸다. 한때는 분명 석류꽃처럼 피었을 그미의 얼굴이 이제는 노을빛으로 익고 있었다. 차를 타고 돌아오는 내 가슴속에는 빨갛게 타던 꽃잎들이 파도가 되어 서른하나인 젊은 시인의 세상에 대한 미련을 부르르부르르 경련하게 하는 것이었다.

  이 시가 시집에 실린 것은 약간의 퇴고를 거친 후였다. 우선 첫 행 '사르비아 활활 타는 길가 주막에서'가 '샐비어 활활 타는 길가 주막에'로 바뀌었다. 메모를 해 놓은 것을 보니 '활활'도 ‘훨훨’로 된 것을 빨간 볼펜으로 긋고 고친 것을 볼 수 있다. 7행의 '여자'도 '그미'로 고쳤고 한 행으로 된 10행도 두 행으로 나뉘었다.

  애초에는 전체 시의 시제를 과거형으로 할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렇게 하면 읽기에 훨씬 부드러운 음수율을 이룰 수 있다. 운율이 살아야 시가 생명력을 더하게 되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소주병이 빨갛게 타고 있다'를 '소주병이 빨갛게 타고 있었다'라고 하면 읽든가 낭송을 할 때 훨씬 부드러운 맛이 느껴진다. 그 다음에도 '있다'가 세 번이나 더 나와 있는데 이 경우도 역시 마찬가지다. 맨 끝에서도 '부르르부르르 경련을 하게 한다'를 '~~~ 하게 했다'라고 했더라면 느낌은 사뭇 달라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시제를 현재형으로 함으로써 현장감을 살리고자 했다. 그 결과 나는 지금도 달천교 옆 주막집에 앉아 달래강의 전설을 안주로 양 시인과 소주잔을 털고 있지 않은가. 과거가 현재 속에 공존하도록 한 것이다. 그래서 나는 영원한 서른하나의 청춘일 수 있다.

언제 시간이 나면 요즘 유행처럼 번지고 있는 문학기행이라도 한 번 기획해 볼까. ‘홍해리의 시「다시 가을에 서서」의 문학 현장을 찾아서!’ 우르르 몰려가 볼까. 그곳에 가서 동행한 일행과 주모도 만나고 달래강과 해후도 하고 싶다. 추억의 샐비어 주막집이여!

  한 가지 아쉬운 것은 시 속에 될 수 있으면 외래어를 쓰지 말자는 것이 평소의 내 주장인데 이 시엔 '샐비어', '컵', '루비', '스칼릿 세이지'와 같은 단어가 보이는 점이다. 지금 생각하면 민망하고 부끄럽다. '컵'은 '잔', '루비'는 '진홍색', 스칼릿 세이지'는 '샐비어'다. (scarlet은 진홍색을 뜻하고, sage는 샐비어의 일종을 가리키는 말로 scarlet sage가 되면 salvia를 뜻함). 그런데 멋(?)을 부리고자 하는 나의 오만한 무식이 발동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지금 같으면 '샐비어'도 '깨꽃'이라고 했을까? 그것은 모르겠지만 아마 몇 개의 단어는 순 우리말로 바꾸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물론 '깨꽃'은 '참깨꽃'도 있고 '들깨꽃'도 있다. 우리말을 사랑하자는 데는 조그만큼이라도 이의나 주저함이 없지만 어쩔 수 없는 경우도 있다. '코스모스'를 '살살이꽃', '목백일홍'을 '배롱나무', '라일락'을 '수수꽃다리'라고 해도 좋지 않은가. 앞으로는 우리말을 살릴 것은 살리고자 노력할 것이다. 우리말을 아름답게 가꿔나가는 일은 시인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이다.

  이 시에 대해서 문덕수 시인은 "그의 시에서는 의식의 내외를 구별 짓는 한계를 되도록 없애려고 하고 있다. 그러기에 자신의 밖에서 인식된 인간과 사물이나, 자신의 안에서 인식된 그것들이 뚜렷한 구별을 가지고 있지 않다. 이러한 특징은 그가 모든 존재의 외피가 아니라 내적 심부로 침투하려는 의식의 촉수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가을에 서서」를 보면 '정서를 저류로 가진, 어느 정도 은유적인 언어를 사용한, 다소라도 감각적인 회화'라는 이미지의 정의를 연상하게 된다.(루이스의『시적 이미지』에서)

  흔히 묘사는 감각 일변도여서 정서가 배제된 양상을 볼 수도 있으나(특히 정지용의 경우), 홍해리의 시에서는 감각과 정서가 융합된 투명한 묘사를 볼 수 있다. 이 점은 확실히 그의 장점이다.

  인용된 위의 시에서 '그미의 손톱이 튀어나와 어둠이 되고 파도가 되고 있다'는 대목은 기발한 상상 이상의 세계를 보여준다. 이 대목 전의 부분과 이 대목을 비교하면 의식 밖과 의식 안의 두 영역을 동시적으로 볼 수 있는 듯해서 흥미롭다. 그는 이와 같이 의식내외를 자유롭게 왕래하고 있다. 그가 의식내외를 구별 짓는 벽을 헐고 있다는 점은 그의 상상력의 한 강점이다."라고 한 바 있다.

  좀 지루하게 인용을 했지만 나의 초기 시의 한 단면을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내용이 아닌가 생각된다. 초기 작품을 쓰던 그때가 그립다. 그것은 다시 되돌아갈 수 없는 '그때'이기 때문이기도 하고 '그때'가 나의 '한때'였기 때문이기도 해서일 것이다. '오, 서른하나의 나의 파도여!'

 

   샐비어 활활 타는 길가 주막에

   소주병이 빨갛게 타고 있다

   불길 담담한 저녁 노을을

   유리컵에 담고 있는 주모는

   루비 영롱한 스칼릿 세이지빛

   반짝이는 혀를 수없이 뱉고 있다

   그미의 손톱이 튀어나와

   어둠이 되고 파도가 되고 있다

   살 속 가장 깊은 곳에서

   석류꽃처럼 피던

   그미의 은빛 넋두리가

   드디어 하늘을 날고 있다

   이슬을 쫓는 저녁 연기도

   저문 산천의 으스름으로 섞여

   꽃잎은 천의 바다를 눈썹에 이고

   서른하나의 파도

   허허한 내 오전의 미련을

   부르르부르르 경련을 하게 한다.

      -「다시 가을에 서서」전문

 

  물론 시에서는 맞춤법은 두말할 나위도 없지만 띄어쓰기도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위의 시에서도 ‘저녁 노을’은 ‘저녁노을’이나 ‘저녁놀’로 해야 옳다. 그러나 ‘저녁 노을’과 ‘저녁노을’ 또는 ‘저녁놀’을 소리를 내어 읽어보면 맛이 사뭇 다르다. 또한 시제를 과거형으로 해서 읽어 보면 그 맛이 전혀 다름을 맛볼 수 있으리라.

  이 시의 전문을 다시 전재하는 이유는 처음 발표되었을 때의 작품과 달라진 점을 위에서 몇 가지 열거했지만 그 외에도 달라진 것이 한두 곳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들을 찾아보며 다시 한 번 읽어 보는 재미도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 월간『우리』(2008. 1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