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이동詩人들』1987~1999

<우이동 시인들> 제14집 生命詩學序說 / 임보

洪 海 里 2008. 7. 6. 17:11

<우이동 시인들> 제14집 『아픔을 꽃으로 피우나』

 

<우이동 소리>

 

生命詩學序說

 

                                                                    임 보

 

 생명 작용, 즉 삶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끊임없는 自我 擴

大의 움직임이다. 다른 말로 바꾸면 客體의 主體化 활동, 곧

생명체 속에 세계성을 끌어모아 축적해 가는 행위라고 할

수 있다. 생명체의 원초적 본능이 무엇인가를 살펴보면 금

방 수긍이 갈 것이다. 가장 원초적 본능은 食慾과 異性에 대

한 욕망이다.

 먹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생명체 밖에 존재하는

대상들을 생명체 내부로 끌어들이는 행위다. 먹는다는 것은

객체의 주체화 작용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동작이다. 呼吸

도 주체화 작용의 하나다. 식물의 탄소동화작용처럼 동물들

도 태양의 햇볕과 우주 공간의 여러 요소들을 체내로 끌어

들여 自我化한다. 이처럼 생명체는 세계가 지닌 요소들을

그의 몸속에 집약시킨다. 곧 세계성의 축적을 꾀한다. 우리

의 몸은 전 우주적 요소들의 총화에 의해 형성된 신비로운

존재다.

 생명 작용의 정지 - 죽음은 무엇인가. 그것은 생명체의

몸, 곧 육신의 확산을 의미한다. 몸을 구성했던 모든 요소들

이 이제는 몸을 떠나 그것들이 왔었던 우주 공간 속으로 흩

어져 되돌아가는 환원을 뜻한다. 흩어지는 몸은 우주 속에

스미고 스며 장차 우주를 가득 채운다. 그러므로 한 생명체

의 몸은 우주 공간의 모든 요소들이 집약되었다 흩어지는

하나의 교차점으로 세계의 중심이 된다.

 異性에 대한 욕망, 곧 양성의 결합에서 새로운 생명체를

탄생시키는 종족 번식의 이 방식은 무엇을 뜻하는가. 이것

역시 세계성 확장에 그 의미가 있다. 양성의 결합은 두 세

계의 통합을 의미한다. 자식은 부모의 두 세계성을 통합하

여 공유한다. 우리가 얼마나 많은 조상들의 세계성을 통합

하여 내포하고 있는가 생각하면 신비스럽기 이를 데 없다.

우리는 두 부모의 세계성뿐만 아니라 네 조부모, 여덟 고조

부모들의 세계성을 아울러 통합 공유하고 있다. 600년 전

그러니까 20세대 전만 거슬러 올라가 보자. 얼마나 많은 조

상들이 나 하나를 만들기 위해 존재하고 있었는가. 2의 20제곱.

100만 명이 넘는다. 이들 중 어느 하나만 없었어도 오늘의 나

는 존재하지 않는다. 하나의 생명체가 이 세상에 오게 된

것은 실로 기적에 가까운 놀라운 통합 속에서 가능하다.

 그런데 생명의 역사, 생명의 끈은 몇백 년이 아니라 거슬

러 올라가면 창조주에까지 이른다. 따라서 한 생명 속에는

과거 전 조상의 세계성을 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나'는

전과거 조상들의 집약체이며 수렴점이다.

 또한 미래를 상상해 보자. 우리가 두 자녀를 갖게 되고,

그 자녀들이 또한 두 자녀를 갖게 된다면 600년 후엔 내 피

를 이어받을 후손들의 수효가 100만 명이 넘게 된다. 인류

의 미래가 얼마쯤 지속될는지는 모르지만 언젠가는 이 지

상의 모든 인류들의 혈관 속에 내 피가 흐르게 된다. 말하

자면 미래 인류들은 '나'로부터 비롯된다. 내가 어떻게 하

느냐에 따라 미래 인류들의 모습은 달라진다. 나의 존재가

얼마나 소중하고 성스러운 것인가. 나는 전과거 인류의 집

합이면서 전미래 인류의 출발점에 있다. 나는 과거와 미래

가 만나는 하나의 교차점으로 세계의 중심이 된다.

 생명체가 지닌 모든 감각 기관(시각, 청각, 촉각, 후각,

미각 등)은 주체화의 대상인 객체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한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즉 먹이과 異性을 찾는 데 필요한

탐색용 레이더들이다. 생명체의 모든 활동 역시 주체화, 곧

자기 확대의 운동에 지나지 않는다.

 인간들의 모든 문화적 활동도 이에 근거하고 있다. 정치

활동은 타인들에 대한 지배욕에서 비롯된 것이요. 경제 활

동은 물질들에 대한 소유욕에서 출발한다. 자연과학도 자

아 확대를 위한 객체들의 탐색 작업에 근거하고 있다. 종교

도 자아를 내세에로까지 확대하고자 하는 의지에 뿌리하고

있다.

 문학도 예외가 아니다. 인간의 모든 언술 행위 역시 궁극

적으로는 자아 확대를 위한 욕망의 표현이다. 문학은 자아

확대, 곧 대상 성취의 욕망이 기술적으로 표현된 언술 행위

에 지나지 않는다. 더 간단히 말하면 문학이란 인간의 욕망

을 기술적으로 표현한 언어라고 할 수 있다. 書經의 저 유

명한 <詩言志>의 '志'도 단순한 생각이 아니라 '얻고자 하

는 소망'의 의미로 파악된다. 그런데 문제의 관건은 '기술

적'이라는 데 있다. 바로 이것이 시, 소설, 희곡 등의 장르

를 갈라 놓는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하게 된다.

 그러면 시가 되게 하는 기술적인 요인들, 곧 시적 장치란

어떤 것인가. 나는 시적 장치의 특성을 우선 '감춤'과 '불

림'과 '꾸밈'이라고 지적해 본다. 다른 말로 바꾸면 '은폐

지향성'과 '과장 지향성', 그리고 '심미 지향성'이라고 할

수 있다. 전자는 상징 ,寓意, 轉移 등의 기법으로 나타나고

중자는 비유, 擬人, 逆說 등의 수사에서 드러나며, 후자는

조화와 균형을 추구하는 대구나 대조, 그리고 운율 장치로

표현된다.

 나는 이 세 가지 시적 장치의 특성을 포괄하여 '엄살'이

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시는 인간의 소망이 엄살스럽

게 표현된 짧은 글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소망

하는 내용의 품질과 엄살을 부리는 격조에 따라 시의 품격

이 형성된다는 사실이다. 격이 있는 시가 어려운 것은 소망

에 대한 단순한 기술적 언술이라는 한계를 넘어 구도자적

정신 세계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아픔을 꽃으로 피우나』작가정신, 1993. 12. 정가 3,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