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이동 시인들> 제25집『너의 狂氣에 감사하라』
우이동 소리
狂(미칠 광)
광(狂)자 앞에 기역(ㄱ)을 더해서 '꽝'하고 싶다.
가끔 시에서 시가 붕괴되는 굉음(轟音)을 듣고 싶다.
이 생 진
1
나는 시를 쓰는데 광적이다. 하룻밤에 30편, 사흘에 시집
한 권치를 쓸 때가 있다. 물론 그 한 권 양이 단번에 시집으
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90편이 180편 될 때까지 기다렸
다 시집 한 권이 나오는 것인데, 그것은 일년 걸릴 수도 있고
이 년 걸릴 수도 있다. 그렇다고 재촉하지는 않는다. 언제고
또 소나기가 올 테니까. 그때 180편을 다시 90편 정도로 줄
인다. 이 작업은 소나기를 맞을 때보다 고통스럽다.
2
'전업 시인이라 하던데 월수입이 얼마냐?'고 묻는 사람이
있었다. 작년에 월수 5만원이었는데 금년엔 3월이 지나도록
한 푼 못 올렸으니, 작년보다 낮겠다고 했더니 눈을 둥그렇
게 뜨고 쳐다본다. 시인의 수입을 묻는 사람이 잘못이다. 올
예상으로는 월수 3만원이 안 될 것 같다. 시 한 편에 5만원
치고, 일 년에 일곱 번만 청탁이 와도 연 35만원, 예산에 못
미치지만, 그래도. 월 100만원은 돼야 시인도 먹고 사는데
하며 웃는다.
이때 따르르하고 전화가 걸려왔다.
'이 선생님이십니까? 원고를 청탁하고 싶은데요. 산문인데
요, 매당 만원 30장입니다'
'시밖에 안 씁니다. 산문을 쓰면 시가 고장나니까' 하고 거
절했다. 쓰기 싫은 것을 억지로 쓰고 싶지가 않다. 그후로는
시도 산문도 청탁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게 나에겐 편했
다.
3
'선생님 시집은 팔린다는데'하는 소리는 들었지만 내 시집
을 읽고 있는 사람을 직접 보지는 못했다. 아니다. 딱 한 번
있었다. 김포공항 대합실에서 파란 표지의 《그리운 바다 성
산포》를 들여다보고 있는 젊은이를 본 적이 있다. 아마 성
산포를 찾아가는 모양이었다. 그런 때 '그거 내가 쓴 것인데'
하고 말을 걸고 싶었지만 쑥스러워서 그만뒀다. 모르는 이가
내 시집을 들고 있는 것을 보면 괜히 부끄러웠다.
그렇지만 독자에게서 걸려오는 전화를 안 받을 수는 없다.
술은 내가 마시는데/ 취하긴 바다가 취하고/ 성산포에서는/
바다가/ 술에 더 약하다
가 인상적이었다느니,
가장 살기 좋은 곳은/ 가장 죽기도 좋은 곳/ 성산포에서는/
生과 死가 손을 놓지 않아/ 서로 떨어질 수 없다
성산포에 와서/ 자살 한 번 못하고 돌아가는 비열/
구기구기 두었다가/ 휴지로 쓸 것인가
이런 데서는 공감했다느니 하는 전화다.
내가 염려하는 것은 이 구절이다. '자살 한 번 못하고 돌아
가는 비열 구기구기 두었다가 휴지로 쓸 것인가' 이것 때문
에 죽었다고 소문이라도 나면 어쩌나 하는 것정이 월수(月
收) 생각을 가로막기 일수다. 제발 그 짓은 말았으면.
4
어느 해던가 12월 31일 저녁, 성산포 청년회관에서 낭송을
하고 났는데 중년 신사 한 분이 다가오며 "이 선생님 만나
서 반갑습니다. 저는 어려서 성산포에서 자랐는데 지금은 밖
에 나가 조그마한 사업을 하고 있습니다"하며 명함을 건네
줬다.
성산포에서는/ 사람은 절망을 만들고/ 바다는 절망을 삼킨다/
성산포에서는/ 사람이 절망을 노래하고/ 바다가 그 절망을 듣는다
'저는 일출봉에 올라가 자살을 생각하다가 이 구절에서 입
술을 깨물고 물 건너갔죠' 하고 내미는 명함. 외국 상사 대
표. 그는 해마다 내게 연하장을 보내줬다.
그런가 하면 끔찍한 일도 있었다. 대량의 수면제를 들고
절벽 갓으로 돌아다니다가 마을 사람에게 들킨 실연 당한(?)
여자. 그녀는 그 시가 담긴 녹음테이프를 가지고 있었으며
그 마을 교회에서 한달 동안 기도를 드리고 돌아갔다. 내가
그 섬에 갔을 때 그 소녀(?)가 놓고 간 기다란 사연과 두꺼
운 성경책을 봤다.
90년대 중반에 나는 5년에 걸쳐 해마다 1월 1일 아침 일
출을 맞으며 일출봉 정상에서 《그리운 바다 성산포》를 낭
송했는데 한번은 시를 낭송하러 정상으로 올라가는 계단에
서 가쁜 슴소리를 누르며 내게로 다가오는 젊은 부부와 어
린이가 있었다. 그중 여자가
'선생님, 이 남자는 저의 남편인데요'하며, 30대 남자를
소개하고는 '저희는 선생님 시 때문에 성산포에서 만나 8년
전에 결혼했어요. 이 애는 저희 아들이고요. 오늘은 저희 가
족 셋이 선생님께 세배 드리러 이곳에 온 거예요. 선생님 반
가워요' 하며 정중하게 절을 했다.
그런가 하면 이런 일도 있었다. 여서도에서의 일인데 70
노인이 날 보고 무엇 하는 사람이냐고 호기심 섞인 의심조
로 신분을 묻기에 내 시집을 건네주며 '시 쓰는 사람'이라고
했더니 그는 내 시집 제목을 보는 즉시
'나 같으면 결코 <그리운 바다…> 소리가 안 나와요. 내
입장에서는 <지겨운 바다…>라고 해야, 나는 바다 때문에
내 인생을 망친 걸요' 하며 쓴웃음을 쳤다. 왠지 그 사람에
게 내 시집이 미안했다. 그런가하면 이런 전화는 경종처럼
울리기도 했다.
'저는 그 시집을 들고 성산포에 갔다가 실망했어요. 그 시
집처럼 느껴지지 않아서' 이런 경우 나는 어떻게 그의 전화
를 받아야 할지 몰랐다. 어떤 사람은 감동하고 어떤 사람은
실망하고. 내가 시를 쓸 때는 나밖에 없는 줄 알았는데 책이
되어 갈 곳으로 가고 나니 내 편이 아니라 그쪽 편인 것을
실감했다. 월수 5만원이 문제가 아니다. '이것도 시라고 써'
라든가 '먹고 할 일도 없다'라는 말을 들었을 때는 더 맥이
빠졌다. 자신은 그렇지 않은데 남들은 시인을 보석상으로 아
나 보다. 그러니 동회에서 시인의 생계를 걱정할 리 없다. 시
인의 가난은 시인만이 안다.
가난한 시인이 펴낸 시집을
가난한 시인이 사서 읽는다
가난은 영광도 자존도 아니건만
흠모도 희망도 아니건만
가난을 시인의 훈장처럼 달아 주고
참아 가라고 달랜다
저희는 가난에 총질하면서도
가난한 시인 보고는
가난해야 시를 쓰는 것처럼
슬픈 방법으로 위로한다
아무 소리 않고 참는 입에선
시만 나온다
가난을 이야기할 사이 없이
시간이 아까워서 시만 읽는다
가난한 시인이 쓴 시집을
가난한 시인이 사서 읽을 때
서로 형제처럼 동정이 가서
눈물이 시 되어 읽는다
《바다에 오는 이유》 (1972)에서 <가난한 시인> 전문
5
이왕에 그 시집은 날라리가 되었지만 실망보다는 반가움
으로 치부해 둔다. 나는 가끔 성산포가 속해 있는 남제주 군
수가 준 금시계를 자랑했다. 이 시계가 노랗기 때문에 금시
계라고 착각할 정도다. 때로는 금시계라고 단정하기도 했다.
군민(郡民) 수천 명을 모아 놓고 '이 분은 시인인데 우리 군
(성산포)에 공로가 많았기 때문에 감사의 표시로 시계와 명
예군민증을 수여합니다' 이 때 시를 쓰고 처음 박수를 많이
받았다. 그러나 이 시집을 이야기하는 독자들 앞에서는 늘
부끄러워했다. 미완성 같은 그런 부족감 때문이었다. 시대
착오 같은 전달이 나의 뇌파를 건드리기 때문이었다. 나는
나의 시보다 제주도의 상록수와 노란 감귤을 보면, 구시월에
억새꽃과 갯쑥부쟁이꽃을 보면, 4월의 찔레꽃과 5월에서 늦
가을로 이어지는 인동초꽃을 보면, 협제와 함덕의 에메랄드
빛 바다를 보면, 다랑쉬오름의 달덩이를 보면, 비자림의 조
상목(祖上木)을 보면, 물질하는 할머니의 숨소리를 들으면,
나는 환상 속에서 눈물을 짜기 일쑤다.
나는 서울에서 시심(詩心)이 고갈되었을 때 배낭을 메고
슬그머니 제주도로 내려간다. 그곳에 가서 시를 훔치는 것이
다. 나는 달밤에 돌담을 넘듯 남의 집 담을 넘어 시를 훔치
는 도둑놈이다. 이것을 제주도 시인들 앞에서 솔직하게 고백
했다. 그렇지만 그들은 나를 처벌하지 않았다. 처벌할 법규
가 없는 것이다. 이제 나는 섬사람들이 공인하는 시를 훔치
는 도둑놈이다. 시는 훔치는 것이지 쓰는 것이 아니다. 그래
서 시인들은 아무도 없는 달밤에 몰래 집 밖으로 나오기를
좋아한다.
'우리 시 훔치러 섬으로 가자'
속으로 이렇게 외치며 배낭을 메고 집을 나섰다. 이번에는
제주도 일주 도보기행이라는 '광(狂)'을 내세우고. 한달을
잡았다. 하루에 너댓 시간씩 걸었다. 그러나 예상과는 달랐
다. 이틀 걷기가 어려웠다. 그것은 내 탓이 아니라 날씨 탓
이었다. 날씨가 사흘 맑기 어려웠고 비바람이 사흘 계속하기
도 어려웠다. 비오는 날은 나가지 않고 걸어가면서 쓴 글을
정리했다. 성산포에서 남쪽으로 남원 서귀포 모슬포 한림 제
주 조천 구좌 그리고 성산포 이렇게 18일 동안 걸어서야 완
전 일주가 됐다. 1999년 3월 11일에 성산포를 출발해서 4월
5일 다시 성산포로 돌아왔다. 그리고 나는 만 70의 생일을
맞았다. 생일날엔 하루 종일 오름만 올라갔다. 열흘은 더 걸
어다닐 것 같았다.
나는 시가 나비처럼 날아오기를 기다리지 않는다. 내가 나
비처럼 시를 맞으려 날아가곤 한다. 시는 어디든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내가 쓰고자 하는 시는 아무 데나 있는 것이
아니다. 시도 나비처럼 도망치려 한다. 도망치는 나비를 따
라가듯 도망치는 시를 잡아야 한다. 영감은 오래 머물지 않
았다. 언제고 순간이었다. 그 순간을 잘 포착해야 했다. 운동
경기에서만 민첩한 동작이 요구되는 것은 아니다. 더 예민하
고 더 섬세한 촉각으로 찾는 자세 그것은 훈련에서 얻어진
다. 운동선수들의 뒤에는 피나는 훈련과 꾸준한 도전이 있듯
이, 시인에게도 땀흘리는 경험과 피나는 놀겨이 있어야 한
다. 누워서 광맥을 찾는 것과 신발이 닳도록 광맥을 찾아다
니며 생각하는 것과는 차이가 난다. 시도 광맥을 찾듯 찾아
다녀야 한다. 그래서 수시로 떠도는 것이다. 여행은 혼자 했을
때에는 열 편의 시를 쓸 수 있어도, 열 사람이 떼지어 했을
때에는 열 사람 다 한 편의 시를 건지기 어렵다. 시인은 시
를 쓸 때도 휴식할 때도 혼자 있는 것이 유리하다. 철저하게
개성 있는 시를 쓰려면 철저한 이기주의자라는 비난을 받아
마땅하다.
6
나의 경우 움직여야 시가 생겼다. 시론을 펴면 시가 숨고,
시론을 덮으면 시가 생겼다. 그래서 나는 시론을 쓰는 사람
들에게 항상 미안해 한다. 어느 평론가가 '잘된 시는 아니다'
라고 했을 때 나도 그 평론을 읽고 '잘된 평론은 아니다'라
고 말했다. '아니다' '기다' 그건 독자나 평론가가 할 수 있는
자유다. 그러나 시인은 '아니다' '기다'라고 확인 받고 싶어
서 시를 쓰는 것은 아니다. 쓰지 않고는 못 견디기 때문에
시를 쓴다. 월수 때문에 시를 많이 쓰는 것도 아니다. 시하
고 열심히 살고 싶어서 쓰는 것이다.
7
외로운 섬에 와서 얻어지는 것은 '단순함'이다. 복잡한 지
하철을 구별해서 탈 필요가 없고 횡단보도와 신호등에 신경
쓸 필요가 없고 가족사랑 이웃사랑 하는 것을 TV를 통해서
배울 필요가 없고 동백꽃 진달래꽃을 꽃집에 가서 살 필요
가 없다. 나서면 꽃밭이요 문을 열면 이웃 정이요 가고 싶은
데로 가면 길이다. 생선가게에 가서 생선을 엎었다 잦혔다
할 필요도 없다. 낚싯대를 담가두면 고기가 문다. '단순화'한
다음에 남는 것이 시다. 그러니 나는 섬에 와서 신선한 시를
낚는 꼴이 된다. 단순해야 시가 잘된다. 의복도 思考도 밥그
릇도 단순해야 시가 모여든다.
8
나는 차를 탄 사람보다 걸어다니는 사람을 존경한다. 예수
도 걸어다녔고 원효(元曉)도 걸어다녔고 김삿갓도 걸어다녔
다. 이렇게 말하면, '그때야 차(車)가 없으니까 걸었지' 할 거
다. 당연한 말이다. 그러나 지금도 걸어다니는 이가 있다. 원
공(圓空) 스님은 20년 동안 한 번도 자동차를 타지 않고 걸
어다녔다. 이번에 지리산에서 백두대간 줄기를 걸어가겠다고
절을 나섰다.
<바람의 딸> 한비야도 해남 땅끝에서 강원도 고성 자유
전망대까지 걸어가겠다고 집을 나섰다. 시인들이 한 달만 집
을 나서도 시가 달라질텐데 하면서 나는 걷는다. 시를 쓰는
정도(正道)는 길을 올바르게 걷는데 있다. 걸으면 건강해진
다. 시인은 누구보다도 건강해야 한다. 건강해야 시도 건강
해진다. 혼자 떠나라. 혼자라야 혼자만의 시를 쓸 수 있다.
우리 모두 어디로 떠나자. 각자의 방향이 서로 다른 데로
떠나자. 다리가 아프면 상상의 오두막집에 들어가 쉬자. 어
느 공간이고 시인을 싫어하는 공간은 없다. 시인을 싫어하는
공간은 썩은 공간이지만 시인은 그 썩은 공간을 되살릴 수
있다. 우리 어디로 떠나자. '몰래 떠나자.' 이것은 건강할 때
들려오는 유혹의 소리다. 그 소리가 들리는 동안 시인은 행
복하다. 시인의 생명은 이 유혹의 소리가 들리는 동안에만
존재한다.
9
시인이거든 '시가 옷을 주냐 밥을 주냐' 따지지 말라. 그저
'꽝(狂)' 하고 미쳐버려라. 내 시는 이런 광기에서 얻었지, 월
수로 얻은 것이 아니다. 배가 고프면 동회에 가 손을 벌리기
보다 울어가며 시를 쓰겠다. 가난한 고집도 힘이 된다. 혀를
깨물자, 혀를 깨물었을 때 말은 막혀도 시는 나오니까.
(『너의 狂氣에 감사하라』우이동시인들, 1999, 값 5,000원)
'『우이동詩人들』1987~1999'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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