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평론·시감상

<서평> 洪海里 시집『황금감옥』 / 박찬일

洪 海 里 2008. 7. 20. 16:45
 

메타시들, 메타시들, 메타시들

— 洪海里의 시집『황금감옥』을 중심으로


                                                                       박찬일(시인)


들어가며

  시마 때문에 잠을 못 자는 시인들. 머리맡에 놓아둔 펜과 종이들. 불도 켜지 못하고 펜을 더듬거려 종이에 쓴다. 시마를 쓴다. 방법이 없다. 옆에 있는 사람을 깨우지 않으려면 딴 방을 쓰는 수밖에 없다. 옆에 있는 사람에게 각 방을 쓰자고 제안한다.

  쓰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충동은 밤낮을 가리지 않는다. 낮에 오는 쓰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충동은 일을 중단하게 한다. 일을 중단하고 메모장을 꺼내 쓴다. 메모장이 없으면 기안지 귀퉁이에다 쓴다. 기안지 마저 눈에 안 띄면 이중섭처럼 담배 곽에 그린다. 비닐을 걷어내고 담배 곽에 그린다. 담배 은박지에 그린다. 회의하는 중에 쓰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충동이 찾아오기도 한다. ‘회의’에 귀 기울이지 않고 회의용 자료 위에 쓴다, 쓴다.

  생업보다 쓰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충동이 중요하다. 생업을 그만두는 자들. 생업으로부터 쫓겨나는 자들.

  강의하다 말고 강의를 중단하고 교탁 위 출석부 빈자리에 쓴다. 웅성거리는 학생들, 혹은 청중들. 학생들, 혹은 청중들이 말한다. 저 선생은 강의하다가 가끔 멈춘다고. 교탁 위에 뭔가를 쓴다고.

  시인들은 예술가적 인간형의 전형이다. 시인들은 많이 혼자 산다. 많이 혼자 잔다. 많이 생업을 때려치운다. 많이 ‘혼자’ 죽는다. 본격적 가정을 꾸려나갈 수 없는 시인들. 본격적 생업에 종사할 수 없는 시인들. 자본주의적 생활양식에 종속될 수 없는 시인들. 불쌍한 종족이다. 가난한 종족이다. 불쌍한 종족인가. 가난한 종족인가.


  세상의 가장 큰 북 내 몸속에 있네

  온갖 소리북채가 시도 때도 없이 울려대는 귀북이네


  한밤이나 새벽녘 북이 절로 울 때면

  나는 지상에 없는 세월을 홀로 가네

  […]

  늘 나의 중심을 잡아주는 북,

  때로는 천 개의 섬이 되어 반짝이고 있네

  ― 「귀북은 줄창 우네」 부분


“북”이 시마이다. 쓰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충동이다. “온갖 소리북채가 시도 때도 없이 울려대는 귀북”이라고 하였기 때문이다. 북이 절로 운다고 하였기 때문이다. (귀북이라는 것이 절묘하다. 시마가 귀로 온다고 하였기 때문이다. 분명한 실체라는 것이다. 들은 것을 안 들었다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시마는 ‘시도 때도 없이’ 찾아온다. ‘절로’ 찾아온다. 압권은 “지상에 없는 세월을 홀로 가네”라고 한 것이다. ‘지상에 없는 삶’은 지상에 없는 삶을 살고 있다고 한 것이다. 자본주의적 삶을 살고 있지 않다고 한 것이다. ‘홀로 간다’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지상에 없는 세월’을 가는 자가 홀로 가는 자이다. 자본주의적 생활양식에 벗어나 있는 자가 홀로 가는 자이다. 일찍이 바타이유는 예술가는 생산행위의 삶이 아닌 소비행위의 삶을 사는 자라고 했다.

  그냥 북이 아니라, “세상의 가장 큰 북”이 “몸속에 있”다고 했으므로 불쌍한 종족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가난한 종족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큰 북’은 불쌍과 가난과 인근의 관계에 있지 않다. 아니, ‘큰 북이 내 몸속에 있다’고 자랑조로 얘기하는 자는 불쌍과 거리가 먼 자이다. 가난과 거리가 먼 자이다. 끝 연에서 “나의 중심을 잡아주는 북”이라고 한 것도 불쌍한, 가난한, 종족이 아니라는 증거가 된다. 중심을 잡아주는 ‘것’이 있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다. ‘무엇으로 사는가’라고 물었을 때 ‘무엇으로 산다’고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다. ‘북’으로 산다고 하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다. 그 북이 “천 개”가 있는 사람은 천 배 행복한 사람이다.

  북을 시마라고 해석했다. 북이 쓰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충동이라고 해석했다. 중간 셋째 연을 보자.


  봄이면 꽃이 와서 북을 깨우고

  불같은 빗소리가 북채가 되어 난타공연을 하는 여름날

  내 몸은 가뭇없는 황홀궁전

  둥근 바람소리가 파문을 기르며 굴러가는 가을이 가면

  눈이 내리면서 대숲을 귓속에 잠들게 하네


정확히 말하면 “꽃”이 시마의 원인이다. “불같은 빗소리”가 시마의 원인이다. “둥근 바람소리”, “눈이 내리면서 대숲을 귓속에 잠들게 하”는 것이 시마의 원인이다. 꽃, 불같은 빗소리, 둥근 바람소리, 눈이 내리면서 대숲을 귓속에 잠들게 하는 것들이 쓰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충동을 낳는다.



황금의 시정신

  꽃이 와서 북을 깨운다고 했으므로 북을 시정신이라고 할 수 있다. 시마는, 쓰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충동은, 준비된 시정신이 없으면 무용지물이다. 아니, 준비된 시정신이 없으면 시마가 찾아오지 않는다. 쓰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충동이 찾아오지 않는다.

  ‘황금감옥’이라는 시집명 또한 이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귀북’을 통해 시마가 들어오는 몸이 황금감옥이다. 황금이 들어있는 감옥이다. 아무나 황금감옥의 몸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황금의 시정신을 갖고 있는 자가 황금감옥의 몸을 가지고 있는 자이다. 황금이 황금을 알아본다. 황금의 시정신이 황금의 시마를 불러들인다. 불러들인 시마만큼 황금의 몸은 점점 휘황찬란해진다. 황금의 시정신이 황금의 시마를 불러들인다고 해서 몸의 무게가 계속 불어나는 것은 아니다. 시정신은 무게가 나가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시마는 무게가 나가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보이지 않는 無무게의 황금의 시정신! 보이지 않는 無무게의 시마! 홍해리는 시집 제목 ‘황금감옥’과 서시 「귀북은 줄창 우네」를 통해 시정신의 한 극단을 보여주었다. 시인임을 포고하였다. 준비된 황금의 시정신을 가진 시인임을 포고하였다. 실제 「황금감옥」이라는 시에서 황금의 시정신을 가진 시인임을 포고하였다.


  황금감옥은 네 속에 있다

  — 「황금감옥」 부분


  잠들지 않는 시정신을 또한 「풍경風磬」이 보여주고 있다. 풍경소리가 시인을 잠들지 않게 하고 있다. 시정신을 잠들지 않게 하고 있다.


  밤새도록 잠들지 말라고

  잠들면 그만이라고

  또록또록 눈뜨고 있는

  하늘물고기의

  초록빛 종소리

  ― 「풍경風磬」 부분


“풍경” 소리를 “하늘물고기의/ 초록빛 종소리”라고 은유한 것이 이채롭다. 시정신이 지향하는 것은 결국 ‘하늘’이라고 하는 것이다. 하늘과 본질은 대체의 관계에 있다. 하늘이 본질이고, 본질이 하늘이다. 하늘을 알면 다 아는 것이다. 하늘까지 가면 다 가는 것이다. 공감각 구조의 초록빛 종소리의 ‘초록빛’은 소망의 초록빛. 다름 아닌 하늘과 조우하기를 간절히 소망하는 것에 대한 알레고리!

 

여자를 활짝 핀 꽃 같이 밝혀주는 것은

  무엇일까

  환한 대낮 같이 열어주는 것은 무엇인가

  […]

  여자는 스스로 열리는 호수

  환하게 빛나는 대지라서

  하늘 아래

  세상에서 여자를 밝힐 일은 없다

  — 「여자를 밝히다」


그냥 여자가 있고 활짝 핀 꽃 같은 여자가 있다. 그냥 “여자”는 시인의 언어에 의해 “활짝 핀 꽃 같”은 여자가 된다. “환한 대낮 같”은 여자가 된다. 이 시가 현대적인 것은 앞뒤가 모순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여자는 스스로 열리는 호수/ 환하게 빛나는 대지라서/ 하늘 아래/ 세상에서 여자를 밝힐 일은 없다”고 하였기 때문이다. 여자를 스스로 열리는 호수, (스스로) 환하게 빛나는 대지라고 하였기 때문이다. 여자를 밝힐 일은 없다고 하였기 때문이다. 모순으로 읽힐 수 있는 것만도 아니다. ‘여자를 스스로 열리는 호수’라고 한 것을 시쓰기에 대한 알레고리라고 볼 수 있다. 많은 시인들이 억지로 쓸 때보다 저절로 써질 때에 좋은 시가 나온다고 말한다. 시가 스스로 열어지기를 시인은 기다릴 줄 알아야 한다. 다음은『말테의 수기』에서의 릴케의 유명한 말이다.


  시 한 줄을 쓰기 위해서는 많은 도시를 보아야만 하고, 사람들과 사물들을 보아야만 한다. 동물들을 알아야만 한다. 어떻게 새들이 날아가는지를 느껴야만 한다. 작은 꽃들이 아침에 취하는 몸짓을 알아야 한다. 낯선 지방에 있던 길들을, 예기치 못했던 만남들을, 오랜 시간 보고 있었던 이별을 돌이켜 생각해볼 수 있어야 한다. 아직 해명되지 않은 어린 날들을, 아이가 기뻐할 것을 가져왔으나 아이가 그것을 알지 못했을 때 부모님이 받았을 상처들을 - 그것은 다른 아이에게는 기쁨이었을 터이다 -, 매우 기묘하게 시작하여 많은, 깊은, 무거운 변화를 동반하는 어린 시절의 병들을, 사용을 잘 하지 않는 고요한 방들을, 바닷가에서 맞은 아침들을, 바다 그 자체를, 바다들을, 바스락거리며 높이 떠간, 그래서 별과 함께 날아간 여행지에서의 밤들을, 돌이켜 생각해볼 수 있어야 한다. […] 그러나 기억을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다. 기억이 많아지면 기억을 잊어버릴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기억들이 다시 돌아오기를 엄청난 인내를 가지고 기다려야 한다. 그럴 것이 기억들이라는 것은 아직 아무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기억들이 우리 내부에서 피가 되고, 시선이 되고, 몸짓이 되고, 이름마저 없어져, 우리 자신과 더 이상 구분되지 않을 때, 그 때 비로소, 아주 기묘한 시간에, 시의 첫 단어가 기억의 한 가운데서 떠올라 기억 밖으로 외출하게 되는 것이다.


  「장을 읽다」를 ‘말테 식’으로 읽을 수 있다. “장”을 만들어가는 과정을 시를 만들어가는 과정에 대한 알레고리로 보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자궁”과 “임부”가 이런 생각을 하게 했다. 자궁은 창조의 원천지이고, 임부는 창조의 원천지를 관리한다.


  그녀는 온몸이 자궁이다

  정월에 잉태한 자식 소금물 양수에 품고

  장독대 한가운데 자릴 잡으면

  늘 그 자리 그대로일 뿐—,

  볕 좋은 한낮 해를 만나 사랑을 익히고

  삶의 갈피마다 반짝이는 기쁨을 위해

  청솔 홍옥의 금빛 관을 두른 채

  정성 대해 몸 관리를 하면

  인내의 고통이 있어 기쁨은 눈처럼 빛나고

  순결한 어둠 속에서 누리는 임부의 권리.


  몸속에 불을 질러 잡념을 몰아내고

  맵고도 단맛을 진하게 내도록

  참숯과 고추, 대추를 넣고 참깨도 띄워

  — 「장을 읽다」 부분


“소금물 양수”, “볕 좋은 한낮 해”, “청솔 홍옥의 금빛 관”, “참숯”, “고추”, “대추” “참깨”들에 의해서 장이 태어나듯이 ‘온갖 경험Erfahrungen’을 한 후에야 시가 태어난다고 한 것으로 보는 것이다.



내공이 있는 시

또 하나의 메타시는 「어둠의 힘」이다. 농민들을 등장시킨 톨스토이의 ‘자연주의적’ 장편소설과 이름이 같다.


  결국 하늘에 가 닿는 것은

  우듬지가 아니라 뿌리다

  뿌리가 나무로 들어가

  우듬지를 곧추세워야, 비로소

  나무는 하늘에 닿는다

  그러니 하늘에 닿는 것은 뿌리다

  뿌리의 힘이다.

  — 「어둠의 힘」 부분


“우듬지”가 표현이라면 “뿌리”는 내공이다. 내공이 우듬지를 “하늘에 […] 닿"게 만든다. 결국 하늘에 닿는 것은 뿌리라는 말이다. 내공이 표현을 결정하고, 표현이 내공을 결정한다고 말하고 싶지 않다. 내공이 표현을 결정한다고 말하고 싶다. 홍해리 시인은 이것을 알고 있엇다. 표현이 아닌 내공이 하늘과 만나게 한다는 것을. 인생의 큰 비밀과 만나게 한다는 것을.

  「개화開花」라는 시가 주목되는 것은 시쓰기를 “폭발”에 비유했기 때문이다. 꽃이 폭발로서 성립하듯이 시 또한 폭발로서 성립한다. 폭발 이전과 이후는 다르다. 이전이 가시적 無존재라면 이후는 가시적 有존재이다. 폭발은 또한 창조적 행위를 강조한 것으로 보인다.


  술잔마다 꽃배를 띄우던

  소인묵객騷人墨客

  마음 빼앗겨

  잠시 주춤하는 사이

  뼈만 남은 가지마다

  폭발하는,


  오오, 저 푸른 화약花藥 내!

  ― 「개화開花」 부분


“저 푸른 화약花藥 내”를 시쓰기의 창조성에 대한 알레고리로 보는 것이다. 물론 만들어지는 시도 있다. 조각품처럼 오랜 시간 갈고 닦은 시도 있다. 낭만주의 시대 이후 많은 현대시들이 만들어지는 시들이다.

  폭발을 물론 내공의 폭발로 볼 수 있다. 다시 말하지만 내공의 폭발에서  더 이상 표현은 문제되지 않는다. 내공이 표현을 만들기 때문이다. 아니, 내공 자체가 표현이 되기 때문이다. 



시는 마약이다

  시는 ‘중독성’ 마약이다. 한 번 중독되면 벗어나기 힘들다. 아니 마약 이상이다. 담배 끊는 사람은 간혹 보이지만 시 끊는 사람은 보기 힘들다.


  마음 빼앗기고 몸도 준 사내에게

  너 아니면

  못 산다고 목을 옥죄고

  바람에 감창甘唱소리 헐떡헐떡 흘리는

  초록치마 능소화 저년

  갑작스런 발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라, 花들짝

  붉은 혀 빼물고 늘어져 있네.

  ― 「능소화」 부분


“마음 빼앗기고 몸도” 주었다는 것을 그렇게 보는 것이다. “너 아니면/ 못 산다고 목을 옥죄고/ 바람에 감창甘唱소리 헐떡헐떡 흘리는/ 초록치마 능소화 저년”을 시인의 자화상으로 보는 것이다. “사내”는 그렇다면 詩 자체가 된다. 詩에게 “붉은 혀 빼물고 늘어져 있”는 시인의 처참하게 행복한 모습! “갑작스런 발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라, 花들짝/ 붉은 혀 빼물고 늘어져 있네”를 시마가 쳐들어왔을 때의 모습으로도 볼 수 있다. 시마는 갑자기 쳐들어오기 때문이다. ‘花들짝/ 붉은 혀 빼물고 늘어져 있네’를 시마의 결과물로 보는 것이다. 많은 사람이 마약 중독으로 죽는다. 담배 중독으로 죽는다. 죽음으로써 중독에서 해방된다. 시인도 죽음으로써 시로부터 해방된다. 다음 구절을 그렇게 볼 수 있을까.


  시집『봄, 벼락치다』가 나온 날 밤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공존하는

  거기가 여기인 초월의 세상

  ― 「시」를 먹다」 부분


『봄, 벼락치다』는 홍해리 시인의 바로 전 시집 이름. 시집이 나오면 시인은 잠시 죽는다. 시로부터 잠시 해방된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공존하는” 세상은 “여기”의 세상이 아니다. “거기”의 세상이다. “초월의 세상”이다.

  시인이 현실 원칙을 따르지 않는 자라는 것을 명시적으로 밝힌 곳은 「시인」이다. 끝 연에서 시인은 시인을 다음과 같이 단정하고 있다.


  죽도 밥도 없이

  생도 사도 없이 꿈꾸는 사람.


한마디로 말하면 초월한 사람이라고 한 것이다. 자본주의적 생활양식을 초월한 사람, 나아가 “생”과 “사”를 초월한 사람이라고 한 것이다. 죽어도 시를 놓지 않겠다고 한 것일까. 다음 구절도 예사롭지 않다.


  시 쓰는 것이 무덤 파는 일임을

  이제야 알겠다

  시는 무덤이다

  제 무덤을 판다고 욕들 하지만

  내 무덤은 내가 파는 것---

  시간의 삽질로 땅을 파고

  나를 눕히고 봉분을 쌓는다

  — 「나의 시는 나의 무덤」 부분


“시 쓰는 것이 […] 제 무덤" 파는 일인 줄 알고 있는 사람, 그 사람이 시인이라고 한 것이다. '중독'을 다시 말할 수 있다. 중독의 끝은 파멸이다. 파멸인 줄 알면서 대부분 그 중독을 끊지 못한다. 이해할 수 없는 일도 있는 법이다. 예술가적 생활양식을 따르는 사람도 있고 자본주의적 생활양식을 따르는 사람도 있는 법이다. 절대적 소비 원칙만 고집하는 사람도 있고, 절대적 생산 원칙만 고집하는 사람도 있는 법이다.



나가며

시의 최고 경지는 시를 쓰지 않는 것인지 모른다. ‘시는 이미 쓰여있다’고 인식한 경지인지 모른다. 삶이 시이고, 그러므로 자연이 시이고, 나아가 우주가 시라는 경지!『봄, 벼락치다』에 실린 「세란정사洗蘭精舍」에는 다음과 같은 “소리”가 있다.


  ‘자네가 쓰는 시는 시도 아니다

  자네가 쓰는 것도 아니다

  자네가 어찌 시를 쓰겠는가

  시는 어디 있는가

  이미 쓰여져 있지 않은가’ 하는 소리

  ― 「세란정사洗蘭精舍」 부분

“시는 […] 이미 쓰여져 있”으므로 “자네가 쓰는 시는 시도 아니다”라고 하고 있다. 삶이, 자연이, 우주가, 시인데 이것을 베낀 것이 어찌 시라고 할 수 있겠는가?


  별들의 공중누각을 잎새로 가리고 있는

  마당가 오죽 몇 그루 바람소리로 웃고 있네.

  ― 「세란정사洗蘭精舍」 부분


“별들의 공중누각을 잎새로 가리고 있는/ 마당가 오죽 몇 그루”에게 부끄럽지 않느냐고 묻고 있다. 시 쓰는 것이 부끄럽지 않느냐고 묻고 있다. 역시 메타시이다. 홍해리의 최근 시들을 관통하는 가장 중요한 열쇠어는 메타시이다. 주조가 詩 자체에 대한 성찰이다.

  『봄, 벼락치다』에는 「세란정사洗蘭精舍」 말고 「그런 시」, 「홍해리洪海里는 어디 있는가」, 「나는 너를 힘들게 한다」 등 여러 메타시들이 있다. 「홍해리洪海里는 어디 있는가」를 보자. 전문이다.


  시詩의 나라

  우이도원牛耳桃源

  찔레꽃 속에 사는

  그대의 가슴속

  해종일

  까막딱따구리와 노는

  바람과 물소리

  새벽마다 꿈이 생생生生

  한 사내가 끝없이 가고 있는

  행과 행 사이

  눈 시린 푸른 매화

  대나무 까맣게 웃고 있는

  솔밭 옆 마을

  꽃술이 술꽃으로 피는

  난정蘭丁의 누옥이 있는

  말씀으로 사는 마을

  그곳이 홍해리洪海里인가


주목되는 것은 “행과 행 사이”이다. ‘행과 행 사이’라는 것은 사이의 존재라고 하는 것이다. 사이의 존재가 행(들)을 볼 수 있다. 사이의 존재는 그러므로 숲 밖의 존재와 같다. 숲 밖에서 숲을 보는 존재와 같다. 숲에 끼어있지 못하는 존재이지만, 한편으로는 숲 전체를 볼 수 있는 존재이다. 시인은 숲 전체를 보려고 하는 존재이다.

  또 하나 주목되는 것은 “솔밭 옆 마을”이다. 사이의 존재라고 해도, 숲 밖의 존재라고 해도, ‘마을’을 외면할 수 없다는 것이다. 시정에서 부대끼며 사는 시인 그가 바로 “홍해리洪海里”라고 한 것이다. 끝에서 둘째 행 “말씀으로 사는 마을”도 이점에서 주목된다. 시의 ‘말씀’으로 마을을 세운다고 한 것이다. 시의 사회적 기능을 강조한 것인가. 아니면 시인 공화국을 강조한 것인가.


보론

시대정신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1981년의 시집『원단기행元旦紀行』에 실린 「신금언론新金言論」을 들 수 있다.


  콩 심은 데 팥이 팥 심은 데 콩이 난다.

  한 마리의 토끼를 쫓는 일이나

  우물을 하나만 파는 일은 옛날이야기.

  빈 그릇도 소리가 나지 않으며

  천릿길도 한 발짝에 달려가면 된다.

  흘러간 물은 다시 돌아오고

  티끌은 티끌 대산은 태산.

  기쁨의 종말은 기쁨 슬픔의 시초는 슬픔

  — 「신금언론新金言論」 부분

 

여기에서의 아이러니, 혹은 역설, 혹은 풍자들을 시대정신과 무관하다고 볼 수 없다. 1980년대 초의 격변의 시대정신과 무관하다고 볼 수 없다. 1980년대 초의 상황은 “콩 심은 데” 콩이 “팥 심은 데” 팥이 나는 상황이 아니었다. “콩 심은 데 팥이 팥 심은 데 콩이” 나는 상황이었다. “한 마리의 토끼를 쫓는 일이나/ 우물을 하나만 파는 일은 옛날이야기”가 된 상황이었다. “빈 그릇도 소리가 나지 않으며/ 천릿길도 한 발짝에 달려가면 된다./ 흘러간 물은 다시 돌아오”는, 한마디로, “金言”이 거절되는 상황이었다. ‘“티끌” 모아 “태산”’을 존중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슬픔”이 슬픔으로 응보되는 상황이었다.

  삶(혹은 시대정신)과의 밀접한 관련은 이미 1969년의 첫 시집『투망도投網圖』에서부터 나타난다. 「겨울 아침의 주차장」을 보자. 부분이다.

  

  그곳은꽃밭이었다

  꽃밭의한낮이었다

  여자와여자들의복부였다

  신들은웃고있었다

  신들은또울고있었다

  어떤신은울지도웃지도않고있었다

  사람은하나도없었다

  모두짐승의세상이었다

  돌아가는길은항상혼자였다

  그러나그곳엔삶의맥이놀고있었다.

     

“주차장”은 ‘삶의 한가운데’와 관계있다. 붐비는 곳이기 때문이다. 주차장을 “꽃밭”으로 은유한 것은 삶의 한가운데를 예찬한 것이다. 삶의 한가운데에 더 가까이 있는 것은 남자보다 여자이기 쉽다. 낳고 기르는 것은 아직(?) 여성과 더 인근의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여자들의복부”를 강조하였다). 여성은 그러므로 창조주 “신”과도 인근의 관계에 있다. 삶의 한가운데는 또한 “웃고”, 우는, “울지도웃지도 않”은 세상이다. “사람은하나도없었다/ 모두짐승의세상이었다”는 ‘삶의 한가운데’에 대한 아이러니로 보인다. 시를 “삶의맥이놀고있었다”라고 끝내고 있기 때문이다. “돌아가는길은항상혼자였다”의 ‘혼자’도 삶의 한가운데와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바로 이어서 (역시) “그러나그곳엔삶의맥이놀고있었다”고 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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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찬일 _ 춘천 출생. 1993년『현대시사상』에 「무거움」 「갈릴레오」 등을 발표하며 시단에 데뷔. 시집으로『화장실에서 욕하는 자들』,『나비를 보는 고통』,『나는 푸른 트럭을 탔다』,『모자나무』등이 있음. 박인환문학상, ‘시와시학상젊은시인상’ 등 수상. nabi56@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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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우리詩』2008. 9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