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평론·시감상

[스크랩] 물의 뼈 / 홍해리

洪 海 里 2008. 7. 29. 09:33

물의 뼈 / 홍해리

 

 

물이 절벽을 뛰어내리는 것은
목숨 있는 것들을 세우기 위해서다


폭포의 흰 치맛자락 속에는
거슬러 오르는 연어 떼가 있다


길바닥에 던져진 바랭이나 달개비도
비가 오면 꼿꼿이 몸을 세우듯


빈자리가 다 차면 주저 없이 흘러내릴 뿐
물이 무리하는 법은 없다


생명을 세우는 것은 단단한 뼈가 아니라
물이 만드는 부드러운 뼈다


내 몸에 물이 가득 차야 너에게 웃음을 주고
영원으로 가는 길을 뚫는다


막지 마라
물은 갈 길을 갈 뿐이다


- 월간 <우리시> 3월호 소시집

 

 


[감상]


물이 절벽에서 떨어지는 것을 색다른 시각으로 그렸네요. 과연 그렇습니다. 자신을 희생해서 연어의 입지를 세우는 물의 치맛자락은 어쩌면 어미의 포근한 품이 되겠습니다. 물은 과욕을 부리는 인간과는 다르게 적당히 완급을 조절하는 여유도 가지고 있지요. 막히면 돌아가고 차면 넘치고 부족하면 채우는 물의 지혜를 우리는 눈여겨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 무엇인가 스스로의 그릇됨을 바로잡아야 되겠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런 부분을 망각하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가끔 자연재해로 포장된 인공재해를 당하기도 합니다. 그런데도 인간은 물의 진로를 마음대로 구획하려 합니다. 댐을 만들고 수로를 돌리고 인공강우를 연구하고, 그래도 여기까지는 괜찮을지 모릅니다. 자연과 인간의 상생을 생각한다면, 이 정도는 자연이 기분 좋게 양보할 수도 있겠습니다. 아니, 창조적 파괴의 결과물이 자연에게도 이롭다면 환영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과연 그러한가요? 자연의 뜻을 거스르지 않고 상생하려 노력했던가요? 자연의 의지를 제대로 파악이나 하고 있기는 한가요? 아무리 자문을 한다 해도, 또한 그 대답에 너그러운 기준을 정한다 해도 <그렇다>라는 답을 하기에는 궁색한 것이 사실일겁니다. 해서 시인은 스스로 반성하자는 의미에서 <물의 뼈>라는 시를 썼을지도 모릅니다. 물의 <의지>를 나타내는 의미로서 물의 몸에 내장된 <뼈>라는 제목으로 말입니다.


시인의 그런 의도가 6연에 나타납니다. [내 몸에 물이 가득 차야 너에게 웃음을 주고 / 영원으로 가는 길을 뚫는다]며 무분별한 자연훼손으로 인해 자연으로부터 받을 수 있는 혜택이 사라질 수 있다는 것을 말하네요. 얼마 전 중국 쓰촨(四川)성에 발생한 대지진의 경우 대규모 댐의 수압이 큰 영행을 미쳤다고 하는데, 이는 받을 수 있는 혜택 (여기서 혜택이란 무재해를 뜻합니다.)을 받지 못한 대표적인 사례라 할 수 있겠네요.


그런데 이 시는 자연이 인간에게 베푸는 것뿐만 아니라 부모가 자식에게 주는 사랑도 함께 말하는 듯합니다. 2연에서도 그렇지만, 5연에서는 [생명을 세우는 것은 단단한 뼈가 아니라 / 물이 만드는 부드러운 뼈다]라 합니다, 이는 의지가 되는 물의 뼈는 부드럽기 때문에 주변과 조화를 잘 이루는 것으로 이해되지만, 또한 자식에 대한 부모의 사랑이 따뜻하고 부드럽다는 것으로 읽히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7연에서는


자연의 뜻을, 부모의 뜻을 거스르지 말라고 하는 것 같습니다. -- 여 백

출처 : 우리시회(URISI)
글쓴이 : 여 백 원글보기
메모 : * 박승류(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