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평론·시감상

<詩人論> 시, 시말, 시인을 위하여 / 洪海里論 / 김석준(평론가)

洪 海 里 2008. 9. 6. 10:58

 

 

시, 시말, 시인을 위하여

 

- 洪海里論

 

                                                                      김 석 준(시인 · 문학평론가)


1. 글을 들어가며

  생을 시답게 살 수만 있다면, 생은 그 자체로 행복한 그 무엇으로 기술될 수 있다. 특히 홍해리 시인의 경우처럼, 시가 고통의 기록이거나 미적 새로움을 추동하는 그 무엇으로 존재하지 않을 때, 혹은 서정성의 범주 내에서 시말들을 예인할 때, 시란 그 자체로 즉자적인 삶-세계의 문양을 시말로 치환시키는 미메시스이다. 홍해리의 시들은 아직 따뜻한 세상을 푸르고 환하게 소묘하면서 겨자씨만큼 가벼운 생의 무게를 시말 속에 중첩시켜 생과 세계를 동시에 유미화시킨다. 허나 싸늘해지고 가벼워지는 생. 허나 너무도 가볍게 기화해버리고 마는 생. 시란 세계-삶과 만나는 다양한 시적 형상화 방식으로 그 정체를 규명할 수 있는데, 홍해리의 시적 구현은 세계품에 말품이 안겨 있다. 말하자면 홍해리의 시말의 지향점은 세계와 인간 사이에 교량을 놓거나 현상하는 세계-내-사태를 시말이 대리 표상하는 데 있다.

  현상을 읽고 시말화하기. 현상 속에 이입되어 영혼을 기투하기. 홍해리의 시말들은 시말을 위한 시말만의 시적 유희가 아니라, 시말의 숭고한 제의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세계-기호가 발하는 의미적 사태를 시말로 치환시키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홍해리의 시말들은 자연-세계가 발화한 흔적들을 의미적으로 읽어, 그것을 주체적 시선으로 승화시키는데 있다. 주객의 통일. 주체와 객체를 시말 속에 가지런히 안치시키기. 하여 순정한 자연의 비의를 의식으로 전유하기. 홍해리에게 있어서 시인이란 그저 자연-기호를 받아쓰는 대필가인지도 모른다. 다시 말해서 시인이 「세란정사洗蘭精舍」에서 말한 것처럼, 시가 발원하는 지점은 이미 씌어진 세계(자연)-기호를 응시하면 된다. “이미 쓰여져 있”는 시. “눈앞에 널려 있는 시詩.” 허나 보지 못한다, 허나 의식의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어쩌면 홍해리의 시말들은 견자적 시 눈의 지점에서 움트고 있는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시인은 표현자가 아니라 발견자이기 때문이다. 전일한 의식의 지점에서 대상을 응시하기. 대상-기호가 분출하는 의미를 시말-기호로 치환시키기. 시인은 접신적 영매다. 시인은 주술에 들린 자이다. 시인은 세계-자연과 신실한 의식의 지점에서 만나는 자이다. 비록 홍해리의 시말들이 요동치는 지점이 낭만적 서정성에 기반하고 있지만, 하여 그의 시말들은 시대지평의 타자적 글쓰기의 지점으로 무한소급해가지만, 그것은 소외된 타자가 아니라 행복하게 시를 향유하는 타자, 즉 스스로를 소외시켜 시적 기대지평의 바깥에 위치하기를 자초하고 있다. 따라서 홍해리의 시말들은 행복하고 풍요로우며, 시「지족」에서 말한 것처럼 더 이상 흔들림이 없이 시말-운명을 인간-운명으로 승화시켜 부드러운 시선으로 보듬어 안고 있다.


2. 자연과의 조응

  “나의 시는 풀 물 꽃 흙 나무 하늘 사랑 바다 사람임.”(「차용증/각서」일부)이라는 구절은 홍해리의 시적 심급을 가장 간결하면서도 강렬하게 언명한 것에 해당한다. 그의 시들은 시적 자연이면서 자연의 시이다. 고운 결, 푸른 숨. 그 숨과 결에 동승하여 온 천하를 순수한 빛으로 채색하는 시인. 사람이 자연이고 자연도 사람이 되는 시. 자연에 너무도 거대한 빚을 지고 있는 시(인). 홍해리의 시말들은 경계의 무화無化이다. 하여 주체와 객체가 상호 혼융되는 서정적 동감同感의 순간을 시말 속에 응고시켜 물아일체로 승화시켜 가는 시말. 홍해리의 시적 언어는 말-자연의 풍모를 적극적으로 실천하면서 이 세계를 유미적으로 형상화하고 있다.

  경계 지우기. 분할된 조각을 다시 한 곳에 모아 통합하기. 서정은 모음이다. 서정은 통합이다. 만약에 시말이 세계-내-문양들을 한 자리에 불러 모아 전일한 의식의 지점으로 이입해 들어갈 때, 혹은 서정적 동감의 순간을 몽상할 때, 그것은 자연이 발하는 순수한 기호-사태를 유위적有爲的 의미로 읽어 시말작용으로 고양시키는 행위가 된다. 따라서 홍해리의 시말들은 자연(세계)-내-사태에 시혼을 불어넣어 이 세계 전체를 정령의 기호로 치환시킨다. 자연과의 조응. 자연이 발화하는 의미를 채집하기. 말-자연으로 무한 수렴해가는 시정신. 

 

천길 낭떠러지다, 봄은.


어디 불이라도 났는지

흔들리는 산자락마다 연분홍 파르티잔들

역병이 창궐하듯

여북했으면 저리들일까.


  나무들은 소신공양을 하고 바위마다 향 피워 예불 드리

는데 겨우내 다독였던 몸뚱어리 문 열고 나오는게 춘향이

여부없다 아련한 봄날 산것들 분통 챙겨 이리저리 연을

엮고 햇빛이 너무 맑아 내가 날 부르는 소리,


  우주란 본시 한 채의 집이거늘 살피가 어디 있다고 새

날개 위에도 꽃가지에도 한자리 하지 못하고 잠행하는 바

람처럼 마음의 삭도를 끼고 멍이 드는 윤이월 스무이틀

이마가 서늘한 북한산 기슭으로 도지는 화병,


벼락치고 있다, 소소명명! 

-「봄, 벼락치다」전문


  조응은 대자다. 조응은 즉자적 자연-기호의 의식적 읽기이다. 허나 조응은 대자화된 의식을 변증법적 합일을 통해서 모든 의식적 사태를 다시 말-자연으로 회귀시킨다. 이를테면 홍해리의 시들은 그 자체로 자연화를 지향하고 있다. 자연의 시말화를 통한 말-자연의 실현. 이것이 바로 홍해리의 시말 내에 육화된 시적 사태인데, 그것은 이중화된 의식작용이 빚어낸 결과이다. 비록 시가 귀의하는 공간은 이미 이 세계가 정의적으로 그렇게 되어 있는 자연의 구조화된 원리이기는 하지만, 홍해리의 시말들은 자연의 의식적 전유이다. 특히 시 「봄, 벼락치다」에 형상화되어 있는 것처럼 “연분홍 파르티잔들”이 펼쳐내는 봄꽃들의 향연을 “불”과 “역병”으로 비유하면서 비의적 섭리의 세계로 빨려 들어가고 있다.

  날벼락치는 봄. 봄의 자의식적 읽기. 조응을 통한 봄의 의식적 전유. 홍해리의 시말들은 조응을 통한 경계 짓기와 그 경계의 소멸로 짜여져 있다. 봄을 “천길 낭떠러지”로 인식하다가 그 봄의 경계적 분할을 지워버리는 시인. 시인은 이중화된 의식의 지점을 경유하다가 왜“우주란 본시 한 채의 집”이라고 인식하는가. 더구나 그것도 수많은 살피(경계)로 짜여진 이 세계를 광대한 우주적 질서로 무화시키는가. 시 쓰기란 그 자체로 분절화 된 의식의 편린들을 시말로 치환시키는 형상화 작용이 아닌가. 그런데 홍해리의 「봄, 벼락치다」는 벼락 치는 봄꽃에 매달린 “마음의 삭도”를 따라가다가 땅과 땅의 경계, 계절과 계절의 경계를 가볍게 지워버린다. 다시 말해서 홍해리의 시말 속에 육화된 자연과의 조응은 모든 사태를 자연의 이법 속으로 수렴시켜가고 있다.


한여름 다 해질녘

봉숭아 꽃물을 들인다

꽃을 따 누이의 손톱마다

고운 물을 들인다

이쁜 반달 손톱 속에는 벌써

첫눈이 내린다

매미 소리 한철 같은 누이의

첫사랑이 내린다

추억이 짓는 아스라한 한숨소리

손톱 속으로 스며들고

손가락 꼭꼭 싸맨 그리움이

추억추억 쌓이고 있다

해 설핏한 저녁에 꽃물을 들이는

눈썹 마당에 이는 바람인 듯

슬슬슬 어스름이 내릴 때

가슴속에선 누가 북을 치고 있는지

다소곳 여민 적삼 안으로

그리움이 스멀스멀 스며들고

입술 촉촉 젖어 살짝 깨무는 소리

어스레한 누이의 젖은 눈가로

봉숭아꽃 하나 둘 지고 있었다.

-「추억, 지다」 전문


  몽상과 슬픔 사이에서 용솟음치는 시말. 추억은 아름답기도 하고 슬프기도 한 오묘한 흔적이다. 추억은 안온한 몽상 속에 시말을 불러일으켜 세운다. 산산이 부셔져는 내리는 포말처럼 추억은 시인의 가슴 안에서 요동치다가 과거의 어느 한 순간을 정확하게 재현하지만, 그것은 가볍게 지고 마는 봉숭아 꽃잎에 기입된 흔적이다. 허나 켜켜이 쌓여있는 그리움. 허나 심연 깊숙이 가라앉아 은일한 슬픔을 새긴 첫사랑의 기억. 시인 홍해리는 「추억, 지다」에서 져버린 추억을 재건하여 말-자연성을 육화시키고 있다. 이를테면 말-자연은 인간화된 세계를 추억으로 환기시키는 심오한 미적 경지이다. 추억의 이쪽과 저쪽의 경계 지대를 응시하는 말-자연. 시인의 시말은 말-자연 속에 새겨진 흔적을 추억하는데, 그것은 누이의 첫사랑, 한숨소리, 그리움, 그리고 젖은 눈가다. 봉숭아 꽃물 들이는 한 여름 밤 혹은 첫눈 내릴 무렵의 근방을 배회하면서 시인은 복숭아 꽃잎 지는 사연을 시말 속에 응고시키고 있다. 그리움의 꽃문양이 새겨진 추억. 봉숭아 꽃잎 속에 기입된 슬픈 첫사랑. 시인은 말-자연을 삶-자연으로 치환시켜 슬픈 삶의 자화상을 소묘하고 있다.

  애이불비哀而不悲  혹은 애이불상哀而不傷. 홍해리 시인의 그리움 속에 기입된 슬픔은 누이의 애잔한 첫사랑에 대한 연민을 추억하는 것이지만, 결코 슬픔의 심연으로 치달아가지 않는다. 하여 「추억, 지다」는 아름답다. 꽃잎 지는 사연이 아름답고, 시말이 아름답고, 시인이 누이의 첫사랑을 추억하는 시적 태도 또한 아름답다. 사실 「추억, 지다」가 아름다운 이유는 말-자연의 삶-자연과의 일치에서 비롯하는데, 그것은 봉숭아 꽃잎을 인간학적 차원으로 승화시킬 때라야만 가능하다. 그것은 서정적 동감同感이 이루어지는 절정의 순간인데, 세계-자연을 범주적 객체로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그 객체를 인륜적 실체로 고양시켜 세계-삶을 실현시킨다. 말하자면 서정적 동감은 주객 분리나 통일의 상태가 아니라 주체와 객체의 위치가 뒤바꾸어 질적 전환이 일어난 상태이다. 왜냐하면 서정적 동감은 미적 절대의 순간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너를 불러 나를 만들고, 그 역 또한 성립시키는 미적 합일의 상태이다.  


절망도 빛이 돌고

슬픔도 약이 되는

이 지상에 머무는

며칠간

내 곁을

꽃자주빛 그리움으로

감싸주는

그대의 눈빛

아픔도

허기가 져

칼날로 번쩍이는

이 맑은 가을날

그리워라

아아,

한 줌의 적립赤立!

-「이 맑은 날에」 전문


  항상 말-자연 속엔 삶에 관한 인간학적 온기가 밀도 있게 기입되어져 있다. 말-자연은 오욕칠정 등의 감성적 태도를 고양 승화시킨 절대의 경지이다. 비록 그것이 절망이나 슬픔과 같은 인간의 한계적 상황을 지양극복해가는 과정 중에 형성된 것이기는 하지만, 말-자연은 그리움의 절대 값을 “맑은 가을날”에 응고시켜 모든 사태를 숭고의 경지에 이르게 한다. 이를테면 「이 맑은 날에」는 홍해리 시인의 자연과의 조응의 완결적 국면인데, 그것은 모든 미적 자연성을 인간학적 차원으로 읽는 동시에, 인간학화 된 자연을 다시 순수한 자연으로 되돌려 보낸다. 이러한 이중의 인식과정을 경유한 시인의 시적 경지는 노자적 의미의 도법자연道法自然의 시적 실천에 해당한다.

  “먼 산에 이는 이내”(「박태기꽃 터지다」일부)와 “그대의 눈빛”이 상호 교차하여 자연에게는 인간학적 문양을 입히고, 인간에게는 자연의 저 비의적 합일의 순간을 몽상하게 만드는 그 경지가 바로 홍해리 시인의 지향점이다. 모든 인간적 태도를 “빛”으로 감싸고 “약”으로 위무하는 시인. 모든 말-자연 속에 감성의 옷을 입히는 시인. 시인은 본 자이자, 그리워하는 자인데, 언제나 이중적 태도를 견지하면서 그 양자를 매개 실천하는 중간자이다. 왜냐하면 그러한 태도만이 시인을 시인이게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얼치기 시인이 난무하는 세상. 시의 기본적인 어법도 모르는 가짜 시인이 판을 치는 세상. 새로운 것과 쇼킹한 것에만 몰두하는 세상. 홍해리 시인의 자연에의 조응적 태도는 분명 고루한 것이거나 진부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것은 21세기의 시의 문법이 요구하는 것과 너무도 다른 궤도에서 작동하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허나 너, 나, 그리고 우리는 네겐트로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엔트로피적 시간을 향유하다가 무無라는 시공간 속으로 귀의하지 않는가. 따라서 새로움을 지향하는 모든 삶-시간-세계라는 것도 결국에는 무에 도달하게 되어 있다. 그러한 의미에서 볼 때, 홍해리의 시말들은 구태이거나 진부한 것이 아니라, 모든 사태의 원상을 사유하게 만드는 말-자연이다.


3. 사랑 혹은 에로티시즘 : 성-자연의 시적 구현


  홍해리의 시말들의 특징적 국면 중에 간과해서 안 되는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자연과 조응하는 변이적 국면인데, 시인은 자연의 내밀한 작용력을 성적 코드로 변환시킨다. 말하자면 자연이 스스로 그렇게 되어지게 만드는 그 상태를 ‘열림’이라는 성적 이미지와 병치시켜 자연현상을 해부하고 있다. 하여 홍해리적 에로티시즘은 성-리비도를 감각적 욕망으로 충족시키는 것이 아니라, 자연의 순수한 작용력, 즉 성-자연이다. 그것은 조르주 바따이유의 ‘죽음까지 파고드는 삶으로 명명된 에로티즘’도 아니고, 그렇다고 프로이트적 자기보존본능의 에로스적 실현도 아니다. 엄밀히 말해서 �해리의 에로티시즘은 성적인 것이 거세되어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욕망하는 자아의 성기 결합이 아니라, 자연의 이법이 펼쳐내는 저 숭고한 사랑의 원초적 감정에 순응하는 국면이기 때문이다.

  말초된 감각적 성의 향유가 아니라, 성-자연의 실현. 혹은 에로티시즘의 자연화. 어쩌면 홍해리가 지향하는 성-자연은 무치無恥인 성, 그 본모습으로의 회귀인지도 모른다. 본래 성은 소유의 양식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인륜적 가치를 함의하고 있는 예의의 공간도 아니었다. 매혹되어 자연스레 이끌리는 호르몬 분비. 성의 발현은 그 형식이 어떻든 간에 자연이다. 그것은 인간학이 아니라 자연학이다. 말하자면 성의 실현은 이미 예정된 종의 법칙에 따라 운명을 살아낸 흔적이자 결실이다. 성은 종의 미래이자 자연의 영속성을 유지하기 위한 위대한 기획이다. 그런데 이러한 성의 구현방식에 타부 규칙과 같은 윤리가 생성됨에 따라 성-자연은 왜곡되어 인륜적 성이 된다. 예와 염치로 치장하여 성-자연을 문명화된 성으로 치환시킬 때, 성은 문화의 독립적 형식이 된다. 그러나 홍해리의 시말들은 감각의 작용력이 펼쳐내는 문화적 삶으로써의 성이 아니라, 본래적 성-자연을 투명하게 그려내고 있다. 


애 배는 것 부끄러운 일 아닌데

그녀는 왜 꼭꼭 숨기고 있는지

대체 누가 그녀를 범했을까

애비도 모르는 저 이쁜 것들, 주렁주렁,

스스로 익어 벙글어지다니

은밀이란 말이 딱 들어맞는다

오늘밤 슬그머니 문지방 넘어가 보면

어둠이 어둡지 않고 빛나고 있을까

벙어리처녀 애 뱄다고 애 먹이지 말고

울지 않는 새 울리려고 안달 마라

숨어서 하는 짓거리 더욱 달콤하다고

열매 속에선 꽃들이 난리가 아니다

질펀한 소리 고래고래 질러대며

무진무진 애쓰는 혼뜬 사내 하나 있다. 

-「무화과無花果」 전문


  에로스적 사랑은 무치無恥와 염치廉恥 사이에서 펼쳐지는 감각의 작용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사랑은 은일할 수도 있고, 아주 격렬한 유혹의 기표일 수도 있다. 성-자연이든 문명화된 성이든 상관없이, 성은 그 자체로 생-세계를 살아낸 삶의 한 부분이다. 생로병사의 무한순환을 이룩해가는 에로스.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종의 역사를 실현시키는 성. 문제는 성 자체가 발현하는 방식에 발생하지는 않는다. 진짜 문제는 성 행위 속에 수반되는 쾌락과 그 쾌락을 독점하고 싶은 욕망에서 비롯한다. 조르주 바따이유가 『에로티즘』에서 성과 성의 주변에서 벌어지는 그 모든 사태를 ‘죽음까지 파고드는 삶’이라고 명명하지 않았던가. 성은 성행위 당사자에게는 죽음을 전제로 한 일종의 모험적 사태를, 종의 역사를 실현하는 다음 세대에게는 빛이 아닌가. 성은 죽음이면서 삶이고, 삶이면서 죽음인 양가적 실체가 아닌가. 아니 성은 쾌락의 패러독스 위에 기술되는 존재의 마법이 아닌가.

  주이상스적 쾌락의 성공적 실현만이 다음 세대를 배태할 수 있다. 그것은 일종의 특권이다. 그것은 성-자연의 적극적 실현이자, 건강한 주체만이 그것을 성공적으로 실현시킨다. 하여 “애 배는 것 부끄러운 일 아니”다. 그것은 “스스로 익어 벙글어지”는 것이고, 성-자연이 부여한 소명의 실현이다. 물론 홍해리는 무화과의 은밀한 사랑방식을 시말 속에 육화시켜 인간의 성적 사태를 교묘히 이접시키고 있기는 하지만, 시인이 지향하는 에로스는 무화과 꽃대 속에 숨어 핀 꽃과 같은 사랑이다. 은두隱頭 꽃대 속으로 벌을 유혹하여 정받이하는 은일한 사랑을 몽상하고 있다. 어둠을 빛나게 하는 “혼뜬 사내”와 “그녀”의 합일. 눈빛의 교환 혹은 오나니를 주고받는 부드러운 손길. 유혹하고 유혹받기. 사랑은 은일함 속에 불타는 정열적인 합일이다.

  허나 무화과꽃은 죽음 위에 기술되는 사랑학을 실현하고 있다. 비록 시인이 그 사랑의 실체를 “은밀”이라고 말하고 있기는 하지만, 기실 그 은밀이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꿀과 화미로 벌을 유혹하는 죽음의 향기이다. 은두 꽃대 안은 여성의 자궁 안에서 죽는 남성이거나 쾌락과 죽음이 공존하는 공간이다. 시인이 그 사랑의 발현 방식을 “숨어서 하는 짓거리 더욱 달콤하다”고 말하지만, 어찌 그것이 달콤하기만 하겠는가. 꽃대 안에서 혼이 떠 죽은 벌, 두려워 벌벌 떠는 벌의 죽음 제의는 무화과가 오르가슴에 도달하는 사랑방식이다. 은밀하게 유혹하여 정받이 한 자를 죽이기.


언제 바르게 살아 본 적 있었던가

평생 사내에게 빌붙어 살면서도

빌어먹을 년!

그래도 그거 하나는 세어서

밤낮없이

그 짓거리로 세월을 낚다 진이 다 빠져

축 늘어져서도

단내를 풍기며 흔들리고 있네.


마음 빼앗기고 몸도 준 사내에게

너 아니면

못 산다고 목을 옥죄고

바람에 감창甘唱소리 헐떡헐떡 흘리는

초록치마 능소화 저년

갑작스런 발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라, 花들짝,

붉은 혀 빼물고 늘어져 있네.

-「능소화」 전문


  홍해리에게 있어서 꽃은 시인의 아니마적 실체이거나 즉자적 성 모랄이 현현된 실체일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시인은 꽃의 생태학적 존재 양태를 주밀하게 살펴 그것을 사랑학으로 치환시키기 때문이다. 앞서 언급한 「무화과無花果」처럼, 시「능소화」도 동일한 방식으로 시말이 전개되고 있다. 흡반 뿌리로 다른 나무를 타고 오르는 덩굴식물인 능소화를 소실이나 창기쯤으로 여기면서 숙명적 사랑이나 불륜적 사랑의 지점을 응시하고 있다. 분명 시인은 능소화 꽃문양 속에 새겨진 사랑의 기호를 읽어내면서, 그 사랑의 정체를 규명하고 있다. 어쩌면 사랑은 그렇게 살도록 되어져 있는지도 모른다. 하여 사랑은 숙명이다. 사랑은 교환되는 눈빛이나 몸의 감각이 아니라, 이미 운명 지워진 기표의 흐름이다. 사랑은 인연의 사슬이 지정하는 코드대로 풀려 사랑을 사랑하게 되는데, 그것은 사랑의 타자와 온전한 합일을 이룩하지 못한다.

  능소화의 사랑은 슬픈 사랑이다. 그것은 영과 육이 완결적으로 합일된 사랑이 아니다. 불완전한 사랑, 하여 “진이 다 빠”지도록 부둥켜안아 밤낮없이 온몸을 애무하고 성기 결합을 감행하지만, 능소화의 사랑은 항상 무엇인가 결핍된 사랑의 빈지대로 끊임없이 회귀하고 있다. 허무다. 불안하다. 몸도 마음도 다 주었지만, 교태스러운 몸짓과 교성스런 비음으로 유혹도 해보았지만, 능소화는 한번도 사랑-주체가 되지 못한다. 허나 그것은 운명이다. 허나 그것은 그렇게 살도록 결정 지워진 능소화의 사랑방식이다. 비록 “평생 사내에게 빌붙어 살”기는 하지만, 능소화에게 있어서 사랑을 하고 사랑을 꿈꾸는 것은 그가 존재하는 이유이다. “나는 맷중쇠 중심을 잡고/너는 매암쇠 정을 모아다/서름도 아픔까지 곱게 갈”(「연가-지아池娥에게」일부)듯, 영과 육이 상호 혼융되는 사랑을 꿈꾼다. 허나 실패한 사랑. 허나 사랑의 타자를 온전하게 붙들어 매지 못하는 사랑. 사랑의 방정식 속에 기입된 운명의 기호. 


무등無等의 

산록


금빛

화관을 이고


황홀한 

화엄세계를


한 송이로


열고 있는

여자女子. 

-「금란초金蘭草」 전문


  여자란 무엇인가. 여자란 육체적 성징으로 구분되는 하나의 표면적 기표인가, 아니면 저 절대의 지점으로 무한 수렴해갈 수 있는 절대적 기의인가. 여자란 무엇인가. 시인이 여성의 본질적 국면을 안개에 비유하면서 “오리무중, 속수무책, 정부”로 표현하는 동시에 “텅 빈, 눈물뿐인, 주머니가 없는”(「안개를 말하다」일부) 등등으로 의미 규정했을 때, 여자란 시인에게 어떤 의미인가. 아니마인가, 인간학적 사태인가. 물론 여성은 남성의 대극점에 위치하는 하나의 존재론적 실체이다. 그런데 홍해리는 그러한 여성의 본질적 국면을 세속적 사랑의 함수로 다층화시키는 동시에, 여성의 여성성을 고양 승화시켜 절대의 지점으로 이입해 들어가고 있다.

  시 「금란초金蘭草」는 그러한 경우의 적확한 예인데, 시인은 아니마적 실체인 여성을 통해서 화엄의 세계를 투시하게 된다. 대저 화엄이란 무엇인가. 저 화광동진和光同塵이나 성속일여聖俗一如의 경지에 도달하는 순간을 꽃이 매개할 때, 그 꽃의 정체는 무엇인가. 화엄은 노란 꽃망울 속에서 피어나는 열락의 순간인가, 무등無等의 그늘인가. 화엄은 무등이다. 화엄은 너와 나의 등급을 무등으로 되돌려 보내 우리로 만든다. 화엄은 평등이자 우리이다. 화엄은 모든 것을 포용하는 상생의 힘이다. 화엄은 이 세계 전체를 축복의 공간으로 질적 비약시키는 의식의 힘이다. 시인이 꽃을 매개로 화엄의 세계를 여는 순간, 그것도 “금빛/화관을 이고” 화엄의 찬란한 광휘를 응시한 순간, 이 세계는 평등과 평화가 구현된다.

  어쩌면 여성적인 것의 완결적 국면은 모든 것을 포용하는 사랑의 힘인지도 모른다. 비록 홍해리 시인이 자신의 내적 자아인 아니마(혹은 꽃 상징)를 성-자연이나 인륜적 성의 함수로 풀어내기는 했지만, 시인의 궁극적인 사랑학은 분별지를 소멸시키는데 있다. 사랑은 평등이다. 사랑은 한쪽으로 치우친 규범화된 인륜성이 아니라, 범성적인 인간애이다. 시 「금란초金蘭草」는 그러한 사랑의 본질을 화엄으로 고양시키고 있다. 성-자연의 품에 안겨 에로틱한 성적 사태를 거세시켜 무성성asexuality을 실현시킨다. 아니마와 아니무스가 대극 통일된 저 절대적인 자기Self를 실현시키는 그 경지가 시인이 지향하는 화엄의 순간인지도 모른다.  


4. 파르마콘으로써의 글쓰기 : 시, 시인, 시말

  시가 시인에게 운명으로 다가올 때, 혹은 시의 수인에 감금되어 어찌하지 못할 때, 시는 약인 동시에 독이고, 삶인 동시에 죽음이다. 시, 시말, 시인 등의 의미론적 층위에 영혼이 응고될 때, 시 쓰기는 그 자체로 파르마콘이다. 허나 문자와 말의 경계에 위치하는 시말. 랑그이면서 파롤인 시말. 허나 “마음의 독약, 영혼의 티눈, 눈물의 뼈”(「나의 시 또는 나의 시론」 일부)로 작용하는 시혼. 이를테면 시인의 글쓰기는 양가성 위에서 역동하고 있다. 표현된 것과 표현의 심연과의 괴리. 아름답게 순치된 세계와 고통 속을 헤매는 영혼 사이의 갈등. 홍해리가 자신의 시 또는 시론을 파르마콘적 심급 위에서 기술할 때, 그의 시들은 분명은 고통과 아픔에 관한 기록이라는 사실을 직감하게 된다. 그리고 그가 정언적으로 “시 쓰는 것이 무덤 파는 일”(「나의 시는 나의 무덤」일부)이라고 규정했을 때, 홍해리의 시 쓰기는 시 속에 언표된 평정상태와는 달리 불행한 의식에 침윤되어 있다.

  이 이율배반적 사태가 시, 시인, 시말 사이를 관통할 때, 혹은 시말의 외면과 시인의 내면 사이에 불협화음이 일어날 때, 시인에게 시 쓰기란 어떤 의미인가. 물론 “눈물의 뼈” 속을 후벼 파는 고통의 승화지점에서 시말이 용솟음치기는 하겠지만, 우리는 내적 고통과 시적 형상화 사이에서 벌어지는 코드변환 작용을 정확하게 이해할 수 없다. 왜 시말은 “영혼의 티눈” 속에서만 움터오는가. 왜 시말은 “마음의 독약”을 위약으로 코드변환 시킨 후에 아름답게 승화되는가. 도대체 어떤 마음이 시말에 얹힐 때, 시는 시대의 안이면서 바깥으로 작동하는가. 시인의 시적 서정이 내적 상흔의 지점에서 발원하여, 낭만적 자연성의 순수를 시말 속에 육화시킬 때, 이 아이러니적 시적 사태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상처를 승화시킨 기표는 반드시 아름다운 영혼의 울림인가. 도대체 우리는 어떤 시의 심급 위에서 시말을 예인하여야 하는가. 솔직히 말해서 홍해리의 시적 파르마콘은 너무 간극이 커 내면과 외면을 동시적으로 평하기가 어렵다. 다시 말해서 고통 속에 피어난 시혼의 심연을 헤아리면서 시말의 순백한 서정을 싱크로나이즈하게 논평하는 것이 그리 쉽지만은 않다.


  위의 금액을 정히 차용하였으나 지금은 이자는커녕 원금조차도 반제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앞으로도 얼마나 더 차용할 지도 모르지만 이 금액을 죽을 때까지 조금씩 지불하되 만일 약속을 이행하지 못할 경우 어떤 법적 조치도 감수하겠기에 이 각서에 명시합니다.

-「차용증/각서」일부


  시인에게 시 쓰기란 상처 난 영혼의 환부를 치유하는 파르마콘인가, 독으로써 작용하는 파르마콘인가. 약인 동시에 독인 파르마콘. 시의 비등점과 언표점의 의미적 층위가 불일치할 때,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이해하여야 하는가. 혹은 동전의 앞뒷면처럼 독성분과 약성분을 공유하고 있는 파르마콘의 약리작용을 어떻게 순치시킬 수 있는가. 일단 이 물음에 대한 답을 유보해두기로 하자. 왜냐하면 시인 홍해리의 시적 출발점은 파르마콘이 아니라 뮤즈-자연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차용증/각서」는 시의 정전인 뮤즈-자연으로부터 소재는 물론 시적 영감까지도 차용하여 시에 관한 모든 것을 육화시키겠다는 일종의 서원誓願이기 때문이다. 하여 시인은 자신의 시가 근거하는 지점을 정확하게 약정하기에 이른다. “단 나의 시는 풀 물 꽃 흙 나무 하늘 사랑 바다 사람임”이라고 결의에 찬 어조로 단서조항을 부기附記하면서, 시인 홍해리는 시와 시를 둘러싼 모든 것들을 운명적 실체로 승인하고 있다. 시말의 비등점은 자연이다. 시말의 비등점은 말-자연이 소생하는 지점이다. 허나 시인은 뮤즈-자연의 시혼을 빌려 쓴 자이다. 말하자면 홍해리의 시들은 자연-기호를 시말-기호로 치환시켜 말-자연을 적극적으로 실천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시「차용증/각서」는 시인의 시적 출발점이자, 시가 무엇을 지향해야만 하는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시란 마음의 독으로 작용하는 파르마콘을 혹은 마음속에 깊이 새겨진 내적 울혈을 자연의 순결한 시혼으로 치유하는 약리적 파르마콘이다.


시詩의 나라

우이도원牛耳桃源

찔레꽃 속에 사는

그대의 가슴속

해종일

까막딱따구리와 노는

바람과 물소리

새벽마다 꿈이 생생生生한

한 사내가 끝없이 가고 있는

행行과 행行 사이

눈 시린 푸른 매화,

대나무 까맣게 웃고 있는

솔밭 옆 마을

꽃술이 술꽃으로 피는

난정蘭丁의 누옥이 있는

말씀으로 서는 마을

그곳이 홍해리洪海里인가.

-「洪海里는 어디 있는가」 전문


  큰 바다를 시의 마을로 삼는 시인. 시의 바다에 영혼을 기투하는 시인. 말과 말 사이에서 말의 위의를 예인하는 시인. 洪海里는 기표다. 그것은 결코 기의일 수 없다. 그것은 말과 말이 역동하는 순수한 시말의 비등점이다. 그것은 시말의 소생점인 바, 행과 행 사이를 마구 요동쳐 “詩의 나라”를 꿈꾸는 시인의 가슴이다. 洪海里는 시혼이 주소하는 공간이다. 洪海里는 까막딱따구리가 바람과 물소리가 한데 어울려 저물녘 시적 몽상이 일어나는 공간이다. 洪海里는 마음이다. 洪海里는 어디에나 있기도 하고 이 세계 속에 없기도 하다. 하여 洪海里는 공간이면서 공간이 아니다. 洪海里는 유이면서 무이고 무이면서 유이다. 洪海里는 U-topia(이 세상에 없는 곳)이면서 Utopia이다. 洪海里는 존재와 비존재의 경계인 바, 그것은 의미도 아니고, 의미가 아닌 것도 아니다. “꽃술이 술꽃으로 피는” 마을, 그 마을이 바로 洪海里다. 따라서洪海里는 시의 변곡점이다. 시와 시의 위의를 사유하면서 시인 홍해리는 기표 洪海里에 의미의 옷을 찬란하게 입히고 있다. 

  단언컨대, 洪海里는 모든 기의를 수용하는 원문자이거나 메타기호인데, 시인의 시말은 “말씀으로 서는 마을” 어디쯤을 배회하면서 시, 시말, 시인의 존재론적 양태를 키질하고 있다. 시 「洪海里는 어디 있는가」는 시적 발상 면에서 보나, 시에 대한 태도 면에서 보나 아주 탁월한 작품인데, 시인은 시의 원문자와 같은 메타 기호 洪海里를 통해서 자신의 시적 정체성을 탐색하는 것은 물론 시인이 어디에 위치해야 하는가를 숙고하고 있다. 세계와 세계 사이에, 행과 행 사이에, 그리고 세계와 행 사이를 아주 예민한 시선으로 들여다보면서 시인 홍해리는 시의 고향인 洪海里(넓고 큰 시의 마을)를 찾아가고 있다. 하여 洪海里에는 무릉도원이 있고, 시인이 있고, 시말이 있고, 시가 있다. 洪海里는 홍해리다. 洪海里는 시인의 길찾기다. 洪海里는 순정한 시혼이 깃들여 있고, 시인 찾고자하는 미완의 꿈이 있다. 시가 있는 그 모든 곳이 바로 홍해리가 찾는 洪海里의 실체이다.


소한小寒날 시수헌詩壽軒에 모인 소인騷人들

술판이 거나해지자

어초漁樵 처사 시수헌이 아니라 시주헌詩酒軒이군 하니

임보林步 사백 시술헌으로 하자 하네

서우瑞雨 사백 '수壽' 밑에 ㄹ(乙)자를 그려 넣었다

오, 우리들의 시수헌이여

'수'자에 획 하나 더해 '주'가 되든

받침 하나 붙여 '술'이 되든

시 속에 술이 있고

술 속에 시가 있어

시쟁이들의 시수헌은 따뜻하고

술꾼들의 시수헌은 눈부시다

오오,

시수헌의 달빛은 오늘밤도 푸르고 차다.

-「시수헌의 달빛」 전문


  홍해리가 지향하는 시말의 비등점은 소인에 응고되어 있다. 이를테면 소인騷人은 시에 들뜬 자이자 시의 위의를 근심하는 자인데, 소인은 이 세계와 절연한 채, 시말 속에 자신의 존재론적 운명을 기투하는 자들이다. 「시수헌의 달빛」은 아름답고 숭고하고 시적 재치가 넘쳐나는 시인데, 시인은 “푸르고 차”가운 시의 정신성을 시말로 예인 중이다. 비록 파자놀이를 통해서 시말놀이를 전개하고 있지만, 시수헌을 시주헌이나 시술헌으로 만들어 가면서 취흥을 돋우고 있다. 달과 술의 몽상. 혹은 시와 술의 변증적 사유. 또는 인간애가 넘쳐나는 시의 공간. 시란 무엇인가. 시인이 시수헌의 달빛을 바라보면서 취흥에 빠져들어 따스한 마음을 몽상하지만, 도대체 인간에게 시란 무엇이며 어떤 의미인가. 시를 위한 시인가, 아니면 인간을 위한 시가 시의 본질인가.

  「시수헌의 달빛」은 시의 약리작용을 사유하면서 시의 파르마콘을 부드럽게 감싸 안고 있다. 시의 파르마콘은 술이다. 시의 파르마콘은 푸르고 찬 정신이다. 시의 파르마콘은 따스하지만 눈부신 광휘이다. 시의 파르마콘은 술판이다. 소인들이 시의 제전을 향유하는 그 말, 그 언어, 그 시말이 바로 시적 파르마콘의 실체이다. 하여 시의 파르마콘은 세계-자연을 시말로 육화시켜 삶-세계를 살만한 공간으로 만들어 버린다. 시수헌에는 시가 있고, 술이 있고, 세상 시름 잊고 시말을 사유하는 아름다운 시인이 있다. 달빛과 가슴시린 인간애가 시수헌의 밤을 밝히고 있다.


5. 글을 나오며-시인을 위하여


  대저 시인이란 어떠해야 하는가. 무릇 시인이란 어떤 부류의 인간형인가. 시인이 시인을 사유할 때, 시인이란 기표는 무엇을 지시 표상하는가. 도대체 어떤 시의 삶을 살아야만 진정한 시인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시인은 아이다. 시인은 시대의 바깥이다. 시인은 무소유다. 시인은 그저 시 속에 파묻혀 시만 생각하는 자이다.

  뮤즈-자연에 저당 잡힌 채, 차용증과 각서를 쓰는 시인. 자연과 자연이 펼쳐놓은 문양을 아름답게 승화시키는 시인. 그 시인이 홍해리가 아닌가. 영혼이 맑고 투명한 시인. 자연을 시말로 치환시키는 시인. 그 시인이 바로 홍해리가 아닌가. 시와 시적 삶을 위해 온 마음을 바친 시인. 세월과 삶 전체를 시 속에 녹여낸 시인. 바로 그 시인이 홍해리가 아닌가. 시와 시인과 시말을 위해서 한 평생을 바친 홍해리라는 시인. 洪海里라는 원문자와 메타기호를 찾아 한평생을 허비한 시인. 그가 바로 홍해리가 아닌가.


시도 때도 없어,

세월이 다 제 것인 사람


집도 절도 없어,

세상이 다 제 것인 사람


한도 끝도 없이,

하늘과 땅 사이 헤매는 사람


죽도 밥도 없이,

생도 사도 없이 꿈꾸는 사람.

-「시인」 전문

 

(시선집『비타민 詩』2008, 우리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