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박
洪 海 里
한 자리에 앉아 폭삭 늙었다
한때는 푸른 기운으로 이리저리 손 흔들며 죽죽 벋어나갔지
얼마나 헤맸던가
방방한 엉덩이 숨겨놓고
활개를 쳤지
때로는 오르지 못할 나무에 매달려
버둥거리기도 했지
사람이 눈멀고 반하는 것도 한때
꽃피던 시절 꺽정이 같은 떠돌이 사내 만나
천둥치고 벼락치는 날갯짓 소리에 그만 혼이 나갔겠다
치맛자락 뒤집어쓰고 벌벌 떨었지
숱한 자식들 품고 살다 보니
한평생이 별것 아니더라고
구르는 돌멩이처럼 떠돌던 빈털털이 돌이 아범 돌아와
하늘만 쳐다보며 한숨을 뱉고 있다
곱게 늙은 할머니 한 분 돌담 위에 앉아 계시다.
(『황금감옥』2008)
[오늘의 날씨/ 2010년 10월 1일]
담장에 가부좌 튼 늙은 호박
새물내 물씬 나는 쪽빛 하늘.
장대 끄트머리에 앉아 이리저리 눈알 굴리는 고추잠자리.
성큼 눈앞에 다가온 먼 산.
산자락에 노랗게 핀 감국.
말랑말랑 살갗 간질이는 고슬고슬 햇살.
담장에 가부좌 틀고 있는 늙은 호박.
양철지붕 위 빨간 고추.
논두렁밭두렁 마른 풀 냄새.
발밑에 차르르 부서지는 이슬방울들.
“찌르르∼ 찌르르∼” 길섶 풀벌레 소리.
“딸랑딸랑” 외양간 암소 워낭 소리.
김화성 기자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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