洪海里 詩 다시 읽기

<시> 씹다

洪 海 里 2009. 5. 1. 05:03

씹다

洪 海 里


씹을 것이 얼마나 많았던가
세상이 얼마나 질기고 단단했던지
이빨이 다 닳아 시리고 아프다
뭐든 손에서 입으로 직행하는 아이처럼
나도 씹고 싶은 것이 많았다
싶다 싶다 하면서 씹고 싶어
오징어 땅콩처럼 세상을 씹기도 하고
물 같은 세월을 씹기도 했다
입을 씹고 칼을 씹고 돈을 씹었다
이제 치과 의자에 누워
이빨로 세상을 본다
어금니 하나 뽑아내고
양쪽 이를 걸어 다리를 놓아
이승의 한겨울을 건너고 있다
부드러운 애첩같은 혀는
평생을 같이 해도 닳지 않는데
이빨은 단단해서 목숨이 단단短短하다
내가 너무 허술해서 허수했던가
씹는 일에만 급급했지
씹히는 아픔은 생각도 못했지
씹지 못하면 죽은 목숨이지만
씹을 것이 없으면 죽을 목숨
씹는 재미마저 없으면 무슨 재미로 사나
동안이 뜬 나무를 바라보며
나무는 줄곧 서서 무엇으로 씹는가
곰곰 생각해 보니
나무의 이빨은 투명하고 부드러운 혀 같은 뿌리다.

 

 

* 나이 들면서 이빨이 자꾸 고장이 나는 걸 어쩔 수 없다.
참다 참다 어금니 하나를 뽑았다.
세상에 가기 싫은 곳 가운데 하나가 치과가 아닌가.
의자에 누워 창 밖의 나무를 물끄러미 바라다보며 생각하니
나무가 진정 성자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무는 왜 성자인가?

나무는 다른 것들을 씹지 않기 때문일까?


이빨을 뽑지 말고 살살 달래가면서 살아야 한다고 한다.
그러나 치과에 가면 우선 뽑자고 한다.

그러니 어쩌겠는가?
뽑고 나면 시원하니!
며칠 몇 달을 지내며 치과 문턱을 들락이다 보면 지치기 마련.
에라, 만수야!


(한평생 산다는 게 부실한 몸을 이끌고 허위허위 몇 고개를 넘는 일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치과엔 다니지 말고 사십시오. 이빨 가는 소리가 정말 징그럽습니다.)

-『시와 사람』(2008, 여름호. 제4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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