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평론·시감상

<시와 산문> 洪海里 / 강용환

洪 海 里 2009. 6. 10. 06:56

 

 

홍해리洪海里

 

 강 용 환

 

 

홍안백발紅顔白髮

이 마음 휘감더니

서경철학敍景哲學으로

심심희열 주시더라

 

해산되는 씨앗들은

풍자미학 담아놓고

산천초목 옷을 벗겨

방방한 엉덩이 공수하니

 

리얼리티 감성은

김삿갓도 무릎치고

물의 뼈

헐레벌떡 풀어보면

붉어진 화두 뒤로선 눈빛

등골시린 조화로

벼락치고 있다

소소명명!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만남

 

2년 전인가 불볕더위가 한창인 여름이었다.

막걸리 잔을 기울이며 초등학교 대선배이자 시조시인이신 춘헌春軒 채윤병 선생에게 가르침을 받고자 시를 흉내낸 나의 글을 보여드렸다.

나의 부족함에 선생은 "시인의 언행은 욕도 시가 된다네!" 라며 느긋한 웃음을 지었다.

당시에는 그저 내 부족한 표현에 핀잔이려니 생각했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니 많은 가르침을 주는 충고였다.

 시인이라 하여 어찌, 가벼이 하는 욕이 시가 될 수 있겠는가.

먹을 고루 갈아 먹의 빛깔을 몇 번씩 확인하는 붓처럼, 행동과 말에 심오함이 있어야 시라 할 수 있을 것이다.

 

2008년 1월 31일, 우리시진흥회 낭송회 뒤풀이로 노래방에서 목청을 가다듬던 시장통 여백이었다.

평소 나의 글에 많은 관심을 주고 힘이 되어주신 한인철 시인님은 수염이 멋스럽고 눈매가 호수같이 깊은 어르신의 옆자리에 자리를 만들어 주며 나를 소개하였다.

 

-시인님! 이 사람의 닉네임은 한고비인데 글 솜씨가 좋습니다.

-호오, 그렇게 대단하신가? 인연해 주어 고맙소!

-아닙니다. (한 시인님에게 눈을 흘기며) 한 시인님은 어르신이 저에게 많은 관심을 가져주십사 저를 추켜세우는 것입니다. 아직 글은 보잘 것 없습니다.

 

어르신은 나의 말을 묵묵히 들으며 지긋한 웃음으로 화답했다.

 

- 저는 진주강가에 용자 환자 씁니다.

- 나 홍 해리네! 자주 들르시게.

 

인사가 끝나고 시인님의 낭랑한 화두가 공중전으로 내 귓전을 울렸다.

 

-여기모인 사람 모두 바보들이네!

 

모두가 흥에 겨워 춤과 노랫가락이 정신없이 돌아간다. 분위기가 시끄러운 탓인지, 들어도 못 들은 것인지, 모두 어르신의 말씀에 관심이 없었다.

 

-여기 모인 사람들 모두 바보들이야!

시인님의 목청이 또다시 축우법(공중전)으로 내 귓전을 울렸지만 모두가 북새통에만 관심이 있었다.

나는 어르신의 말씀이기에 묵과하기도 분위기가 아닌 듯하여 무슨 답변을 드려야 할까 망설이다, 마시던 보리주 안주 삼아 육박전으로 시인님과 동지했다.

 

-맞습니다. 모두가 바보들입니다.

 

내게는 연륜이 지긋하신 시인님과 동지 하니 이 얼마나 큰 영광인가. 내가 내 자신을 다시 보아도 대답이 씩씩하여 대견스럽기까지 했다.

그러나 시인님의 묘한 눈웃음이 내 눈썹을 지그시 찍어 눌렀다.

이크! 뭔가 대답이 잘못되었다. 나는 노장의 계략에 걸려 들은 것이 분명했다. 대답의 잘못을 깨닫는 순간 나는, 먼 곳을 향해 눈을 두고 변명할 수밖에 없었다.

 

- 어르신! 그래서 저도 바보가 되고 싶어 이렇게 왔습니다.

 

어르신의 묵직한 호수가 내 눈을 지그시 찍어 누르니 나는 호수의 무게를 털어버리려 바보가 되고 싶다는 답변으로 재빨리 위기를 모면한 것이다.

오늘의 동지가 내일의 적이 된다 했던가. 시인님을 따라간 동지의 발자국이 초전에 박살났다.

진실이 깊숙이 배어 있는 호수의 위엄 뒤에 승패의 계략이 숨어 있었다니 섣불리 맞불놓을 상대가 아니었다.

어르신과 동지하자 겨리한 내 욕심이, 금세 바보라 손가락질하던 시인님들을 나의 스승으로 찍어 누른 것이다.

 

이 무슨 날벼락이란 말인가. 어르신과 첫 만남에 완패라니, 승부의 세계인 나의 오지랖은 분통이 터질 일이었다.

하지만, 패배를 인정할 건 인정해야 한다. 승부의 세계에 굴복을 인정 못하면 비난만 무성하게 쏟아지니 말이다.

그러나 승부의 세계에 단판 승부가 어디 있는가. 3판 양승을 얻어야 진정 능력을 인정받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왕지사 떨어진 화두, 어르신에게 완패했으니 나도 질세라 비수를 던질 요량이었다.

 

-어르신! 손을 만져보아도 되겠습니까?

-아 그럼! 만져 보시게!

-어르신! 손이 차갑습니다.

-흐~음 내 손이 조금 차갑네! 자네 손은 따듯하구먼!

-손이 찬 것은 생각이 많으셔서 그렇습니다. 어르신!

 

나의 진지한 언급에 홍해리 시인님은 처음 들어본다는 표정으로 금세 묘한 호기심을 보였다.

 

-아! 그런가? 하하하!

 

일단, 어르신의 마음에 동요를 불러 호기심을 유발하는데 일 단계는 성공이었다.

 

-저 어르신! 어안(어르신의 얼굴)을 자세히 보아도 되겠습니까?

-아~ 이 사람아! 못생긴 얼굴은 보아서 무엇 하나!

 

나는 조심스럽게 어르신의 어안을 살펴보았다. 악의가 전혀 없는 모습, 눈썹의 밀림 속으로 깊숙한 호수의 창은 편파가 없는 차가움이 있었다.

아니 그것은 뜨거움이 견디다 못해 차갑게 서리 내린 진실의 호수였다.

 

이런 눈을 가진 분도 계셨구나! 마음껏 어리광 부려도, 마음껏 투정을 부려도, 사람의 본심을 꿰뚫어 보는 차가운 눈, 지위나 위세의 겉치레에 명함을 넘어 바라볼 수 있는 안목, 내가 갈망하고 가까이하고픈 그런 눈이었다.

그 위엄이 만만치 않았다. 하지만 싸움은 싸움이다. 진실 앞에 무엇으로 견주어 이길 수 있을까마는,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저 어르신! 우리시진흥회 카페에 댓글을 보면 함자가 홍해리라고 되어 있는데 그분이 시인님의 댓글인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만 참으로 댓글이 심오하였습니다.

 

어~허라! 이 크크! 갈피 없는 통제라. 굵어진 홍해리 어르신의 목청이 또 칼날을 세우고 공중전이다.

 

"실수구나 실수야! 실수했구나."

 

시인님의 호방함에 볼때기가 성하니 오늘은 내 길운인가.

어느 놈이 감히 어르신의 함자를 빌려 쓴다고 이런 막말을 화두로 던진단 말인가.

손 기온은 차갑건만 가슴은 어찌 저리 따스하신지, 어르신의 웃음을 띤 칼날이 그저 황송할 따름이었다.

 

문득 춘천에서 비렁뱅이 삶으로 도를 깨우치던 이외수 선생이 생각났다.

이외수 선생과 내가 춘천에서 만났던 추억을 생각하며, 나도 삶에 도나 깨우칠 요량으로 모니터 속을 들락거리며 많은 네티즌과 맞장뜨기도 했다.

하지만, 실전은 이외수 선생과의 맞장 이후로 어르신이 처음이었다. 물론, 첫 번째 이외수 선생과의 결전 역시 나의 완패였다.

이외수 선생은 기인이다. 아니 나에게는 기와 지를 합한 도의 스승이다.

이외수 선생은 나와 첫 번째(약 20년 전 21세 때) 만남도 벗으로 만남을 해 주셨고, 두 번째(43세 때) 만남도 벗으로 만나 주셨다. 아니 오래된 죽마고우처럼 나를 대면해 주었다.

항상 나의 눈높이로 공수하니, 선생 앞에서 나는 백전 백패일 수밖에 없는 벗과 스승을 겸비한 형님이시다.

 

어찌 되었건 홍해리 어르신과 첫 실전에서 볼때기가 성하니 내겐 엄청난 성과다.

만약, 이외수 선생이 어르신 앞에서 나와 같은 실수를 했다면 볼때기를 피하는 성과는 불가능할 것이다. 누군가 말했다. 미인은 용서가 되어도 못생긴 건 용서가 안 된다 했으니 말이다.

무슨 이야기냐고요?

인간은 멋스럽고 아름다움에 감전되는 우주순리의 감성을 가졌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웃자고 하는 언급이지만 삶의 이치가 사실 그렇다.

 

이외수 선생의 외모와 나의 외모와 비교한다는 자체가 내겐 썩소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가수 이남이 씨는 어떠냐고요?

이남이 형님의 턱을 자세히 보아야 한다. 이남이 형님은 썩소가 아니라 택(턱)도 없다. 그래서 수염을 길러 턱이 없음을 살짝 가리지 않는가 싶다. ^^

사실, 이외수 선생과 이남이 형님은 나에게 특별한 분들이다. 두 형님 때문에 내가 이렇게 글을 쓰는 행운을 얻은 것이니 말이다.

두 형님과의 인연을 언급하기는 너무 긴 사연이기에 이쯤에서 일축하기로 하고 어르신과의 인연을 계속하기로 하자.

 

가끔 동성끼리는 자기보다 잘생기면 열등감이 생겨 한 대 쥐어박을 거 두 대 쥐어박을 경우도 있지만, 어찌 홍해리 시인님의 선함과 덕이, 옹졸한 굴레 안에 있으랴.

가만히 어르신의 모습을 살펴보니 넉넉함이 수염과 더불어 그 위엄을 더하고 있었다.

하여 어르신 수염이 정말 잘 어울리십니다. 라며 가식 없는 말씀드렸더니 어르신은 쑥스러움을 너털웃음으로 비켜서며 내 어깨를 쓸어안고 벗하여 주셨다.

 

이때 한인철 시인님이 등단문학의 문제점을 언급하기에 나는, 때는 이때다 싶어 현실의 부족한 문학을 조롱했다.

 

-아니, 문학이 별건가요? 요즘 문학이라는 것을 보면 찌질이 궁상이나 떨고 아부와 패거리 싸움을 일삼는 조폭이지요. 학력과 출신성분의 부패된 축제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어르신!

 

나의 이런 언급에 당돌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이번엔 직사포인 축지법으로 공략했다.

 

-실수구나! 실수했어! 너 실수했구나!

 

시인님의 질책에 나는 또다시 먼 곳을 보며 못 들은 척 묵과했다.

나의 묵과에 시인님은 또다시 직사포를 쏘아댔다.

 

-실수야! 실수야! 너 실수야!

 

어르신의 큰 목소리에 몇 분의 시인님들이 거들었다.

 

-회장님! 누가 실수했다는 말씀인지요?

 

그러자 어르신은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키며 마치 내 편이 되어달라는 천진난만한 모습이다.

 

-재가 실수했어! 재가! 뭐라든가? 문학이 찌질이 궁상이고 부패된 축제라며 조롱하잖아!

 

그러자 시인님들은 나에게 쌩한 표정으로 한번 힐끔 쳐다보고는 아무 반응 없이 슬금슬금 비켜났다.

웬일일까?

어르신이나 시인님들 모두 천진난만한 동심의 모습들이다.

모두 바보들이라 놀림한 것에 왕따를 주는 것일까?

어르신의 투정과 고자질하는 모습, 놀림당한 것에 차라리 잘 되었다는 표정, 시인님들의 카멜레온 같은 변화는 참으로 티 없고 해맑은 모습들이었다.

문득 돌아보니 초중학생 때 여학생들이 나에게 대했던 모습이었다. 시인님들의 동심 같은 모습에 하마터면 폭소가 터질 뻔했다.

 

웃음을 꾹 꾹 눌러 참으며 나의 계속된 딴청에 어르신은, 다음을 기약한 듯 축수법으로 비켜섰다.

그러나 어르신의 해량이 있어 지나쳤지만, 사실은 큰일이었다. 후로 나는, 문학을 조롱한 대가로 축수법을 헤쳐나가는 문학에 대해 많은 해학을 풀어놓아야 했으니…….

 

얼마 전 솔뫼 김성로 화백님의 작품전시회를 찾은 적이 있었다. 작품을 감상하던 중 외로움의 작품에 나의 의문을 던졌다.

 

-화백님! 이 외로움의 작품에 어찌 외로운 감상이 하나도 보이지 않습니까?

 

나의 질문에 화백님은 얼굴이 발그레해서 화답했다.

 

-새가 거꾸로 떨어지고 있잖아요!

 

철없던 시절 그대로의 모습을 갖춘 화답이었다.

아뿔사! 나는 순간 당황스러워 얼굴이 화끈거렸다. 내가 어릴 때 그림을 그렸던 상상을 잊었던 것이다.

표현이 부족하고 감성이 부족해서 곁다리로 자기 심성을 그려 넣던 철없던 그림의 세계를 잊은 것이다.

진정 솔뫼 선생은 현실의 자신을 비우고 동심의 세계에 온 영혼을 끌어 들여 자신의 작품에 동심의 세계를 완성했던 것이다.

 

당시에는 나의 부족한 감상이 얼굴을 화끈거리게 했지만, 이제는 화백님에게 던졌던 내 솔직한 의문이 자랑스럽다.

또한 화백님의 솔직한 화답은 마치 나와 함께 동심에 벗이 되기를 기다리는 듯 정감이 넘쳐흘러 붉었다.

동심에 젖어 오지 않을 그때 그 시절이지만, 돌아오기를 간절히 기다리는 외로움은 진정 명작품이었다.

그래서 솔뫼 김성로 화백의 외로움의 작품에서 나는, 즐거운 추억만 느꼈지 외로움에 슬픔을 느끼지 못한 듯싶다.

 

아부만 좋아하고 패거리로 개인의 의지를 가식으로 끌어들이는 세상, 내가 나인지 남인지 모르며 사는 삶이 얼마나 부지기수인가.

요즘 팽배해진 가식이 남녀노소 따로 있는가. 쓴소리에 내가 추구하는 시향의 정체성이니 시는 시로 읽어야 한다느니 온갖 자기 두둔으로 화를 내고 바락바락 대든다.

잘나고 흠이 없는 글에 어찌 쓴소리가 있겠는가. 내 잘못된 글에 반사경은 보지 못하니, 내 자아의 중독에 빠져 진정 자신에게 도움을 주려는 벗의 진실을 외면하며 찌질이 궁상으로 보이는 것이 문학이라며 떠드는 것이다.

 

사탕발림은 그저 내 입맛에 지나지 않은 동지다. 혹은 못마땅하지만, 순리나 합리를 벗어나도 다수결에 따라 함께 가는 것이 동지인 것이다. 문인에게 동지는 나를 잃고 진정한 벗을 죽이는 독이 될 수 있다.

하여 벗은, 잘못된 것을 고치지 않으면 나는 그들에 벗이 될 수 없다.

벗과 동지는 분명히 다른 것이다.

벗은 동지의 독기를 언제든 충고하고, 슬픔과 기쁨을 나눌 수 있기에 벗이라 할 수 있지 않은가.

이런 벗의 충고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벗을 잃는 외로운 독신주의의 문인이 될 것이리라.

 

문학에 독신주의는 말 그대로의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이다. 결론을 말한다면 벗에 의하여 세탁하지 않은 글은 수많은 독자의 영혼을 짓밟을 수도, 자신이 짓밟힐 수도 있다는 말이다.

문인에게 생사를 같이할 조폭의 동지가 필요 있겠는가. 그저 올바른 정체성 찾아 함께 어울려 너털웃음 할 진솔한 벗이 필요할 것이다.

아무쪼록 우리시진흥회 카페에서 만큼은 가식에서 벗어나 중용을 걷는 어르신들의 위엄이 가득하길 바랄 뿐이다.

 

즐겁고 뜻 깊은 만남이 물러날 즈음, 나는 어르신 앞에 공손히 인사드렸다.

어르신은 웃음을 가득 베어 물고 내 손을 꼭 잡고는 “또 보세!”라며 내 어께를 감싸 주었다.

***

어르신! 그리고 시인님들! 문학을 조롱한 저의 실수를 인정합니다.

진정 문학이 별거 아닌 것이 아니었습니다.

부족한 이 놈, 문학의 어려움과 광대한 세상을 통감하고 있으니 앞으로 문학을 조롱하는 언행을 삼가할 것을 약속드립니다.

문학의 길, 매화향기 듬뿍한 물주름 널리널리 펼쳐 주시어, 저도 바보들 속에 합류할 수 있도록 늘 벗하여 주십시오.

바보의 큰 시어로, 한 뼘도 안 되는 저의 가슴에 무진장한 대궐을 지어주신 홍해리 시인님과 여러 시인님들에게 머리 숙여 감사드립니다.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글/ 강용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