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평론·시감상

<평론> 시말의 위의 혹은 서정의 본질 -「홍해리洪海里는 어디 있는가」

洪 海 里 2009. 6. 5. 16:27

 

시말의 위의 혹은 서정의 본질

-「홍해리洪海里는 어디 있는가」

 

김 석 준

 

     시말이 간과해서는 안 되는 중요한 사실이 하나 있다. 그것은 시적

담론이 작동하는 의미의 바깥이 아니라, 시적 담론이 발생하는 가능조

건에 대한 의미론적 접근이다. 이를테면 그것은 시말의 시말성이 현현

되는 방식이자, 시말이 시말로 존재하는 근거이다. 더 나아가 그것은

역사 이전이거나 역사를 구성하는 선험적 원리이기도 하다. 爲己와 爲

人 사이에서 욕망하는 의식을 순치시키는 시말. 시말은 서정의 문법을

종횡으로 교차하면서 시말 전체의 위의를 문자의 배후에 심어놓는데,

그것은 抒精의 묘법을 풀어헤쳐 인간학을 정위시키는데 있다. 따라서

서정은 抒情, 緖正, 그리고 庶政으로 무한 변주되어 삶-시간-세계의

의미구조를 이 세상에 흩뿌린다. 말하자면 시말은 다양하게 흩뿌려진

서정 속에 기입된 흔적인데, 그것은 문자의 고양이자, 문자의 인간학

으로의 치환작용이다.

    비루한 욕망과 천박한 속물주의가 판을 치는 세상. 다양한 문자의

문양을 매개하여 그 욕망, 그 세계를 위무하고 치유하는 시말. 시말은

그 자체로 주체다. 시인에게 시말은 삶-시간-세계의 궁극적 주체이자,

물화된 객체에 영혼의 기호를 각인시켜 존재의 원상으로 회귀시키는

최종심급이다. 허나 여기에는 하나의 단서조항을 필요로 하는데,

그것은 시말이 서정의 심급 아래 작동하여야만 한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서 서정의 심급 위에 작동하는 시말은 나와 너를 포월하여 우리로

고양되는 경지로 나아가야한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하여 문

제의 중심은 서정적 同感의 순간을 시말화하는 인간학적 태도에 놓여

있다. 상호 대립하는 나와 너를 '우리'라는 의식으로 안아 넘기. 이것이

바로 서정적 同感의 순간이자, 시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가장 큰 이유

이다. 하여 시란 시말 속에 기입된 인간학인데, 그것을 미와 추 사이에

서 역동하는 말-한계의 바깥이다. 아니 애초부터 시란 말할 수 없는

그 무엇인가에 다가가 그것을 말로 언표하되, 그 말품의 한계를 훨씬

벗어나는 곳에 위치하게 된다. 따라서 시말의 위의는 말의 안쪽에서

발산하는 기표작용을 절대성으로 지표화하는 그 지점에 있다. 말-한

계를 의미의 한계 너머로 주파해가는 바로 그곳에 시말의 위의가 찬연

히 빛나고 있다.

    '말할 수 없는 것을 말을 하시오. 그리고 그 말을 인간학으로 치환시

키오.' 내가 누구인지 모르지만, 내가 왜 이 시간, 이 공간 속에 존재하

는지 그 이유조차 전혀 알 길이 없지만, 시말과 함께 시말 속에 영혼의

기표를 각인시킨 시인의 운명이 아름답지 아니한가. 하여 시말은 운명

이다. 시말은 운명과 마주선 자의 삶-시간-세계, 즉 의미의 기호이다.

의미의 바깥으로 무한 수렴하다가 의미의 의미를 알아챈 순간의 저 극

렬한 주이상스의 지대가 시말의 위치이자 시적 위의가 드러나는 순간

이다.

 

 

          의 나라

          우이도원牛耳挑源

          찔레꽃 속에 사는

          그대의 가슴속

          해종일

          까막딱따구리와 노는

          바람과 물소리

          새벽마다 꿈이 생생生生

          한 사내가 끝없이 가고 있는

          행과 행사이

          눈 시린 푸른 매화,

          대나무 까맣게 웃고 있는

          솔밭 옆 마을

          꽃술이 술꽃으로 피는

          난정蘭丁의 누옥이 있는

          말씀으로 서는 마을

          그것이 홍해리洪海里인가.

 

          ㅡ홍해리, 「홍해리洪海里는 어디 있는가」전문

 

    내가 나를 의식할 때, 나는 나의 존재론적 근거를 어디에 두고 있는

가. 나는 무엇이고 나는 왜 존재하는가. 아니 나는 나를 통해서 나의 정

체를 알 수 있는가. 문제는 나와 나의 의식이다. 만약에 내가 나를 모르

거나 의식하지 않을 때, 그것은 가장 행복한 의식의 상태이다. 왜냐하

면 자기의식은 불행한 의식의 원천이기 때문이다. 허나 모든 인간학적

사태는 나에서 출발해서 나로 종결한다. 왜냐하면 모든 의식은 나로부

터 시작하기 때문이다. 코기토적인 나(혹은 존재론적인 나)와 그러한

나를 의식하는나(혹은 인식론적인 나) 사이에 가로놓인 심연. 그것은

결코 해결될 수 없는 인간학적 모순이자, 인간의 선험적 토대이다. 말

하자면 스스로의 존재론적 근거를 사유하는 자기의식은 인간학(역사,

철학, 문학)이 발현되는 최초의 계기인 동시에 그것으로 인해 행복한

시대를 마감하게 만드는 불행한 의식이다. 나의 나됨을 의식하는 존재

론적 전환으로 인해 인간의 역사가 비로소 시작되었지만, 그것은 역으

로 피 터지는 헤게모니 전쟁이라는 역효과를 낳게 된다. 하여 자기의

식은 저 해결할 수 없는 극렬한 모순이다.

     물론 홍해리의 시「홍해리洪海里는 어디 있는가」가 자기의식의

모순적 지평을 시말화했다는 말은 아니다. 허나 적어도 홍해리의 이

시를 주목해야하는 이유는 나의 나됨, 즉 爲己에 관한 탐색을 하고 있

다는 점이다. 시인은 비결정 상태로 존재하는 나와 나의 주변을 조목

조목 소묘하면서 시인의 위의를 순결하게 그려내고 있다. 허나 다시

묻게 된다. 나는 무엇이며, 무엇으로 존재하는가. 아름다운 시말 사이

에 존재하는가, 아니면 고즈넉한 저 자연의 풍경 속에 존재하는가. 그

러나 역시 문제는 다시 나로 되돌아간다는 사실에 있다. 물론 시인은

"시의 나라"에 존재하면서 자신에게 속한 것들을 아름답고 평화롭게

유미화하기는 하지만, 그것 역시 '나'라는 심급에 다시 걸려 넘어진다.

    주체이면서 객체이기도 한 나. 그러한 나의 존재론적 양태를 추적하

는시인, 시인 홍해리는 공간 홍해리이기도 하고, 시말 공간, 즉 행과

행 사이에 위치하는 홍해리이기도 하다. 자연인 홍해리는 다양한 방식

으로 표상될 수 있다. 그것은 역으로 자연인 홍해리가 홍해리(내적 외

적 실체)의 정체를 정확하게 언표할 수 없다는 말과 같다. 하여 홍해리

는 무한히 미끄러진다. 홍해리는 기표다. 왜냐하면 시인은 "그것이 홍

해리洪海里인가."라고 반문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지 포착된 순간 미

끄러지는 홍해리. 홍해리는 시도 되고, 마을도 되고, 말씀의 공간이 되

기도 하지만, 역으로 홍해리는 시도 아니고, 마을도 아니고, 말씀의 공

간도 아니라는 역설을 성립시킨다. 다시 말해서 자연인 홍해리는 불확

정한 양자현상과 같다. 어쩌면 홍해리 시인이 말한 "ㅡ인가"와 같은 의

문적 태도가 나의 나됨을 정의하는 정확한 인식인지도 모른다.

    도대체 "홍해리는 어디 있는가." 우리는 기표 홍해리의 정체를 정확

하게 모를 뿐만 아니라, 홍해리가 어디에 위치해 있는지 또한 모른다.

다만 시인이 자기를 찾아 떠나는 여정 위에 서 있다는 것만 알 수 있다.

온전한 자기찾기, 爲人이 아닌 爲己를 정관하기. 이것이 바로 「홍해리

洪海里는 어디 있는가」의 매력 포인트이자, 시말이 근본적으로 작동

하는 방식을 메타적으로 사유하게 만드는 까닭이다. 다시 말해서 단순

한 유희적 산물로서의 시말이 아니라, 자기를 얹혀 삶-시간-세계를

승화시킨 시말을 인간학의 자장 내부로 이입시키고 있다. 시인에게 시

말은 나를 찾아 떠나는 시간의 단면도 위에 기입된 인간학의 초상이

다. 허나 나는 나를 찾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찾지 않을 수도 없다. 나

는 언제난 미궁인 "ㅡ인가"이다. 나는 나의 정체를 꼬리표로만 말한다.

 

                  --- 중   략 ---

 

    물론 시가 차이 나는 표현을 지향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하여 개성

적 차이를 특수자로 고양시켜 시적 현실성을 획득하여야만 하는 것은

분명하지만, 차이나 이질성은 미적 보편성의 범주 안에서 지양 극복되

어야만 한다. 왜냐하면 미란 그 자체로 공통감의 육화과정이기 때문이

다. 따라서 시말이 지향하여야만 하는 시적 위의는 차이를 차이로 지

우는 일회적 유희가 아니라, 차이를 표현하면서 그 차이를 보편성 안

으로 수렴시키는 바로 그곳에 존재한다. 별이 있어 아름다운 새계

말이다.

 

                               (계간『시와정신』2009, 여름호. 제2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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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준

1990년 『시와 시학』으로 시 등단, 2001년 『시안』으로 평론 등단.

저서 『비평의 예술』,『현대성과 시』. 현재 서울산업대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