洪海里 詩 다시 읽기

<시> 방인자 시인 추천《비밀》시편

洪 海 里 2010. 2. 10. 20:16

타작打作

 

洪 海 里

 

엊저녁에는 밤새도록 깨를 털었다

깻단을 두드리지 않아도

깨가 투두둑투두둑 쏟아져 내렸다

흰깨 검은깨

볶지 않아도 고소한 냄새

방안에 진동했다

날이 희붐하게 새었을 때

머리맡에 놓인 멍석에는

깨알 같은 글씨로

시의 씨앗들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이런 날 밤이면

하늘에는 갓밝이까지 잔치가 벌어지고

별들이 마구 뛰어내렸다

아침이 되자

깨가 쏟아질까 쏟아질까

키를 들고 시를 까부르고 있었다

까불까불.

 

 

 

누가 뜰에 와서 들창을 밝히는가

 

차마 문을 열지 못하고

 

마음만 설레고 있는

 

홀로 환한 이승의 한 순간.

 

 

친구를 찾아서

 

먼저 간 친구를 찾아 산을 오르는데

도랑가 물봉선화가 빨갛게 피어

개울개울 흘러내리는 물소리와

참나무 그늘을 밝히고 있었네

오래 전에 가신 어머니 곁

쑥 억새 바랭이 방가지똥

얼크러져 부산을 떠는 자리

때늦은 꿩이 한번 울고 갔다

'얼굴을 만들어야지' 하며 바쁘던,

평생을 뛰면서 살다 가버린 친구

작은 돌 하나 뉘어 놓고 잠들었네

좋아하던 소주 한잔 따라 놓고

북어포 하나 앞에 펼치니

친구는 왜 왔냐며 반기는 듯,

마음만 부자였고

늘 빈 세상을 살았던 친구

한세상 사는 일이 무엇이라고

더 살아 다를 것이 없었던 걸까

참나무 그늘이 짙어 시원한데도

꽤나 마신 술에 얼굴이 벌개져서

우리는 흔들리는 발걸음으로

도랑도랑 흐르는 물소리 따라

두런두런 산길을 내려올 때

물봉선화도 빨갛게 취해 있었네.

 

 * '얼굴을 만들어야지'는 황도제 시인의 시집 제목임

 

 

달개비꽃 피다

 

언제 쪽물을 다 뽑아다 꽃을 피웠느냐

여리디여린 물 같은 계집아

네 머리에는 하늘이 내려와

나비날개를 펼쳐 놓았다

모진 세월 멀리 돌아온 사내

허공 한 번 쳐다보고 너 한 번 바라본다

대낮에도 감추지 않고 당당히 드러낸

은밀한 네 쪽문이 환히 열려 있다 

한여름 땡볕에 발가벗겨 내던져도

끄떡도 하지 않는 질긴 계집, 너

저를 뭘로 보느냐고 물었지

물로 본다고 대답은 했지만

발딱발딱 일어서는 힘이 어디서 나오는지

네 앞에 무릎 꿇어 삼배三拜를 올리고 싶은

해 지고 나서 설핏한 시간

물가 정자에서 시를 읊던 적선謫仙

나비날개로 부채질을 하다

낮에 마신 술이 좀 과했는지

계집의 쪽치마를 끌어다 입술을 닦고 있다.

 

 

 

아내는 머릿속에 새를 기르고 있다

늘 머리가 아프다 한다

부리로 콕콕 쪼아대는지

귀에서 새소리가 난다고 한다

구름이 끼어 있는 사시사철

새는 푸른 하늘이 그립다 한다

새는 너른 들판이 그립다 운다

갇혀 있는 새는 숨이 막혀

벽을 쪼아댄다

날아가고 싶어

아내는 새벽부터 새가 되어 운다

지저귀면서

때로는 노래로

아내의 새는 울고 있다

조롱鳥籠 속에 산다고 조롱 마라

갇혀 사는 새는 아프다.

 

 

비백飛白 

 

그의 글씨를 보면

폭포가 쏟아진다

물소리가 푸르다

언제 터질지 모를

불발탄이 숨겨져 있다

한켠 텅 빈 공간

마음이 비워지고

바람소리 들린다

펑! 터지는 폭발소리에

멈칫 눈길이 멎자

하얀 눈길이 펼쳐진다

날아가던 새들도

행렬을 바꾸어

끼룩대면서

글씨 속에 묻히고 만다

길을 잃은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한 구석에보일 듯 말 듯

뒷짐지고 서 있던

그가 화선지에서 걸어 나온다.

 

 

화택火宅

꽃과 벌 사이
속절없어
꽃이라는 이름으로 쓰는
한 줄 유서
날 가물어
황토 먼지 일어도
마음 젖어 무거운 길
대낮 햇살 속
하얀 찔레꽃
타는 입술 찍어
너는 물의 집 한 채
나는 불의 집 한 채
엮고 또 지우면서
봄날은 간다.

  

 

 

시월

   

가을 깊은 시월이면

싸리꽃 꽃자리도

자질자질 잦아든 때,

 

하늘에선 가야금 퉁기는 소리

팽팽한 긴장 속에

끊어질 듯 끊어질 듯,

 

금빛 은빛으로 빛나는

머언 만릿길을

마른 발로 가고 있는 사람

보인다.

 

물푸레나무 우듬지

까치 한 마리

투명한 심연으로, 냉큼,

뛰어들지 못하고,

 

온 세상이 빛과 소리에 취해

원형의 전설과 추억을 안고

추락,

추락하고 있다.

 

 

아닌 봄날에 


나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너는
무슨 일이
있었던 것처럼.

폭죽 터져
불길로 번지는 열병

물로도 끄지 못하는
이 불에 데지 마라

네가 찍어놓는
발자국마다
벌 받을 일로
잠 못드는 나의 상처

화라락花羅落
花羅落화라락!

꽃잎이 덮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