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평론·시감상

洪海里 시집『비밀』출간

洪 海 里 2010. 5. 2. 05:24

洪海里 시집『비밀』출간

 

 

  洪海里 시집『비밀』이 도서출판 우리글에서 '우리글대표시선 17'로 출간되었다.

  140쪽에 88편의 시가 실려 있다. 정가는 8,000원이다.

  남은 생을 팔팔하게 살고 싶다는 뜻으로 88편의 시를 실었다고 한다.

  앞날개에 저자의 사진과 약력이 실려 있다.

 

  洪海里 시인은 충북 청원에서 태어나 1964년 고려대학교 영문과를 졸업했으며,

  1969년 시집『投網圖』를 내어 등단했다.

 시집으로『花史記』(시문학사, 1975),

『武橋洞』(태광문화사, 1976),

『우리들의 말』(삼보문화사, 1977),

『바람 센 날의 기억을 위하여』(민성사, 1980),

시선집『洪海里 詩選』(탐구신서 275, 탐구당, 1983),

『대추꽃 초록빛』(동천사, 1987),

『淸別』(동천사, 1989),

『은자의 북』(작가정신, 1992),

『난초밭 일궈 놓고』(동천사,1994),

『투명한 슬픔』(작가정신, 1996),

『愛蘭』(우이동사람들, 1998),

『봄, 벼락치다』(우리글, 2006),

『푸른 느낌표!』(우리글, 2006),

『황금감옥』(우리글, 2008)과

시선집『비타민 詩』(우리글, 2008)가 있다.

 

  <시인의 말>은 '명창정궤明窓淨几 시를 위하여' 란 제목으로 10쪽에 걸쳐 있다.

  끝부분을 옮기면 다음과 같다.

 

 

 새벽 세 시 우주와 독대하라

시인은 감투도 명예도 아니다

상을 타기 위해, 시비를 세우기 위해, 동분하고 서주할 일인가

그 시간과 수고를 시 쓰는 일에 투자하라

그것이 시인에겐 소득이요, 독자에겐 기쁨이다

오로지 올곧은 선비의 양심과 정신이 필요할 따름이다

변두리 시인이면 어떻고 아웃사이더면 어떤가

목숨이 내 것이듯 시도 갈 때는 다 놓고 갈 것이니 누굴 위해 쓰는 것은 아니다

시詩는 시적是的인 것임을 시인詩人으로서 시인是認한다

생전에 상을 받을 일도, 살아서 시비를 세울 일도 없다

상賞으로 상傷을 당할 일도 아니고 시비詩碑로 시비是非에 휘말리고 싶지도 않다

시인은 새벽 한 대접의 냉수로 충분한 대접을 받는다

시는 시로서, 시인은 시인으로서 존재하면 된다

그것이 시인이 받을 보상이다.

 

여시아문如是我聞 !

 

 

 

  <작품 읽기>

 

 

방짜징

  

죽도록 맞고 태어나

평생을 맞고 사는 삶이러니,

 

수천수만 번 두들겨 맞으면서

얼마나 많은 울음의 파문을 새기고 새겼던가

소리밥을 지어 파문에 담아 채로 사방에 날리면

천지가 깊고 은은한 소리를 품어

풀 나무 새 짐승들과

산과 들과 하늘과 사람들이 모두

가슴속에 울음통을 만들지 않는가

바다도 바람도 수많은 파문으로 화답하지 않는가

나는 소리의 자궁

뜨거운 눈물로 한 겹 한 겹 옷을 벗고

한평생 떨며 떨며 소리로 가는 길마다

울고 싶어서

지잉 징 울음꽃 피우고 싶어

가만히 있으면 죽은 목숨인 나를

맞아야 사는, 맞아야 서는 나를

때려 다오, 때려 다오, 방자야!

파르르 떠는 울림 있어 방짜인

나는 늘 채가 고파

 

너를 그리워하느니

네가 그리워 안달하느니!

 

  

 

비백飛白

 

그의 글씨를 보면

폭포가 쏟아진다

물소리가 푸르다

언제 터질지 모를

불발탄이 숨겨져 있다

한켠 텅 빈 공간

마음이 비워지고

바람소리 들린다

펑! 터지는 폭발소리에

멈칫 눈길이 멎자

하얀 눈길이 펼쳐진다

날아가던 새들도

행렬을 바꾸어

끼룩대면서

글씨 속에 묻히고 만다

길을 잃은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한 구석에 보일 듯 말 듯

뒷짐지고 서 있던

그가 화선지에서 걸어 나온다.

  

 

 

황태의 꿈

 

아가리를 꿰어 무지막지하게 매달린 채

외로운 꿈을 꾸는 명태다, 나는

눈을 맞고 얼어 밤을 지새우고

낮이면 칼바람에 몸을 말리며

상덕 하덕에 줄줄이 매달려 있는

만선의 꿈

지나온 긴긴 세월의 바닷길

출렁이는 파도로 행복했었나니

부디 쫄태는 되지 말리라

피도 눈물도 씻어버렸다

갈 길은 꿈에서도 보이지 않는

오늘밤도 북풍은 거세게 불어쳐

몸뚱어리는 꽁꽁 얼어야 한다

해가 뜨면

눈을 뒤집어쓰고 밤을 지새운 나의 꿈

갈가리 찢어져 날아가리라

말라가는 몸속에서

난바다 먼 파돗소리 한 켜 한 켜 사라지고

오늘도 찬 하늘 눈물 하나 반짝인다

바람 찰수록 정신 더욱 맑아지고

얼었다 녹았다 부드럽게 익어가리니

향기로운 몸으로 다시 태어나

뜨거운 그대의 바다에서 내 몸을 해산하리라.

 

 

 

시월

 

가을 깊은 시월이면

싸리꽃 꽃자리도

자질자질 잦아든 때,

 

하늘에선 가야금 퉁기는 소리

팽팽한 긴장 속에

끊어질 듯 끊어질 듯,

 

금빛 은빛으로 빛나는

머언 만릿길을

마른 발로 가고 있는 사람

보인다.

 

물푸레나무 우듬지

까치 한 마리

투명한 심연으로, 냉큼,

뛰어들지 못하고,

 

온 세상이 빛과 소리에 취해

원형의 전설과 추억을 안고

추락,

추락하고 있다.

 

 

 

독작하는 봄

 

앵앵대는 벚나무 꽃그늘에서

홀로 앉아 술잔을 채우다 보니

무심한 바람결에 꽃잎 절로 날리고

마음은 자글자글 끓어 쌓는데

가슴속 눌어붙은 천년 그리움

절벽을 뛰어내리기 몇 차례였나

눈먼 그물을 마구 던져대는 봄바람

사랑이 무어라고 바르르 떨까

누가 화궁花宮으로 초대라도 했는가

시린 허공 눈썹길에 발길 멈추면

사는 일 벅차다고 자지러드는 날

햇빛은 초례청의 신부만 같아

얼굴 붉히고 눈길 살풋 던지는데

적멸보궁 어디냐고 묻지 말아라

네 앞에 피어나는 화엄/花嚴을 보라

마저 피지 못한 꽃도 한세상이라고

꽃은 절정에서 스스로 몸을 벗는다

왜 이리 세상이 사약처럼 캄캄해지나

무심한 바람결에 꽃잎만 절로 날리니

달뜨는 마음 하나 마음대로 잡지 못하네.

 

 

구두끈

  

저녁녘 집으로 돌아오는 길

구두끈이 풀어져

거치적거리는 것도 모르고

허위허위 걸어왔다

나이 든다는 것이 무엇인가

묶어야 할 것은 묶고

매야 할 것은 단단히 매야 하는데

풀어진 구두끈처럼

몸이 풀어져 허우적거린다

풀어진다는 것은

매이고 묶인 것이 풀리는 것이고

질기고 단단한 것이 흐늘흐늘해지는 것이고

모두가 해소되고, 잘 섞이어지는 것이다

몸도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인가

구두끈도 때로는 풀어져

한평생 싣고 온 짐을 부리듯

사막길 벗어나는 꿈을 꾸는 것을

나는 이제껏 모른 채 살아왔다

끈은 오로지 묶여 있는 것이 전부였다

구속당하는 것이 유일한 제 임무였다

풀어지지 않기 위해서는

몸으로 제가 저를 잡고 있어야 하지만

끈은 늘 풀어지려고 모반을 꾀하고

헐렁해지고 싶어 일탈을 꿈꾼다

때로는 끈을 풀어 푸른 자유를 줘야 하는데

지금까지 나는 구속만 강요해 왔다

이제 몸도 풀어 줘야 할 때가 된 것인가

오늘도 구두끈이 풀어진 것도 모르고

고삐 없는 노마駑馬가 되어

휘적휘적 걸어서 어딘가로 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