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평론·시감상

<시> 빨랫줄

洪 海 里 2010. 3. 4. 17:17

A Late Summer Afternoon

 

 

빨랫줄 / 洪海里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나는 팽팽하게 걸린 지구의 마지막 힘줄,

맑은 날이면

햇볕에 반한 하늘도 내려와 옷을 벗는다

내게 매달려 펄럭이는 푸른 희망들

물에 바래고 햇빛에 바랜

깨끗한 영혼들이 줄타기를 하고 있다

늦게 돌아와 빨랫말미를 잡은 처녀들

신산한 속속곳들이 내게 와 매달린다

상처가 지워지듯 털어내는 집착이라는 병

가벼워질수록 빛나는 웃음소리로

바스락바스락 마르는 앙말짝의 길

젖은 무게만큼 나는 황홀했다

그런 날 밤이면

내 몸도 출렁출렁 바람에 흔들린다

유성이 내려와 품에 안기고

칠흑의 밤은 깊어간다

바람도 잠든 한밤

눈을 뜨는 그리움처럼

마당에 빨랫줄 하나

하늘을 가르고 있어야 사람 사는 집이다.

  

 

                      

 * 동산 시인의 http://blog.daum.net/dongsan50에서 옮김.

 

===============================================================


‘월간문학’ 7월호(2010) '시 월평'


영혼의 양식 육신의 양식

 

정 성 수(丁成秀)

 



  저 우주 속의 신은 무엇으로 양식을 삼고 있는지 알 수 없지만 여러분이 다 잘 아시다시피 이 떠돌이별 위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겐 두 가지의 양식이 필요하다.

  하나는 ‘육신의 양식’, 또 하나는 ‘영혼의 양식’이다. ‘육신의 양식’은 정치가들과 사업가들과 농민들이 손발을 잘 맞추고 대자연(신)이 적절히 도와준다면 생명 연장의 기본이 되는 ‘육체의 식량난’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러나 ‘영혼의 양식’은 어떤가...? 왜 우리나라의 자살율과 청소년을 비롯한 성인들의 범죄율이 '세계경제협력기구(OECD)' 국가들 중에서 상대적으로 높은가...? 그것은 사실상 대한민국의 국민 독서율이 세계 최하위권이라고 하는 낯 뜨거운 통계와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일반 선진국에 비해 대한민국엔 종교의 집, 즉 절도 많고 교회도 많고 성당도 많다. 그러나 종교는 대체적으로 너무 신 쪽에 가깝지 않은가...!

  혹시 이 풍진세상을 살아가는 지구촌 사람들에겐 ‘보다 인간에 가까운 종교’가 필요하지 않을까...? 한 마디로 말하자면 그것을 지닌 사람들이 바로 이 세상 그 누구도 아닌 ‘시인’ 여러분들이 아닐까...!

  대한민국의 지나친 입시 위주의 교육제도와 출세지향주의, 황금만능주의의 문제가 작지 않지만 ‘영혼의 양식’을 창조하는 이 나라의 시인들에게도 문제가 없지 않다. 왜 요즘엔 사람들의 심장에 화살처럼 꽂히는 감동적인 시들, 신선한 충격을 던져주는 아름다운 ‘영혼의 시’들, 푸르게 살아있는 싱싱한 시들이 많지 않은가...?

  수많은 문예지마다 평범한 산문적 시들이 왜 이리도 많은가...? 시에서도 일종의 ‘그레샴의 법칙’이 통용되는가...?

  적지 않은 시인들이 왜 시를 ‘가슴과 머리’로 쓰지 않고 적당히 ‘머리’로만 쓰려고 하는가...? 이 쓸쓸한 지상에서 시인들은 왜 시를 위해 뜨거운 피를 흘리려고 하지 않는가...!
『월간문학』6월호(2010)에는 모두 43편의 시들이 실려있다.

  원로시인 이성교 시인은 아직도 치유되지 못한 분단의 아픔을 노래한「월천바닷가 해당화」를, 김석규 시인은 아프고 쓸쓸한 옛사랑의 그림자를 노래한「그 겨울의 찻집」을, 황송문 시인은 이 시대의 대학에서 홀대받는 ‘인문학(문사철)’의 잘못된 현주소를 노래한다.
  원로시인들의 건재는 이 나라 문단을 위해서나 사회를 위해서나 대단히 바람직한 일이다.

  우선 허윤정 시인의 시「아무 것도 없다」를 살펴보기로 하자.

  어제의 강물도 흘러가고 오늘의 강물도 흘러가고/내일의 강물도 흘러갈 것이다/대소쿠리로 달 그림자 건지는 일/그것이 영원이고 찰나이려니.
  -허윤정,「아무 것도 없다」부분

  ‘실제로 존재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로 시작되는 전반부는 시의 표현을 주로 산문적 진술에 의존하고 있다. '진리란 없는 것이 진리이다’라는 구절도 역시 마찬가지. 그러나 후반부에서는 ‘강물’과 ‘대소쿠리’와 ‘달 그림자’ 등의 구체적 이미지를 동원, 이 시 전체에 활력을 불어넣어주고 있다.
  다음엔 김종섭 시인의「마음 속 재봉틀」을 감상하기로 하자.

  아니다 빛나는 내 눈물의 거울/쓰디쓴 삶을 버텨 꿈을 봉제한 젊은 날의 보석상자/청춘과 추억, 우리 생존을 고스란히 굴려온 바퀴/마음 속의 재봉틀 소리 아직도 이명으로 들린다.
  -김종섭,「마음 속 재봉틀」부분

  화자에게 있어서 ‘재봉틀’은 ‘빛나는 눈물의 거울’이며 ‘꿈을 봉제한 젊은 날의 보석상자’이자 ‘생존을 고스란히 굴려온 바퀴’이다. 적어도 지난 날 우리들의 어머니가 쓰시던 ‘재봉틀’을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이 시가 전해주는 메시지가 좀더 심장 가까이 다가올 것이다.
  다음엔 김영 시인의「꽃이 그랬다」를 보자.

  햇볕이 꽃을 피운다고 하지 마라/바람이 꽃을 지운다고 하지 마라//피는 것도/지는 것도//꽃이 그랬다.
  -김영,「꽃이 그랬다」부분

  그렇다. ‘(꽃이) 피는 것도/지는 것도’ ‘햇볕’이나 ‘바람’이 아닌 ‘꽃’ 그 자체의 일이다. 이 얼마나 당당한 주체적 자기선언인가...! 군더더기 없는 짧은 서정시가 인상적이다.
  다음엔『펜문학』 5 .6월호(2010)에서 몇 편의 시를 감상해 보기로 하자.

  여기서도 김종길 시인의 시「미쓰 하싼」, 문덕수 시인의「십리포 해수욕장」, 신기선 시인의 「호수의 삶」등 대한민국 원로시인들의 건재를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은 대단한 즐거움이었다.
  발표작품들 중에서 홍해리 시인의 시「빨랫줄」을 살펴보자.

  맑은 날이면/햇볕에 반한 하늘도 내려와 옷을 벗는다/내게 매달려 펄럭이는 푸른 희망들/
   -홍해리,「빨랫줄」부분

  ‘빨랫줄’에 ‘매달려 펄럭이는 푸른 희망들’! 마치 지구라는 이름의 무대 위에서 펼쳐지는 ‘깨끗한 영혼의 춤’을 바라보는 것 같지 않은가...!

  다음엔 김년균 시인의「밥」을 감상해 보자.

  겨자씨보다 작기에 더욱 소중한 저들의 영혼을,/가장 작은 것을 가장 큰 것으로 기르기 위해/하늘은 어제도 오늘도 밤새워 밥을 짓는다./밥의 씨가 땅의 영혼을 위해 새록새록 움트고,/밥의 영혼이 땅의 구원을 위해 무럭무럭 자란다./
  -김년균,「밥」부분

  이 시에서 ‘하늘’이 땅위에 내려주는 ‘밥’은 그냥 ‘사람의 육체를 기르게’ 하기 위한 단순한 먹을거리로서의 ‘밥’이 아니다.
 
  ‘겨자씨보다 작’은 사람의 영혼, 땅의 영혼을 가장 크게 기르고 구원해 주기 위하여 저 우주 속의 신이 ‘밤새워 짓는 밥’이다. ‘밥’을 하나의 매개체로 하여 신과 대자연과 사람을 하나의 영혼으로 잇는 시의 스케일과 주제가 신선하다.
  다음엔 윤고방 시인의「봄날에 꿈꾸다」를 감상해 보자.

  소녀는 어디 갔을까//.....맑은 어둠이/천지에 내리면/머나먼 옛 시절/유리잔 속에서 부서진/봄날의 꿈을/다시 꿀 수 있을까
  -윤고방,「봄날에 꿈꾸다」부분

  이 시에서 ‘소녀’는 화자의 어린 시절 속 순정, 혹은 사랑의 대상으로서의 이성적 존재만이 아니라 과거, 또는 꿈, 혹은 가장 아름다운 추억으로서의 다의적 의미를 지닌 ‘소녀’이다.

  그렇다. 그 옛날 우리들의 가슴을 설레게 했던 ‘소녀’들은 지금 어느 지상, 혹은 어느 허공에서 살고 있는가...! 하나의 ‘소녀’는 불특정 다수의 소녀, 영원히 사라질 수 없는 우리들 영혼의 불사조이다. 
 
  이 지구별의 첨단과학이나 첨단문명이 더욱더 크게 발달하면 할수록, ‘천상천하유아독존’인 사람들의 영혼이 기계문명 속에서 더욱더 상처받고 피폐해질수록 시는 우리 인류의 가장 눈부신 ‘구원의 광채’ 중의 하나가 될 것이다.

  아름다운 ‘영혼의 광채’를 지닌 이 땅의 시인들이시여, 저 파도치는 수평선 위로 떠오르는 아침 해처럼 빛나는 뮤즈의 눈빛으로 더욱더 씩씩하게 시의 성자로서의 힘을 내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