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평론·시감상

[스크랩] 홍해리 선생의 시론과 섬잔대

洪 海 里 2010. 5. 14. 08:00

  

오후 2시에 끝난 중간고사. 내일이 쉬는 토요일이고 보면 오늘은 오름 나들이도

괜찮겠다 싶어 마음을 띄우니, 섬잔대와 물매화, 꽃향유 등이 눈에 아른거린다. 

번영로로 차를 달리며 어디가 좋을까 머리에 그리다가 들꽃이 많았던 돝오름으로

결정했다. 콩밭의 콩잎은 누렇게 변하는데, 나머지는 아직도 진초록을 유지한다.


돝오름은 비자림 옆에 있는데, 산림조합에서 지금 한창 산책로 공사 중이었다.

꽃향유는 별로 안 보이고, 물매화는 아직 좀 일렀는데, 이 잔대가 한창이었다.

생명과 자연과 시를 가꾸는 ‘우리詩’ 10월호에 홍해리 선생님의 권두시론이

너무 좋아서 언제 예쁜 꽃을 만나면 소개하고 싶었는데 같이 올려놓는다. 


 

♧ 명창정궤(明窓淨几)의 시를 위하여 - 洪海里


목재소를 지날 때면 나무 살 냄새가 향긋하다

나무의 피 냄새가 짙게 배어 있다 나온다

목이 잘리고 팔이 다 잘려나가고 내장까지 분해되어도

도끼나 톱을 원망하지 않는 나무는 죽어서도 성자다

한자리에 서서 필요한 만큼만 얻으며

한평생을 보낸 성자의 피가 죽어서도 향그러운 것은

나일 먹어도 어린이 같은 나무의 마음 탓이다

사람도 어린이는 향기로우나 나일 먹으면 내가 난다

목재소를 지날 때면 나도 한 그루 나무이고 싶다

한 그루 나무 같은 시를 쓰고 싶다.

 

양파는 얇고 투명한 껍질을 벗기고 나서 살진 맑은 껍질을 까고

또 까도 아무것도 없다

바닥이 보이지 않는다

시인은 양파를 까는 사람이다

양파의 바닥을 찾아야 한다

양파의 바닥에까지 천착해야 한다

철저히 벗겨 양파의 시작/씨앗/정수/처음을 찾아야 한다

늘 처음처럼 시작始作/試作//詩作해야 한다.

 

 

매화나무가 폐경기가 되었지만 해마다 봄이면 이팔청춘이다

삼복에 맺은 인연의 끈을 잡고 삼동을 나고

봄이 오면 여봐란 듯이 몸을 열어 보인다

겨우내 폐가처럼 서 있더니 어디에 저 많은 꽃을 숨기고 있었을까

수많은 청매실을 달고 있는 모습이 장관이다

몇 분 안 되는 정정한 노시인을 뵙는 것같은 기분이다

오늘은 귀로 향기를 맡고 싶다

노매 같은 시인을 만나 고졸한 시 한 편 듣고 싶다.


움직이지 않는 것은 죽은 것이라고

먹이 찾아 가기 전이나

잠자리 찾아 들기 전

날아다니는 수묵화로

가창오리 떼가 하늘을 가득 메우는 것은

혼신으로 먹을 갈아 일필휘지로

호수를 품에 띠어 가고 싶기 때문이라고

가창오리 떼는 움직이는 시로 말하고 있다.

 


시인은 죽으면 신이 된다

시를 버리면 사람만 남고

사람을 버리면 시만 남도록

시와 사람이 하나가 되어 신으로 탄생한다

사람의 영혼을 실어 나르는 신이 되기도 하고

영혼을 노래하는 신神이 되기도 한다.


바다가 내 속으로 들어왔다

신선한 푸른 수평선이 눈썹에 걸렸다

해가 빨갛게 지고 있다

수평선의 두 끝을 잡고 해를 걷어올려라

너의 넋을 잡고 매달려라

시가 걸릴 것이다.

 


모든 예술이 놀이이듯

시 쓰는 일도 영혼의 놀이이다

시는 내 영혼의 장난감

나는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 어린이

나의 시는 울퉁불퉁하다

그래서 자박자박 소리가 난다.


그리움이란

소리 없이 불어왔다 사라지는

바람 같은 것

언젠가는 떠나보내야 할 것이라며

바람은 멀어지면서

보이지 않는 몸짓으로 말해 주고 있다

맨발로 뛰어가는 발자국 소리

그것이 시였다.

 


한평생의 그리움을

파도에 실어 보낸

천길 바다를 물질하는 잠녀들은

네가 그리움을 아느냐고 묻는다

바다에 묻은 푸르고 깊은 그리움

숨비소리로 뱉어내던 쉰 목소리

그것이 한 편의 시였다

해녀는 천길 바다의 시를 다시 바다에 묻는다.


풍경소리 시끄럽다고

바람 부는 날에는 떼어 놓으라는

입이 큰 옆집 여자

하늘붕어는 바람 부는 날에나 제 목숨꽃을 피우는데

바람호수가 없으면

붕어는 어디서 사나

죽은 붕어는 시가 아니다.

 


새벽 세시

발가벗은 영혼이 나를 만나

말을 타고 천리를 달리면

금빛 현란한 언어의 사원에 닿을까

풀어진 마음을 매어

하늘과 땅을 잇는 시간

풍경소리 푸르게 울리는 곳

시뻘겋게 타오르는 불에 사금을 녹여 관을 만든다

법당 안 가장 낮은 자리에 놓고

석 달 열흘 목탁소리로 다듬으면

가는 현의 찬란한 울림의 시 한 편이 관 속에 놓일까

바람 가는 길을 따라 무작정 가고 있다.


눈을 잔뜩 뒤집어쓴 오후

산이 저물 대로 저물어서

어스름 속으로 절름절름 지고 있다

어디선가 눈 속에서 새 한 마리 울고 있다

시 한 마리 따라 울고 있다.

 


죽은 나무에는

죽어도 새가 깃들지 않는다

둥지를 틀 마음도 없다

보금자리 치는 사랑도 없다

집이란 그늘이 깃들지 않는 곳

그늘이 짙으면 풀이 나지 않는다

시도 싹을 틔우지 않는다.


시 한 편을 가지고

시집에 넣기 전 마지막으로 손을 본다

손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파여 있는 굽은 길이 보인다

손금이다

마지막 퇴고의 길에서도 부끄러워

발길을 돌리지 못하고 망설인다

시집에 넣고 나서 또 고칠 것이기 때문이다.

 

살기 위해서

시를 쓰는 것이 아니라

죽기 위해서

잘 죽기 위해서 시를 쓰는 일이란 다짐을

다시 한 번 다져 본다.

 


하늘 한복판을 조금 지난 곳

달이 보름보름 부풀고 있다

꽃반지 낀 사내가 마른 풀밭에 누워 있다

침묵이다

왜 침묵이 금인가

말 없음 속에 말이 뛰어 놀고 있기 때문이다

그 말을 잡아타고 천리를 달려라

온몸이 이슬에 젖을 때까지.


인수봉이 저기 있다

저 잘난 사내

밤낮없이 백운 만경을 거느리고

당당하기 그지없는

아무리 유혹해도 다가서지 않는

안타까운 계집처럼, 저 사내

품안에 넣고도 속수무책, 대책이 없다

요지부동이다

아무리 진달래가 꽃불을 놓아도

아무리 소리쳐도 들은 척 만 척

눈이 내려야 가끔 흰 모자를 쓰는

의연한 기상으로

하루살이 떼 같은 군상을 내려다본다

허상이다

나의 시가 늘 그렇다.


너를 한 번도 잊은 적 없다

해가 지고 밤이 와 어두어지면

칠흑 속에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그 속에서도 너를 잊은 적 없다

너도 내가 보고 싶은 때가 있느냐

내 마음을 다 모아 불을 밝혀도

그리움은 그리움대로 두고

어딘가로 스친 듯 하루가 진다

쓰지 못한 시가 노을 따라 지고 있다.

 


꽃 속의 궁전은 황홀하나 허망하게 무너진다

부질없는 짓인 줄 알면서도

궁전을 짓는 부산한 역사

도끼질 톱질 대패질 망치질소리

향기에 취하는 것은 찰나

깨고 나면 허무의 푸른 지옥

피어날 때야 영원할 것 같지만

며칠이나 붉겠느냐

이내 꽃이 진 자리 찬바람 불다 가고

자궁 속에서 아기가 놀듯

나무속에서 봄이 노는 소리 들린다

다시 붓을 들어라.

 

먹어야 산다고 아무것이나 먹기만 해서야 쓰겠는가

화려한 재료에 인공 조미료 듬뿍 쏟아붓고 지지고 볶고 튀기고 굽고 끓이고 삶아

익힌 것이 아니라 날 냄새나는 날것을 요리하라

천연 조미료로 맛을 낸 날것으로 시탁詩卓을 꾸며라

신선한 안주 옆에 맑은 술도 한 주전자 놓여 있기를!

그래야 자연을 만날 수 있다.


자연 속으로 들어가라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라, 자연, 그 자체가 되라

우주의 자궁은 늘 열려 있다

냉수로 눈을 씻고 마음을 헹구고 손을 모아라

새벽 세시 우주와 독대하라.

 


시를 쓰는 것은 육체가 행하는 것처럼 숨 쉬고 먹고 마시고 배설하는 영혼의 행위이다

어떤 곡해나 구속도 용납되지 않는다

시 쓰기는 영혼의 자유 선언이다

시란 첫사랑이자 마지막 사랑이다

늘 설레고 한편으로는 한 편 한 편으로 완성되는 이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에서는 잘 익은 과일의 향기가 난다

잣, 호두, 밤, 대추, 사과, 배, 석류, 모과, 매실, 감이나 앵두의 향기를 품고 있다

그래서 한 권의 시집은 잘 갖춰진 과일전과 같다

시는 호미나 괭이 또는 삽으로 파낸 것도 있고 굴삭기를 동원한 것도 있다

시인은 감투도 명예도 아니다

상을 타기 위해, 시비를 세우기 위해, 동분하고 서주할 일인가

그 시간과 수고를 시 쓰는 일에 투자하라

그것이 시인에겐 소득이요, 독자에겐 기쁨이다

오로지 올곧은 선비의 양심과 정신이 필요할 따름이다

변두리 시인이면 어떻고 아웃사이더면 어떤가

목숨이 내 것이듯 시도 갈 때는 다 놓고 갈 것이니 누굴 위해 시를 쓰는 것은 아니다

시詩는 시적是的인 것임을 시인詩人으로서 시인是認한다

생전에 상을 받을 일도, 살아서 시비를 세울 일도 없다

상賞으로 상傷을 당하고 싶지 않고 시비詩碑로 시비是非에 휘말리고 싶지 않다

시인은 새벽 한 대접의 냉수로 충분한 대접을 받는다

시는 시로서, 시인은 시인으로서 존재하면 된다

그것이 시인이 받을 보상이다.


여시아문如是我聞!

 

 

♬ Brahms - Serenade No.1

 

출처 : 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글쓴이 : 김창집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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