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누리장나무 열매
한 번 만나 뵙지도 못했는데, 그냥 통하는 홍해리 선생님이 ‘비타민 詩’라는 시집을 냈다. 사실이지 우리나라 시단에 대단한 공헌을 하신 분 중 한 분이신 선생님이 요즘 시를 들여다보면, 아무래도 건강에 문제가 있는 것 같다. 그냥 단순한 나이로는 나보다 대여섯 살 위로 알고 있지만 ‘시인의 뜰 <洗蘭軒>’에 내건 사진이나 ‘수술실에 들어가며’를 보면 건강에 대한 걱정이 앞선다.
다음은 시집 ‘비타민 詩’에 나온 ‘시인의 말’이다. 새천년 들어 드러낸 시집 ‘봄, 벼락치다’, ‘푸른 느낌표!’와/ ‘황금감옥’에서 내 시의 비타민 C를 뽑아/ 시선집 ‘비타민 C’를 엮는다.// ‘우리는 자연으로 가야 합니다./ 시는 우리 영혼의 비타민,/ 자연이 되기까지 한 알이면 충분합니다./ 비타민 詩를 복용합시다.’이다.
한 때 난(蘭)에 미쳐 전국 방방곡곡을 돌아다니셨다는 선생님! 가을 시편을 골라 결실의 기쁨을 노래하는 가을 열매와 같이 싣는다.
* 겨울딸기 열매
♧ 가을 들녘에 서서
눈멀면
아름답지 않은 것 없고
귀먹으면
황홀치 않은 소리 있으랴
마음 버리면
모든 것이 가득하니
다 주어버리고
텅 빈 들녘에 서면
눈물겨운 마음자리도
스스로 빛이 나네
* 정금나무 열매
♧ 가을 서정
1. 가을詩
여름내 말 한 마디 제대로 고르지 못해
비루먹은 망아지 한 마리 끌고 올라와
오늘은 잘 닦은 침묵의 칼로 목을 치니
온 山이 피로 물들어 빨갛게 단풍 들다.
2. 상강(霜降)
가을걷이 기다리는 가득한 들판
시인들은 가슴속이 텅텅 비어서
서리 맞은 가을 거지 시늉을 내네
천지에 가득한 詩를 찾아가는 길
가도 가도 머언 천리 치는 서릿발
詩 못 쓰는 가을밤 바람만 차네.
3. 칼
눈썹 한 올 하늘에 떠서 푸르게 빛나고 있다!
* 가막살나무 열매
♧ 가을 엽서
풀잎에 한 자 적어
벌레소리에 실어 보냅니다
난초 꽃대가 한 자나 솟았습니다
벌써 새끼들이 눈을 뜨는
소리, 향기로 들립니다
녀석들의 인사를 눈으로 듣고
밖에 나서면
그믐달이 접시처럼 떠 있습니다
누가
접시에 입을 대고
피리 부는 연습을 하고 있습니다
창백한 달빛을 맞은
지상의 벌레들도
밤을 도와 은실을 잣고 있습니다
별빛도 올올이 내려
풀잎에 눈을 씻고
이슬 속으로 들어갑니다
더 큰 빛을 만나기 위해
잠시,
고요 속에 몸을 뉩니다
오늘도
묵언 수행 중이오니
답신 주지 마십시오.
* 작살나무 열매
♧ 가을 들녘에 서면
다들 돌아간 자리
어머니 홀로 누워 계시네
줄줄이 여덟 자식 키워 보내고
다 꺼내 먹은 김칫독처럼
다 퍼내 먹은 쌀뒤주처럼
한 해의 고단한 노동을 마친
허허한 어머니의 生이 누워 계시네
알곡 하나하나 다 거두어 간
꾸불꾸불한 논길을 따라
겨울바람 매섭게 몰려오는
기러기 하늘
어둠만 어머니 가슴으로 내려앉고
멀리 보이는 길에는 막차도 끊겼는가
낮은 처마 밑 흐릿한 불빛
맛있는 한 끼의 밥상을 위하여
빈 몸 하나 허허로이 누워 계시네.
* 배풍등 열매
♧ 한가을 지고 나면
기적도 울리지 않고 열차가 들어온다
한갓되이 꽃들이 철길 따라 피어 있다
굴을 지날 때 승객들은 잠깐 숨이 멎는다
역사에는 개망초처럼 소문이 무성하다
기약 없이 열차는 다음 역을 향해 떠난다
꽃잎 지는 역은 장 제자리에 있다
* 알꽈리 열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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