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평론·시감상

<시해설> 투명한 그늘 / 이병금(시인)

洪 海 里 2012. 4. 28. 04:37

투명한 그늘

- 홍해리 신작시 5편을 중심으로

 

이병금 (시인)

 

 

  그의 신작시 5편은 특이한 구조를 보여준다. 각각의 한 편을 한 층씩 쌓아올린 5층의 건축물은 물위에 2층, 물속에 잠긴 다른 두 개의 층이 데칼코마니 기법처럼 마주보고 있다. 물의 표면에 스며 있어 잘 보이지 않는 또 하나의 층이 물위와 물밑의 접혀진 부분으로 숨어 있다. 5층의 건축물은 물위에 떠 있지만 물속에도 떠 있다. 맨 아래층의 바닥엔 짐작할 수 있듯 물의 뿌리와 연결된 작은 문이 열려 있고 검붉은 물이 입을 벌리고 있다.

  5층의 건축물을 지탱하는 중심은 물의 표면과 맞닿은 ‘그늘’이라는 주름진 층이다. 반들거리는 물의 피부에 닿은 채 물위의 집은 생각에 잠겨 있다. 혹은 물위로 잠시 옮겨온 집의 주인은 물속에서 일어났던 일들에 대해 말하고 싶어진다. 물위에 글자를 적어본다. 금세 지워진다. 물의 주름보다 더 빨리 써 본다. 글자와 글자가 서로 달라붙어 의미가 번진다.

  잠시 구름이 걷히고 물속이 훤히 비쳐 보이는 순간, 물속 집의 창문이 열린다. 굴절된 빛줄기에 찌그러진 얼굴의 사내가 피가 뚝뚝 떨어지는 칼을 들고 외친다. 내가, 사람을, 사람을 죽였다고, 믿겨져? 내 마누라가 옆집 남자와 바람이 났다고…… 물위에선 흔한 살인사건의 한 장면이었고 다음 장면으론 사내 스스로 목숨을 끊든지 미쳐가든지…… 카메라의 앵글이 그 뒤를 쫓는다.

 

그늘이 그늘그늘 드리워진 곳은 어디인가

그늘은 늘 아래 존재한다

그늘은 미끄러워 잡히지 않는다

그런 걸 알면서도 나는 ‘그늘 아래’라고 겁없이 쓴다

그늘에 아래가 있는가

그러면 그늘의 위는 어디인가

그래 어쩌자고 나는 그늘 아래로 파고드는가

그냥 그늘 속으로 기어들지 않는 것인가

그늘은 무두질 잘 해 놓은 투명한 가죽이다

그늘에서 가죽에 막걸리를 먹여야 좋은 소리가 난다

그늘의 소리가 배어 있다 나온다

그늘북은 슬픔이다

그게 아니다

그것은 젖어 있는 팽팽한 희망이다

그래 나는 늘 그늘이고, 아래에 있고 싶다.

                                              -「그늘과 아래」 부분

 

  융[Carl. Jung]은 그림자가 없는 빛은 없다고 말한다. 인간이란 존재는 완전한 것이 아니라 완전을 향해 가는 온전함으로 설명되며 마음속 근원에 자리하는 원형[archetype]으로의 ‘그림자[shadow]’를 제시한다. 결핍으로의 그림자가 억압받는 인격의 한 부분을 드러냈다면 위 시의 그늘과는 그 의미가 조금 다르다고 하겠다. 시인이 말하고자 하는 그늘은 판소리에서 더 유사하게 그 정신의 범주를 찾아볼 수 있다.

  ‘저 사람 소리엔 그늘이 없어!’라고 하면 소리판에선 끝장이라는 말이다. 즉, 그늘은 삶의 신산고초辛酸苦楚를 오래도록 안으로 삭이면서 스스로를 긍정하며 이른 경지라 하겠다. 이 말은 그리스 신화 속 오이디푸스왕의 비극을 떠올린다. 그는 자신의 맹목성의 날들에 대한 스스로의 벌로 두 눈을 찌르고 무수한 삶의 주름을 건너가면서 마침내 이렇게 외친다. ‘이 많은 시련에도 불구하고 나의 고령과 고결한 영혼은 나로 하여금 이 모든 것이 잘 되었다고 판단하게 한다.’

  그늘은 이미 그 속에 빛의 씨앗을 품고 있다. 어둠에서 빛을 향해 나아가는 자의 어둠에 대한 끌어안음은 슬프지만 빛난다. 그래서 시인은 그늘 그 아래로 걸어가려 한다. 손을 뻗어보지만 잘 잡히지 않는다. 늘 그의 손엔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간 시간의 모래알이 남아 있다. 펼쳐진 손바닥의 강줄기를 보며 모래알들이 어디로 사라졌는지를 물어본다. 내 안으로?

물의 피부, 그 아래 무엇이 있는가. 시인은 그늘에 앉아 막걸리를 따른다. 그늘이 그늘에게 젖은 불을 먹인다. 흐릿하게 번지는 불빛에 대한 기억 속에서 북소리가 울리고 슬픈 듯하지만 슬픈 것만도 아니다. 젖어 있지만 마냥 축축하지만은 않다. 이제 시간의 주름살이 드리워진 시인은 슬픔 한잔을 투명한 눈물로 바꿀 줄 안다. 문득 그늘 그 아래로 밧줄을 내린다.

 

박수가 무녀를 만나 수박을 낳는다

자살을 입에 달고 못 죽어서 한이던 여자

한풀이하고 나서 이제는 살자고 야단이다

그렇다 무엇이든 안받음하는 법이라서

살다 보면 살맛나는 맛살도 만나게 되지

죽자고 일만 하다 덜컥 죽어버린 사내

옆집에 살던 죽자竹子 고년을 만나 

잘 익은 수박이라도 하나 쩍 소리 나게 쪼개서

쟁반에 안다미로 담아 놓고

빨간 속살을 뭉텅뭉텅 물어뜯었던가

쩍 벌어진 그녀의 입속은 빨갛다

단단한 흑요석 이빨이 반짝이고 있다

수박 속에는 바다가 들어 있다

                                   -「수박을 깨자」 부분

 

  물속엔 지느러미를 반짝이며 물고기가 헤엄치고 물풀이 넘실댄다. 검푸르게 바다 골짜기가 깊어져 어둠과 구분되지 않는 물고기들이 입을 벌리고 바다를 삼켜버린다. ‘검은 구멍’이라 이름 붙여진 괴물물고기는 삼켜버린 바다를 호수 크기로 토해낸다. 호수는 더 작아져 사람의 몸통 속으로 들어가고 반은 사람 반은 물고기인 인어공주는 물위의 세상이 보고 싶어 1865년 엘리스로 태어난다. 다시 길고 긴 이야기를 시작한다.

  엘리스의 이야기는 끝나지 않는다. 엘리스가 물속에서 일어난 이상한 일들을 말할수록 말의 비늘들이 더 빛난다. 젖은 말들이 물 밖에 둥둥 떠다니고 엘리스의 이야기를 듣는 쥐와 애벌레, 미친 모자장수, 트럼펫병사들은 비늘을 하나씩 떼어다가 자신의 바다에 옮겨 놓는다. 5편의 시에서 가장 특징적으로 나타나는 언어유희[pun]가 발생되는 이유이다. ‘인어공주가 바다에 몸을 던진 순간 물속에서 커다란 거품이 일어났다’고 엘리스가 말한다. 인어공주가 거품을 일으키지 않고 왕자와 결혼했다면?

  죽자고 일만하다 죽어버린 사내, 물 아래선 살아 옆집 사는 ‘죽자竹子 고년’을 만난다. 벌어진 그녀의 입 속으로 들어가 빨간 수박살을 뭉텅뭉텅 뜯어먹는다. 수박 속엔 바다가 출렁이고 바다 속에 사는 ‘죽자’를 통해 결핍을 채우려는 욕망, 살고자 할수록 더 죽어야 하는 물 위와 물 밖의 평행우주, 어두우면 어두울수록 바다 더 깊이 가 닿으려는 욕망은 하루살이가 불빛 속에서 죽음을 맞으려는 최후의 몸짓과도 같다.

  결핍으로의 욕망은 물의 뿌리에 닿고 싶다. 마지막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물을 마셔버린다. 마셨다고 생각한다. 자, 이제 물의 뿌리에 이를 수 있을까. 욕망이 사라지는 지점이 있을까. 물위의 세상은 물밑의 세상을 억압하고 유폐시키고 거세하려 한다. 욕망엔 바닥이 없다. 밑둥이 뻥 뚫린 원통형처럼 생겼다. 엘리스는 몸이 한없이 작아져 벌레구멍을 타고 어둠 한 쪽 끝 빛의 깃에 닿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물속으로 물속으로 내려갔던 여행이 시간의 경사가 급해질수록 숨이 조여듦을 느낀다. 모든 것을 삼켜버릴 회오리가 바로 옆에서 달려오고 있다.

  밧줄 좀 던져줘. 누가, 구명조끼 좀 내려줘. 밥줄에 매달려 잠줄에 실려 숨을 할딱이며 물위로 올라온 그는 이번에도 실패다. 물속 필름을 돌려보면 노출시간이 너무 길었거나 짧았다. 거뭇거뭇하다. 물위 세상은 하는 일마다 엉키고 깨지고 소란스럽다. 지친다. 주름이 드리워진다. 그는 어둠 속에서 갈증을 느낀다. 수박을 한 입 베어 문다. 수박 속 바다를 끌어안고 박수를 친다. 박수소리가 슬픈 듯 들린다.

물위의 집에 돌아가기 전 그는 한 동이의 물을 퍼 담는 걸 잊지 않는다. 줄을 찾는다. 물동이를 그 끝에 매다니 두레박이 되었다. 검거나 회오리치거나 침묵하는 바다에서 한 동이 물을 물 밖으로 퍼 나르는 일, 시인은 자신이 물속과 물 밖 세상을 이어주는 물장수라는 걸 알고 있다. 물 밖으로 나온 시인의 주머니엔 젖은 종이 한 장이 접혀 있다.

 

너와 나를 이으려고

술로 말로 줄을 매려고 마음 출렁인 적은 없었던가

그러나 한잔 술에 취하면

그건 금방 풀어지는 끈이었어

끈에는 끊어지는 속성이 있지만

가장 질기고 속된 성스러운 줄도 있는 줄 몰랐다

살아 있는 줄, 탯줄 같은

줄을 잡고 한평생 매달렸다면

노끈이나 줄끈이 아닌 명줄이나 길었을까 몰라

쓸데없는 삭아버린 철끈이나 동아줄은

거미줄처럼 얽혀 있지만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이어주는

끈이 철끈이기를 바라면서

줄꾼 노릇도 제대로 못하는 나는

발끈해서 앞뒤 분간도 못하지 않았던가

따끈하지도 화끈하지도 못하고

밤낮 이런 저런 일에 질끈 눈이나 감아 주면서

매끈하게 줄을 타는 연습도 하지 않았지

줄을 타겠다고 끈끈이처럼 매달려 있지 말고

줄이나 끈을 달라고 엎드려 빌어나 볼 일인가

이것저것에게 끈끈히 달라붙어 줄줄이 빌 일인가.

                                          -「줄 또는 끈」 부분

 

  물 밖으로 나온 그는 물속의 일들을 전부 되살려내지 못한다. 물의 안과 밖을 감싸고 있는 투명한 막, 시간의 강을 건너면서 무수한 그로 분절되었기 때문이다. 나라는 주체는 그늘의 지층을 걸어 나오면서 나와 비슷한 것들로 바뀌어졌다. 기표의 미끄러짐이 일어나는 다섯 편의 시들은 그래서 언어유희면서 유희만은 아니다. 물속의 내가 물 밖으로 나오면서 발화한 목소리의 재현 방식이며 메아리다.

울음을 터뜨리며 물 밖으로 살아나오기 위해선 탯줄을 꼭 잡아야 한다. 시인에게 탯줄은 말의 줄이다. 미끄러진 현재들이 쌓인 과거라는 무의식층과 투명한 물의 피부인 지금 여기의 현재, 무수한 너라고 호명되어질 물방울들의 미래를 이어주는 끈이 바로 말의 줄이라는 걸 시인은 알고 있다. 제대로 줄꾼을 하기 위해 날마다 새벽 3시에 일어나서 그는 줄을 타는 연습을 시작한다.

 

길이 바람을 불러 오고 물을 흐르게 한다

꽃도 길이 되어 곤충을 불러 모은다

길은 긴 이야기를 엮어 역사를 짓는다

길에는 길길이 날뛰던 말의 발자국이 잠들어 있다

길이길이 남을 길든 짐승의 한이 서리서리 서려 있다

살아 있는 것들은 모두 몸에 길이 있다

영혼도 가벼운 발자국으로 길을 낸다

태양과 별이 지구를 향해 환한 길을 만든다

시간은 영원으로 이어지는 끝없는 길이다

기다리는 길이 끊어지고 사라지기도 한다

발바닥 아래 생각이 발딱거리며 가고 있다

                                   -「길은 살아 있다」 부분

 

  무의식의 바다에 두레박을 내려 물 한 동이를 퍼 올리는 이유는 살아 있는 길 때문이다. 길은 스스로 걸어간다. 어디로 가야 할지를 이미 알고 있는 길은 시간의 다른 이름인지도 모른다. 길은 생명 있는 것들의 어머니처럼 길을 가는 개체들을 감싸 안는다. 하늘에 길을 놓으면 날개를 퍼득이며 새가 날아간다. 날아간 새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사이로 물고기가 스치듯 지나간다. 절름거리며 병신머저리가 그 길을 따라 걸어갔고 바람이 손을 흔들었고 꽃과 곤충이 팔짱을 끼고 덤불 속에서 깜박이며 사라졌다.

  길은 서로 엇섞이면서 각자의 길의 끈으로 실크보다 더 투명한 피륙을 짜고 있다. 그래서 길에는 날뛰던 야생의 발자국들이 들어 있고 짐승의 한이 서려 있으며 길들여지지 않는 길든 한의 울음이 배어나온다. 길은 개체들의 끈들이 만나고 헤어지면서 시간이라는 투명한 피부를 만든다. 붉은 피와 흰 살이 피부 속에서 반짝인다. 이 길은 허공과 적막조차 너끈히 담기는 빅 사이즈다. 개체의 발바닥에 발딱이는 각자의 생각들이 더듬이처럼 살아 있어 허공의 길조차 따뜻하다.

  그의 시들은 프로이드의 의식과 무의식의 지형도를 그대로 보여준다. 무의식에서 의식으로 튕겨져 나온 목소리는 다성多聲의 소리를 낸다. 그의 시에 동음이의어가 난무하는 까닭이다. 이러한 다성성이 단지 말놀이에만 그친다면 개체들의 관계성에 실패한 것이지만 그의 목소리들은 하나의 통일장 속으로 수렴된다. 그것은 그가 발화한 것처럼 침묵에 대한 인식에서 유래한다.

 

침묵은 호수처럼 바닥이 보이지 않는다

말로도 못할 일이 있다

완전한 불완전,

그것이 시의 절대자유, 생명이요, 꽃이다

시에는 침반이 없다

가는 길이 천양지간 사방이다

시는 침묵이 피우는 맹목의 꽃

그 열매가 향기로 너에게 간다

맹물의 시다.

              -「침묵」 부분

 

  물위의 말들은 물의 바닥에 이를 수 없다. 이미 소리라는 옷을 입은 말들은 차원을 하나 더 거느리고 있다는 점에선 2차원에서의 문자의 의미와 일치하지 않는다. 물위의 집과 물속의 집을 등에 지고 시인은 지나온 시간의 급류, 물속 캄캄한 시간의 나이테를 떠올린다. 그의 손에 들린 한 편의 시, 아직 숨이 할딱이는 물고기를 종이 철창에 가두어야 할까. 차라리 냉동 보관할 것인가. 그의 손에 들린 막 건져 올린 한 편의 시는 물고기만도 사람만도 아니며 꽃이면서 꽃만도 아닌 그 무엇이다.

  생명.

  흐리거나, 또렷하게, 간지럽거나 눈 시리게 생명이라고 말하는 소리가 들린다. 발화된 생명은 다시 번지고 퍼진다. 끝없이 흐르는 데로 몸을 맡기면서 더 크게 어디선가 생명의 소리를 들은 것도 같다. 물의 한 쪽 끝엔 한 줌 모래의 시가 있다. 다른 한 쪽 끝엔 침묵이 있다. 둘 사이엔 강이 흐르고 주름진 강은 결핍 때문에 새로운 물결을 일으킨다. 둘은 서로 평행선을 달리면서 마주보는 모양이 박수무당과 그 짝인 무녀를 닮았다. 완전을 꿈꾸지만 장님 머저리의 애인인 너를 닮았다.

                                                                                                         - 월간《우리詩》2012. 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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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늘과 아래 외 4편

 

 洪 海 里

 

 

그늘이 있는 곳은 어디인가

그늘이 그늘그늘 드리워진 곳은 어디인가

그늘은 늘 아래 존재한다

그늘은 미끄러워 잡히지 않는다

그런 걸 알면서도 나는 '그늘 아래'라고 겁없이 쓴다

그늘에 아래가 있는가

그러면 그늘의 위는 어디인가

그래 어쩌자고 나는 그늘 아래로 파고드는가

그냥 그늘 속으로 기어들지 않는 것인가

그늘은 무두질 잘 해 놓은 투명한 가죽이다

그늘에서 가죽에 막걸리를 먹여야 좋은 소리가 난다

그늘의 소리가 배어 있다 나온다

그늘북은 슬픔이다

그게 아니다

그것은 젖어 있는 팽팽한 희망이다

그래 나는 늘 그늘이고, 아래에 있고 싶다.

 

 

수박을 깨자

 

박수를 치면 손에서 수박 냄새가 난다

박수박수박수박수박수박!

짝이 없으면 짝짝 소리도 나지 않는다

박수가 무녀를 만나 수박을 낳는다

자살을 입에 달고 못 죽어서 한이던 여자

한풀이하고 나서 이제는 살자고 야단이다

그렇다 무엇이든 안받음하는 법이라서

살다 보면 살맛나는 맛살도 만나게 되지

죽자고 일만 하다 덜컥 죽어버린 사내

옆집에 살던 죽자竹子 고년을 만나 

잘 익은 수박이라도 하나 쩍 소리 나게 쪼개서

쟁반에 안다미로 담아 놓고

빨간 속살을 뭉텅뭉텅 물어뜯었던가

쩍 벌어진 그녀의 입속은 빨갛다

단단한 흑요석 이빨이 반짝이고 있다

수박 속에는 바다가 들어 있다

세계 지도가 둥둥 떠다니고 있다

불쑥! 하면 쑥불!이 될 수밖에야

쑥불 피워 놓고 모기를 쫓으면서

한밤에 수박잔치라도 벌이자

어차피 소주가 주소가 되는 세상

올여름엔 수박을 끌어안고 박수를 치자

한여름밤 달콤한 꿈속에서 수박을 깨자

하얀 이불 홑청에 지도를 그려놓고

세계 일주 여행이나 떠나 보자.

 

 

줄 또는 끈

 

줄도 끈도 없어 살길이 막막할 때

가늘게라도 비비거나 꼰 벌잇줄 하나 있었으면

끈 떨어진 뒤웅박 신세는 면했을 것인가

너와 나를 이으려고

술로 말로 줄을 매려고 마음 출렁인 적은 없었던가

그러나 한잔 술에 취하면

그건 금방 풀어지는 끈이었어

끈에는 끊어지는 속성이 있지만

가장 질기고 속된 성스러운 줄도 있는 줄 몰랐다

살아 있는 줄, 탯줄 같은

줄을 잡고 한평생 매달렸다면

노끈이나 줄끈이 아닌 명줄이나 길었을까 몰라

쓸데없는 삭아버린 철끈이나 동아줄은

거미줄처럼 얽혀 있지만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이어주는

철綴끈이 철鐵끈이기를 바라면서

줄꾼 노릇도 제대로 못하는 나는

발끈해서 앞뒤 분간도 못하지 않았던가

따끈하지도 화끈하지도 못하고

밤낮 이런 저런 일에 질끈 눈이나 감아 주면서

매끈하게 줄을 타는 연습도 하지 않았지

줄을 타겠다고 끈끈이처럼 매달려 있지 말고

줄이나 끈을 달라고 엎드려 빌어나 볼 일인가

이것저것에게 끈끈히 달라붙어 줄줄이 빌 일인가.

 

 

길은 살아 있다

 

길이 방긋방긋 웃으며 걸어가고 있다

보이지 않는 길에도

날개와 지느러미가 있어 날고 기고 헤엄친다 

길이 흐느끼며 절름절름 기어가고 있다

길이 바람을 불러 오고 물을 흐르게 한다

꽃도 길이 되어 곤충을 불러 모은다

길은 긴 이야기를 엮어 역사를 짓는다

길에는 길길이 날뛰던 말의 발자국이 잠들어 있다

길이길이 남을 길든 짐승의 한이 서리서리 서려 있다

살아 있는 것들은 모두 몸에 길이 있다

영혼도 가벼운 발자국으로 길을 낸다

태양과 별이 지구를 향해 환한 길을 만든다

시간은 영원으로 이어지는 끝없는 길이다

기다리는 길이 끊어지고 사라지기도 한다

발바닥 아래 생각이 발딱거리며 가고 있다

사랑도 이별도 길이 되어 멀리 뻗어나간다

사람도 길이 들고 길이 나면 반짝이게 된다

눈길 손길 발길 맘길로 세상을 밝힌다

 

가장 큰 길은 허공과 적막이다

발자국은 앞서 가지 못한다

길은 따뜻하다

 

 

침묵

 

침묵만한 말이 세상에 없다

바람이 울지 않듯,

나무는 한평생 말을 사약으로 삼키며

살아서 꽃을 세우고

죽어 침묵을 내려놓는다

우리의 말도 꽃처럼 허허로울 때

말은 열매를 허공에 단다

그 열매가 침묵이다

맹목 같은 시의 침목이 된다

침묵은 천년 묵은 침향이다.

 

침묵은 보석처럼 빛난다

침묵은 호수처럼 바닥이 보이지 않는다

말로도 못할 일이 있다

완전한 불완전,

그것이 시의 절대자유, 생명이요, 꽃이다

시에는 침반이 없다

가는 길이 천양지간 사방이다

시는 침묵이 피우는 맹목의 꽃

그 열매가 향기로 너에게 간다

맹물의 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