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푸른 느낌표!』2006

가을 들녘에 서서

洪 海 里 2015. 3. 14. 16:04

가을 들녘에 서서

 

 洪 海 里

 

 

 

 

눈멀면

 

아름답지 않은 것 없고

 

 

귀먹으면

 

황홀치 않은 소리 있으랴

 

 

마음 버리면

 

모든 것이 가득하니

 

 

다 주어버리고

 

텅 빈 들녘에 서면

 

 

눈물겨운 마음자리도

 

스스로 빛이 나네.

 

 

  * 밤하늘에 떠 있는 별처럼 우리 주위엔 시인도 많고 좋은 시도 많다. 요염하게 반짝이는 시가 있다면 달빛처럼 차분한 시도 있다. 거친 파도처럼 출렁이는 시가 있는가 하면 먼 산처럼 고요한 시가 있고, 아이스크림처럼 달콤한 시와 살을 저미는 고통스러운 시가 함께 있다. 내가 좋아하는 시도 수시로 바뀐다. 주지적인 시와 서사적인 시가 한때의 기호물이었다면, 그리움을 노래하는 애틋한 연시에 심취되었던 것도 꽤 오랫동안이다. 어느새 나이가 들어서일까, 세상의 분주한 시보다는 인생의 정점을 넘어선 곳에 고요히 침잠하며 자연과 삶을 노래하는 선가에나 속할 시를 요즘은 더 좋아하게 되었으니, 洪海里(1942~ )의「가을 들녘에 서서」라는 시도 그 중 하나이다.- 이근수(경희사이버대 부총장), 《님》(2007. 창간호)

 

  * 달력을 보니 막대 두 개가 서 있다. 11월은 그렇다. 좋은 시절은 가고 춥고 황량한 들판이 앞에 가려있다. 무언가 인간은 정리하고 한 해를 마감해야 하는 시기에 와 있다. 농부들은 자루에 알곡을 담고 곡간을 채우는데...시인은 무엇을 했던가. 손에 쥔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다. 그저 빈손이다. 괴로워하고 부끄러워하고 죽음까지 사랑했던 윤동주 시인을 떠올리는 것도 부질없다. 무엇을 잡으려고 떠돌기만 했다. 내 자신을 찾으려고 하진 못 했던 것이다. 이런 11월이 시인 앞을 지나간다.

 

  洪海里 시인도 빈들에 서 있다.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고 마음을 가다듬어 본다. 눈이 멀어야 아름답다고 한다. 이 말은 세상을 보고 있으니 모두 불만스럽다는 것이다. 차라리 보지 않아야 하는데 보는 것마다 오염되어 있기 때문이다. 귀로 듣지 말아야 세상이 황홀하다는 것이다. 들려오는 소리마다 마음 상하고 괴롭고 그런 사회. 그래서 내가 갖고 있는 것 모두를 버려야 비로소 가득 찬다는 것. 다 추수해 가고 빈들에 서서 우두커니 뒷짐 지고 내일을 바라보는 이 시인이야말로 눈물겹지만 스스로를 만족하는 기쁨이 부럽고 빛난다.

- 정 일 남(시인)

[출처] 가을 들녘에 서서|작성자 솔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