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봄이 오면 눈은 녹는다』(2018)

<시인의 말>『봄이 오면 눈은 녹는다』

洪 海 里 2018. 8. 13. 19:59

  <시인의 말>


『봄이 오면 눈은 녹는다 

- 치매행致梅行 3집


 

 갈 길이 멀고

 할 일이 많아

 뒤돌아볼 시간이 없다.


 詩답잖은 허섭스레기를 끼적거리느라

 아내를 돌보는 일에 소홀하지 않았는지.


 그래도

 소용없는 일이다

아내는 홀로 매화의 길을 가고 있다.


봄이 오면 눈은 녹는다.



2018년 8월 18일

북한산 골짜기 우이동 세란헌洗蘭軒에서,

洪海里 적음.



<감상평>

  홍해리 시인의 시집, 『봄이 오면 눈은 녹는다』가 도서출판 움에서 출간됐다. 홍해리 시인은 우리詩진흥회 이사장이기도 하다. 그가 이번에 치매와 관련하여 신작시 100편을 상재한 것이다. 홍해리 시인의 부인께서는 현재 치매를 앓고 계신다. 그것도 8년째 앓고 있는데 요양원에 보내지 않고 댁에서 직접 간병을 하고 있다. 말이 8년이지, 긴 병에 효자가 없다고 어떤 이는 고려장을 해도 했을 법한 세월 아니겠는가. 홍해리 시인은 이미 『치매행致梅行』과『매화에 이르는 길』을 펴 낸 바 있다. 가슴 절절한 사연들이 녹아 있는 이 시들은 문학적 가치를 논하기 이전에 인간적인 감정이 고스란히 드러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이번에 상재한 『봄이 오면 눈은 녹는다』는 앞서 펴낸 시편들과는 달리 편안한 면이 보이는 것 같기도 하다. 왜냐하면 초기 치매 증상 때 겪은 황당함이나 하늘이 무너질 것 같은 좌절감은 이제 어느 정도 적응되었다고 생각들기 때문이다. 치매에 관해 새삼 어떤 병이라고 말해 무엇하겠는가, 어쩌면 암보다 더 황망한 질병인 치매는 한 가정의 근심덩어리이자 불화의 원인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시인은 치매를 매화에 비유하고 있다. 북풍한설을 견뎌내고 마침내 봄이 오기도 전에 매화는 꽃망울을 뜨린다. 춥고 외로운 길을 가는 동안 매화는 얼마나 고통을 감내했을까. 그 길을 가는 아내를 지켜보는 남편의 심정은 또 어떨 것인가. 다음 시는 이번 시집 '시인의 말'로 올려진 글이다.

갈 길이 멀고/
할 일이 많아/
뒤돌아볼 시간이 없다/​

  1연에서는 화자와 대상이 중첩된다. 아내 입장에서는 먼길을 가기 위해 여장을 꾸리느라 시간이 없을 것이고 화자인 시인은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시간을 고통 가운데 보내야 할 것인지, 그로 인해 간병해야 할 일이 또 얼마나 생길 것인지, 서로 간에 공유한 시간에 대해 걱정과 염려로 채우고 있다. 좋은 일로 바쁘면 얼마나 좋을 것인가, 산 너머 산, 갈수록 태산인 현재의 상황이 물리적 시간을 말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詩답잖은 허섭스레기를 끼적거리느라/
아내를 돌보는 일에 소홀하지 않았는지/

  시인이란 무릇 시를 쓰는 일에 몰입을 해야 하는 입장이다. 시를 쓴다는 핑계로 무던히도 아내 속을 썩인 시인은 어쩌면 아내가 평생 곁을 지켜줄 것이라 믿었던 이유일 것이다. 지금에사 돌이켜보면 재대로 챙겨주지 못해 이러한 질병이 아내에게 온 것이라 생각하니 가슴이 먹먹할 정도로 반성과 후회를 물먹듯 들이켰을 것이.

그래도/
소용없는 일이다/
아내는 홀로 매화의 길을 가고 있다./

  그렇다. 후회란 것을 한들 이미 진행된 사건을 처음처럼 회복시키지는 못한다. 체념에 가까운 시인의 심정이 이 연에서 읽을 수 있다. 앞서 말한 대로 8년이란 세월 동안 회복의 기대가 왜 없지 않았겠는가, 병원에서 하라는대로 했을 것이고 이 땅의 신이란 신들은 죄다 찾았을 것이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내는 회복이 더디다, 아니 절망에 이르러 병세를 인정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인 것이다. 누군들 그렇지 아니 그렇겠나, 병세 호전을 위해 최선을 다해 헌신했을 노고가 더는 가망이 없다고 느낄 때 그 실망감이란 겪어보지 않고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
시인은 방관도 방치도 아닌 허탈의 길을 가고 있는 것이다.

​봄이 오면 눈은 녹는다./

  이 시편의 절정이다. 봄이 온다는 것은 둘 중 하나다. 모진 풍파를 이겨내고 다시 꽃망울을 맺든가 아니면 추위에 고사하는 것, 그래도 시인은 고사가 아닌 희망을 노래하고 싶은 것이다. 그래서 꽁꽁 얼어붙은 모든 것이 녹아 육적으로나 영적으로 물처럼 유유히 흘러가기를 고대하고 있는 것이다.

  시인은 할말을 시로 풀어내는 일이다. 그동안 겪었던 간병일지로『봄이 오면 눈은 녹는다』는 이 시집으로 마감한다고 했다. 총 330편 시편으로 하고 싶은 이야기를 정말 다 마감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혹여 시인과 같은 처지에 놓여 있는 독자가 있다면 이 시편을 반드시 보시라. 동변상련의 아픔이 또는 슬픔이 승화되어 평안이 깃들 수 있으리라 본다.
부디 평강만 있으라.

    - 전선용(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