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봄이 오면 눈은 녹는다』(2018)

시집 『봄이 오면 눈은 녹는다』발문 / 임채우(시인 · 문학평론가)

洪 海 里 2018. 7. 13. 13:13

<발문>

시집 봄이 오면 눈은 녹는다

 

촉도난蜀道難

 

 

        임채우(시인·문학평론가)

 

 

   치매행이 세 권에 이르도록 아직 끝이 보이질 않습니다. 세간에 이르기를 참으로 지독한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여느 시인이라면 잘해야 시집 한 권으로 떨어질 고뿔 같은 것을 장장 세 권에 걸쳐 아직도 껴안고 있으니, 우리 문단에 간병 문학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열었음은 물론이요, 한 인간으로서 인정에 곡진함이 세상에 물결칩니다.

   당신께서 말씀하길, 병든 아내를 팔아먹고 있는 시인이라고 자조하곤 하셨습니다. 어떤 이는 자신이라면 그런 시를 쓰지 않겠노라고 부정적인 언사를 생각 없이 입에 올렸습니다. 또 어떤 이는 시인께 이런 절창을 안겨주려고 아내가 병이 든 모양이라고 탄식과 아울러 그의 시를 상찬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경향 각지 치매 환자를 돌보는 그 가족들이 서로 고통을 나누며 고맙다는 인사를 숱하게 전하는 것을 곁에서 지켜보았습니다. 인생의 쓴맛을 본 겸손한 자들은 당신의 언어에 연민의 눈물을 뿌리는가 하면, 가리개를 씌운 경주마처럼 자기 앞만 보는 자들은 오불관언이라 하였습니다.

   제가 시인님 곁에서 시인의 길을 걷게 된 것이 햇수로 8, 그 기간이 사모님의 투병 기간과 우연히 일치하여, 발병에서 지금까지 가까이에 있었습니다. 워낙 당신께서는 자신의 신상에 관해서는 과묵하신 분이라 세세한 것까지는 몰라도 그 진행 과정은 알고 있습니다. 저는 시인님과의 인연으로 1시집 치매행致梅行(2015,황금마루)의 끝에 필화筆花 한 송이라는 과분한 발문을 붙였습니다. 2시집 매화에 이르는 길(2017, 도서출판 움)이 발간되고 나서는 시집의 해설 매화와 낙타의 이중주우리(2017.7월호)에 발표했습니다.

  시인님을 걱정하는 사람들은 당신께서 애써 침착함을 유지하나 내면의 노심초사와 전전긍긍을 지켜보며 발 벗고 나서서 거들 수도 없고, 매번 물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지나칠 수도 없는 실로 난감한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아직도 시인님과 사모님의 고난은 현재진행형입니다. 우선은 이번 세 번째 시집이 발간되어 시인께서 붓을 들고 있는 한 절망적은 아니라는 단순한 생각에 와락 고마움을 껴안았습니다.

   이 글은 감히 시집의 발문이라기보다는 당신께서 그동안 잘 견뎌주셔서 고맙고, 앞으로도 더 큰 어려움이 닥치더라도 좌절하지 말고 잘 이겨내시라고, 김종삼 시인의 墨畵에서처럼 발잔등이 부은, 물 먹는 소의 목덜미에 손을 얹은 행위였으면 좋겠습니다.


치매행은 간병看病 기록이다

 

   치매행은 치매에 걸린 한 지어미에 대한 지아비의 간병 기록입니다. 간병을 흔히 병수발또는 병시중이라고 합니다. 중증 환자나 나이가 들어 거동이 불편한 환자의 손발이 되어주는 것인데, 전문 요양사가 있지만, 대부분 가족이 돌봅니다.

   시인을 걱정하는 주변 사람들이 노인이 집에서 환자를 돌보는 것이 너무 힘드니 시설 좋은 가까운 요양원에 모시자고 얼마나 권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당신께서는 한사코 거부했습니다. 자식들이 나서서 어머니를 요양원에 모시자고 간곡하게 말씀드렸지만, 당신께서는 그 제안도 끝내 거절하셨습니다. 시인의 의식 속에는 요양 시설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자리잡고 있는 듯합니다. 그러나 어찌 그뿐이겠습니까. 당신의 내면에는 아내의 발병에 대한 자신의 책임이랄까, 그런 것이 있는 듯합니다.

   시 내 탓(305, 앞으로 시집 인용 출처는 부제에 붙은 일련번호만 사용한다.)을 보면 아내가 와불이 되다니/ 아 내 탓이로다, 내 탓!”이라고 절규하고 있습니다. 아내의 발병이 자기가 밤낮없이 술 먹고 다니고, 주말이면 난 캐러 다니고, 시도 때도 없이 시 쓴다고 혼자 놀아서 집안의 태양이 빛을 잃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부채의식은 급기야 안다미씌워서야 쓰겠는가/ 내가 지고 갈, 내 안고 갈 사람”(262)이라고 결론을 내립니다. 여기서 안다미씌우다자기 책임을 남에게 지우다라는 말입니다.

   당신은 그런 사람입니다. “사람은 몸에 옷을 맞추지만/ 때로는 몸을 옷에 맞추라 한다.// 짧은 다리는/ 긴 다리보고 맞추라 하고,// 긴 다리는/ 짧은 다리한테 맞추라 한다.”(232)면서, 와불처럼 누워 있는 사모님에게 우리답게 사는 것이 무어냐고 묻습니다. 사모님은 묵묵부답입니다. 사람마다 살아가는 환경과 여건이 제각각인데 보편적인 척도로 개별적인 것을 일률적으로 재단한다는 것은 모순이라는 것입니다. 마치 침대 길이에 맞춰 다리를 잘랐다는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와 진배없는 것이지요. 시인께서는 마지막까지 아내의 품위를 지켜주기 위하여, 한 지어미에 대한 지아비의 지극한 사랑으로 오늘도 병상을 지키고 있습니다.

   치매행은 간병 일지입니다. 시인께서는 무려 8년 동안이나 치매에 걸린 아내 곁에서 그 진행 상황을 사실적으로 기록하였습니다. 치매행 연작 330편에서 시인의 시적 언사를 거둬버리면 고스란히 사모님의 상태에 대한 객관적인 기록만 남습니다.

   시 일지(299)를 보면, 사모님의 발병부터 최근까지 시간의 흐름에 따라 그간의 경과를 진술하고 있습니다. 시작은 발병 전 평화라는 말에서 출발합니다(1~4). 최초의 증세를 느낀 것은 언어장애가 나타나고부터입니다(5~7). 인근 큰 병원으로 달려가 진찰을 받고 드디어 발병을 확인합니다(8~11). 알츠하이머 전두엽 기능 장애로 이상행동이 돌출되는 시기가 뒤따릅니다(13~25). 집에서 관리가 어려워 주간 요양 센터에 보냅니다(26~36). 이 시기에 새 정권이 들어서고 치매 국가책임제라는 정책이 발표됩니다(37~41). 사모님을 더 이상 요양 센터에서 받아주지 않아 집에서 24시간 간병인을 써가며 돌보고 있습니다(45). 시는 결코 모호하거나 어렵지 않습니다. 치매행 연작은 한결같은 어조로 평이합니다. 치매가 이 시대의 공동문제라면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게 당신의 생각입니다. 시적 기교로 자기 생각과 정서를 표현한다는 것은 오히려 사치스러운 일입니다. 물에 빠진 사람의 다급한 절규가 어떻게 시적 표현일 수 있겠습니까?

   이 사실적인 시 뒤에 당신께서는 의도적으로 2015.8.14.~2017.11.11.까지의 짤막짤막한 긴 관찰 일지를 달아놓았습니다. 이것은 시인께서 정기적으로 대학병원에서 처방전을 받아 약을 짓는데, 환자가 거동할 수 없어 시인께서 담당의에게 보이는 자료입니다. 왜 시인께서는 생략하여도 될 긴 부록을 299 뒤에다 달아놓았을까요. 간병이 이렇게 힘들고 고생스럽다는 것을 말하고 싶어서일까요. 저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을 시의 끝에 붙여 그 실상을 노출한 것은 시인이 겪고 있는 특별한 상황을 객관화시켜 8년간 부부가 겪었고, 지금도 진행 중인 고난의 실체를 폭로하고자 함이 아닌가요. 부부가 싸우고 있는 상대의 유치찬란한 실상을 백일하에 드러냄으로써 인간이 얼마나 낮아질 수밖에 없는 존재인가, 우리가 경하에 마지않는 삶이란 것의 바닥은 어떤 모습인가를 여과 없이 드러내려는 의도로 보입니다. 이 역시 당신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치매행은 간병인看病人에 관한 기록이다

 

   치매행은 화자가 치매 환자를 돌보며, 환자의 상태에 따라 일희일비하며, 그리고 소망까지 피력하고 있는 시집입니다. 화자와 환자와의 소통 부재는 병세의 악화와 정비례합니다. 시의 화자는 누구인가요. 환자를 돌보는 간병인이자 시인 자신입니다. 시인이란 언어로 표현해야 하는 천형天刑을 타고난 사람인데 이 소통 부재의 무력감은 시종여일 당신을 절망케 합니다.

   치매행은 화자의 독백으로 이루어진 시집입니다. 거대한 모노드라마의 대사가 메아리도 없이 절벽에 부딪혀 낙엽처럼 쌓여만 갑니다. 무대 위에 등장인물은 두 사람인데 한 사람은 입을 다문 역을 맡아 자기 역할에 충실하고, 한 사람은 상대방 주위를 맴돌며 꽃을 보고, 새를 보고, 꿈을 이야기하고, 우리가 맞이할 봄날을 이야기하면서 끝임없이 혼자서 말합니다. 무대 위의 두 사람 다 자기 역할에 기진맥진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런 당신의 모습을 1시집 발문에서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에 나오는 산티아고 노인과 같다고 표현했습니다. 그는 84일간 줄기차게 바다로 나가나 빈 배 저어 돌아오는 재수 없고 불우한 노인입니다. 그 노인이 85일째 다시 바다에 나가 이번에는 천신만고 끝에 큰 물고기를 잡게 됩니다. 그러나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상어를 만나 사투 끝에 부두에 도착했을 때에는 앙상히 뼈만 남은 물고기를 달고 있었습니다. 저는 노인의 사투를 거대한 절망에 저항하는, 도도한 허무주의에 대항하는 모습이라고 하였습니다. “사람은 박살이 나서 죽을 수 있을지언정 패배는 당하지 않아라는 당찬 사자후가 바로 당신의 목소리라고 하였습니다.

   그런가 하면 2시집 해설에서는, 낙타행(152)의 한 구절을 인용하여 당신을 낙타로 비유했습니다. 낙타는 오로지 의무에만 매달려 있는, 짐을 잔뜩 실은 노예 상태의 인간을 지칭하는 말이라고 니체가 말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아내를 돌봐야 하는 당신의 처지를 빗댄 말이지만, 이 말은 매화로 비유되는 아내의 세계와 화자의 세계가 구분되어 있음을, 자기 역시 매화의 세계를 희구하나 낙타의 삶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노라고 쓴 적이 있습니다.

   또한 매화인 아내와 낙타인 화자와의 관계를 지구와 달로 비유하였습니다. 지구와 달은 서로 끌어당기는 힘으로 달이 지구 둘레를 끊임없이 돕니다. 치매에 걸린 아내가 지구이고 화자가 그 주변을 맴도는 달인 셈입니다. 지구와 달이 가까워질 듯 멀어집니다. 이 둘의 거리가 가까워지면 화자는 행복감에 휩싸이고, 멀어지면 나락에 떨어집니다. 달과 지구의 운동이 무한 반복되듯이 화자 또한 희망과 절망이 반복됩니다. 치매행에서 똑같은 이야기가 변주되면서 반복되는 것은 지구를 돌고 있는 달처럼 일상이 반복되기 때문입니다.

   치매행은 시시포스 신화의 재현입니다. 그리스 신화에 의하면 시시포스는 코린토스의 왕이었는데, 신들을 기만한 죄로 영원한 형벌을 받게 됩니다. 그가 받은 형벌은 올림포스 산정 위로 커다란 바위를 밀어 올려 거의 산꼭대기에 다다르면 아래로 굴러 떨어지고, 다시 올리면 굴러 떨어지는, 영원히 의미 없는 노동입니다.

   산티아고의 노인이자 낙타며, 달이자 간병인이며, 화자이자 시시포스인 그대여!

   그대는 무엇 때문에 그리 절망합니까?

   그대가 바라는 것이 무엇인가요?

   그대가 가고 싶은 세계는 어디입니까?

   당신께서 염원하여 마지않은 세계는 인간계를 뛰어넘는 구경究竟이나, 누구도 발을 딛지 못한 이상향이나, 지극히 관념적인 형이상학의 범주가 아닙니다. 병들어 아파하는 지어미를 지극정성으로 오로지 간호하는 지아비의 마음에 간절히 구하는 바가 무엇이겠습니까? 병든 아내가 낫기를 바라는 마음뿐이라는 것이 너무도 당연하지 않습니까? 아내가 예전처럼 병에서 자유 몸이 되어 두 분께서 꽃 피는 봄날이며 새 우는 소리, 푸른 신록이며 짙푸른 녹음, 떨어지는 낙엽이며 분분히 날리는 눈을 바라보고 싶다는 것이 그리 큰 소망인가요? 자식들과 손자 손녀를 무릎에 앉히고 오순도순 정담 나누며, 아내의 사랑스러운 눈매를 그윽이 바라보고 싶다는 것이 그리도 큰 욕심인가요? 당신께서는 소소한 일상의 회복을 꿈꾸고 있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복낙원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실낙원과 복낙원 사이를 우왕좌왕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당신만의 일이고, 사모님은 전혀 반응이 없는, 아무런 생각도 표현도 없는 와불이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 모든 것의 한복판에 핵처럼 존재하고 있는 아내의 병세는 날로 심각하여 가고, 그럴수록 시인은 성마르고, 감정의 굴곡이 심해지고, 절망과 좌절 속에 어쩔 줄을 모릅니다.

   절망에서 터지는 절규가 시집을 가득 채우고 있습니다. 치매행 2시집에서 가끔 보이던 희망이 3시집에 이르면 거의 자취를 감춥니다. 고작해야 과거 사실에 대한 가정이 미온적으로 나타날 뿐 어디로 가는지, 어떻게 할지도 모르는 폐선이 다 된 목선 한 척(250), 그나마 희망을 뜻하는 뱃고동에 귀먹고 등댓불에 눈멀어 그야말로 캄캄한 그믐밤을 헤매고 있다(252)는 것이 화자이자 간병인이자 시인의 현주소입니다.

 

촉도난蜀道難


   인간을 부조리한 존재라고 설파한, 프랑스의 작가이자 철학가인 카뮈는 시시포스를 모티프로 그의 철학을 개진하였습니다. 그는 아이러니하게도 시시포스를 인생을 충만하게 사는 부조리의 영웅으로 간주했습니다. 죽음을 증오하고 의미 없는 일을 반복하도록 선고받은 시시포스가 행복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비극적인 순간에도 자신의 비극적 존재를 제대로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불가에서 말하기를 색즉시공色卽是空이라 합니다. 색즉시공이란 현실 세계의 생멸 변화하는 물질 현상의 실상은 실체가 없다는 말입니다. 즉 우리가 울고불고 하는 이 현실계의 모든 것이 실은 없다는 것이지요. 당신께서 그토록 마음 쓰고 있는 것이, 매일 매일의 일상이, 와불이 되어 누워 있는 아내가, 새가, 꽃이, 낙엽이, 분분히 날리는 눈들이 실상은 가상의 세계에 불과할 뿐 실체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시시포스의 도로徒勞는 무슨 의미가 있으며, 세상은 과연 살 만한 가치가 있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뮈는 이 부조리한 실상을 제대로 인식하는, 내일 또다시 커다란 바위를 산정에 올려야 하는 시시포스를 행복한 존재라고 말하였습니다. 85일째 바다에 나가 마침내 큰 물고기를 낚았으나 상어에게 물어뜯긴 불우한 노인 산티아고는 88일째에도 역시 바다로 나갈 것입니다.(커다란 물고기와의 사투와 상어 떼로부터 고기를 지키기 위해 2박 3일이 걸렸다.) 불가의 색즉시공色卽是空또한 공즉시색空卽是色이란 말과 짝을 이뤄야 비로소 완전해집니다. 공즉시색은 아무것도 없는 폐허 속에서 하잘 것 없이 보이던 일상이 오롯이 돋아나고 있지 않습니까?

   끼어들 계제가 아니지만, 잠시 제 이야기를 하는 것을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저는 젊은 시절 당나라 시선 이백의 촉도난蜀道難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어허라/ 험하고도 높구나/ 촉도의 험난함이여/ 하늘 오르는 것보다 어려워라”(噫吁戱 危乎高哉 蜀道之難 難于上靑天). 이백이 장안에서 촉, 지금의 사천四天 지역으로 갈 때 지나는, 잔도棧道로 이어진 험난한 길을 읊은 한시입니다. 당시 저는 이 시를 읽으며 촉도의 험난함에 모골이 송연해졌습니다. 앞으로 내가 겪을 인생이 이런 험로구나 하고 생각하며, 미래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에 휩싸인 적이 있었습니다.

   인생의 중반을 넘어, 그간의 여정도 촉도와 같은 험로였는데, 아내가 덜컥 불치의 병에 걸렸습니다. 매뉴얼대로 수술하고 이후 노심초사하며 관리하기 십 년, 그리고 재발하였습니다. 다시 병상을 지키기 4, 그 어느 날이었습니다. 그날은 토요일 오후였는데, 큰 병원에서 입원기일이 다 찼다고 그보다 작은 협력 병원으로 쫓겨났을 때였습니다. 병실에 날짜 지난 신문이 있어 잠시 들여다보는데 문화면의 한 기사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서울 성북동에 있는 간송미술관에서 조선 시대 회화전을 연다는데, 국가지정문화재 보물인 현재玄齋 심사정沈師正<촉잔도蜀棧圖>가 전시된다는 기사였습니다. 그날 오후 몸과 마음이 피폐할 대로 피폐한 제가 누군가에게 병실을 맡기고 물어물어 미술관을 찾아갔습니다.

   심사정의 촉잔도는 종이에 그려진 담채화로 8m가 넘는 두루마리 그림이었습니다. 비록 채색은 약간 바랬지만, 보관 상태가 좋은지 험난한 산세며 거센 물줄기, 툭툭 불거진 기암절벽들이 파노라마처럼 눈앞에 펼쳐졌습니다. 위로는 해를 끄는 여섯 마리 용도 돌아가야 하는 높은 표적 같은 봉우리가 있고, 아래는 거센 물결 꺾어 도는 계류였습니다. 누른 학들조차 날아 지나지 못하고, 날쌔다는 원숭이도 오르자니 걱정입니다. 벼랑 위엔 거꾸러질 듯 마른 소나무 걸려 있고, 빠른 여울 내지르는 폭포는 다투어 소리치고, 급류에 부딪혀 구르는 돌 일만 골 천둥입니다. 이백의 촉도난蜀道難이 고스란히 화폭에 담겨 있었습니다.

   저는 그림 앞에서 발을 뗄 수가 없었습니다. 심호흡을 해도 두려움과 떨리는 마음이 진정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내 인생 역정이었습니다. 저는 천 길 낭떠러지 절벽 위 실낱같은 잔도 위에 후들거리는 두 발로 숫제 서 있었습니다. 더구나 저는 홀몸이 아니었습니다. 병든 아내를 업고 어린 자식들 손목을 잡고 잔도 위에서 오도 가도 못 하고 있었습니다. 어렵사리 잔도 하나를 겨우 넘으면 또다시 더 높은 잔도가 아찔하게 허공에 매달려 있고 발아래 급류가 삼킬 듯이 우르릉대고 있었습니다. 산 넘어 산이요, 물 건너 물입니다. 한참을 얼이 빠져 그림을 들여다보고 있는데, , 그런데 뜻밖에도 그 안에는 어떤 온화하고 부드러운 빛이 서려 있었습니다. 비록 인생은 험난하고 촉도는 무진하나 저를 위로하고 감싸주는 듯한 따뜻함이 화폭에서 우러나왔습니다. 아니 이것은 저의 착각일 수도 있겠습니다. 당시 저는 인생의 험로에서 누군가로부터 진심으로 위로받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저는 입술을 깨물고 밖으로 뛰쳐나와 미술관 사택으로 들어가는 휴게 자리 소나무 아래에서 얼마나 뜨거운 눈물을 흘렸는지 모릅니다.

   이제 이 글을 맺고자 합니다. 치매행 연작 안에는 덧없는 일상을 뛰어넘어 영원의 세계를 매만지는 듯한 시편들이 있습니다. 저는 이것들이 가장 시인다운 시편이며, 치매행의 진수라고 생각합니다. 이 시편들은 고난 중에 반짝이는 별처럼 서정의 영원성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마치 번갯불이 번쩍할 때 눈에 비치는 현상계의 실상이며, 높이 나는 새가 한눈에 내려다보는 하감의 세계라고 생각합니다. 촉도를 건너는 법은 어렵습니다. 아슬아슬한 잔도를 밟고 계류를 건너 촉 땅으로 가야만 합니다. 이것은 초월이며 보다 더 큰 세계로의 비상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시인만이 촉도를 건너는 법을 알고 있습니다.

 

강을 안고 날아가는 쇠기러기야

 

오늘 밤은 내게 와서 고이 쉬거라

 

하늘가에 흘러가는 날개의 물결

 

기럭기럭 우는 소리 은하에 차다.

     - 한천寒天 -치매행 · 260 전문.

 

- 林采宇 | 시인·문학평론가